2012. 2. 17. 08:18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퇴임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가치 있는 자서전은 거짓과 꾸밈 없이 진솔하게 써야하는데,
정치인으로서 관계를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현업에 있는 상황이라
모든 사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기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많이흐른 후에야 자서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검찰 수사가 대통령 주변을 옥죄어 들어왔던 시점에 와서야 회고록을 써야겠다며
목차와 생각의 편린들을 메모하기 시작했지만,
그에게는 이미 그 일을 할 만큼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열네 줄 짧은 글 하나만 남기고 떠나 버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회고록을 쓰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날을 더 살아가야 할 '노무현의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2010년 4월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문재인
이 자서전은 "인간 노무현이 자신의 삶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은 자신의 삶에 관한 자필기록과 구술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 기록들을 시간과 사건에 따라 재구성, 압축하면서 '재집필'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최초의 중요한 자전적 기록은 미공개 자필기록 「오! 민주여! 사람 사는 세상이여!」입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총선에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직접 쓴 것입니다.
두번째 자전적 기록은 1994년 단행본으로 출간한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입니다.
세번째 자전적 기록은 2001년에 작성한 미공개 구술기록<통합의 정치를 향한 고단한 도전>입니다.
네번째는 2007년부터 2008년에 걸친 청와대에서 구술한 <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입니다.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고향에 돌아온 후 쓴 다양한 자필기록과 구술기록이나 녹취록들은
『성공과 좌절』(2009.9), 『진보의 미래』(2009. 11)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밖에 『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쉽 이야기』(2002), 『상식 혹은 희만, 노무현』(2002),
『노무현,한국정치 이의 있습니다』(2009), 『있는 그대로 대한민국』(2007),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2001 강준만),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2002 유시민) 같은 자료가 그것입니다.
2010년 4월
유시민
나는 진영중학교· 부산상고를 다니면서 부일장학생으로 뽑혔다.
부일장학회를 운영한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 선생은 내인생의 디딤돌을 놓아준 은인이다.
그런데 5. 16 이 난 후 김지태 선생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
부일장학재단 재산도 모두 5. 16 장학재단으로 넘어갔다 나중에 정수장학 재단이 되었다.
나는 변호사가 된 뒤에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를 바로 잡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군사정권은 남이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종로에서 떨어진 뒤나는 '3김청산'이라는 구호를 버렸고 지역주의 타파 이야기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것은 논리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역정서는
논리로 설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적절한 계기가 되어야 풀 수 있으며,
영남과 호남 모두에서 신뢰받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나오는 것이 그런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원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략적 전술적 명제는 타협할 수 있다.
나는 '3김청산'이라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 타협할 수 있는 전략적 명제라고 보았다.
복지는 분배에 좌우된다. 분배에 자연법칙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다 사람 마음에 달려있다.
외환위기 터지고나서 IMF의 압박을 받는 가운데 경제단체와 보수세력이 노동시장의 유연성,
다시 말해서 정리해고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대공세를 펼쳤다.
그런 환경 때문에 국민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수용했다. 참여정부도 그대로 이어나갔다.
사용자 쪽에서 이 무기를 휘둘러 시장 분배를 악화시켰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악용해서 실질임금을 깎았다.
노동조합1의 조직력과 교섭력은 현저히 약해졌다.
대듀모 정리해고로 자영업이 팽창했다. 그러자 공급과잉으로 자영업이 어려움에 처했다.
단기적으로 정부가 힘을 쓸 가 없었다.
세계적 조류이고 자본측의 힘이 너무도 막강해 거부할 수도 없었다.
노사정 대화를 통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룸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 또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리해고를 수용한 것은 민주정부와 진보세력의 뼈아픈 패배였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는 보유세 제도를 적당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확실하게 했다.
그래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극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부동산 거래 신고를 실거래가로 하게 해서 과표가 게속 올라갔다.
세율을 올리지 않아도 과표가 올라가면 세액도 올라간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마치 세율을 올린 것처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처럼 왜곡했다.
몇가지 이유 때문에 적절항 시기에 효과적인 정책수단을 투입하지 못했다.
종부세는 국회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고 심의를 지연시켰다.
과세기준과 과세대상을 자꾸만 낮추고 줄이려 했다.
2005년과 2006년에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바람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강력한 유동성 규제는 다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정책수단으로 관리하려고 했다가 낭패를 봤다.
몇차례나 경제보좌진과 관계부처 장관에게 묻고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것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담보 대상 부동산 가치의 절반 이하로 대출상한을 적용하는 LTV 규제와
개인의 소득에비례해서 대출총액을 통제하는 DTI 규제를 도입했다.
부동산 가격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효과적인 정책수단을 너무 늦게 투입한 것은 뼈아픈 실수였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도 이러한규제를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뒤늦게라도 강력한 유동성 정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2008년 세계 위기 때 우리 경제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지독한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취임식 바로 다음날 여의도에서 '고약한 선물'이 왔다.
국회를 지배하고 있던 한나라당이 '대북송금특검법안'을 단독처리해 정부에 보낸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제 1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때 현대그룹이 4억달러를 몰래 북으로 보낸 것이 문제였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산업은행을 통해 그 도을 송금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청와대 참모들과 국무위원들이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지만 나는 수용했다.
이제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게승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국민의 합의를 모아서
해 나가겠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대북송금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작정 수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4억달러를 제공한 현대 쪽에서 바라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자꾸 말이 흘러나왔다.
야당과 보수언론이 주고받기를 하면서 의혹을 눈덩이처럼 부풀렸다.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을 막을 수는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을 수는 없엇다.
검찰 수사를 막을 수 있는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검찰에 지시하고 우길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이 나서주셔야 했다.
"나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있더라도 남북관계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았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신뢰할만한 사람을 보내서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울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심 박지원 실장이라도 대신 나서주기를 바랐다.
그랬더라면 검찰 수사도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에 국한해서 하도록 수사 지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수사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검찰보다는 특검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누가 수사를 하든 대북송금의 절차의 위법성을 밝히는데 그쳐야지
남북관계의 근간을 해치는 데로 확대되어서는 안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대한 조직과 인력을 가진 검찰에 맡기면 수사가 다른 곳까지 갈 가능성이 컷다.
4억달러와 관련하여 현대와북 한 정부 사이에 오고간 협상내용이라거나 남북간의 문제,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돈의 출처로 인한 현대그룹의 비자금 문제까지 터질 수 있었다.
게다가 박지원 실장과 주변 인물들의 비리를 밝히겠다고 검찰이광범위한 계좌추적과 수사를 할 경우,
정치자금 문제로 불똥이 튈 위험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력과 활동범위가 법으로 제한된 특검에 맡기는 것이차라리낫겠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송두환 특검은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만 정확히 수사했다. 남북관계에도 큰 타격은 없었다.
박지원 실장을 비롯한 유죄선고를 받은 모든 관련자들을 형이 확정되자마자 사면했다.
김대통령도 처음에는 서운해 하셨지만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나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이간시키려고 햇다.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할 때까지, 나는 63일 동안 청와대 관저에 칩거했다.
그날 밤부터 잠을 잤다. 자도 자도 잠이 끝없이 밀려왔다.
일주일을 자고 나니 정신이 들고 기운이 났다. 책을 읽었다. 귻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관저 앞마당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젼 뉴스를 보며 아내는 우리 편이 저렇게 많이 왔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버럭 겁이 났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밤마다 촛불을 들고 와서 나를 탄핵에서 구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무엇을 요구할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촛불 시민들의 함성에 실려 왔다.
대북송금특검법이 한나라당이 보낸 '고약하지만 수령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취임 축하선물'이었다면
이라크 파병 요청은 미국이 보낸 "고약하지만 수령을 거절하기 어려운 축하선물"이었다.
미국의 북한 폭격론이 떠돌던 시점이라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격렬한 정치적 사회적 논쟁이 벌어졌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한미관계 전체를 흔드는 군사외교 정책의 쟁점이었고,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지지층의 향배가 걸린 민감한 국내정치 쟁점이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과의 관계를 잘 관리하지 못할 경우 북한 핵문제와 남북관계에 큰 악영향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었다.
결국 파병안을 내기로 했다. 배신자라는 비난을 각오했다.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미국의 요구는 1만명 이상의 전투병력 파견이었다.
결론 전투병 3,000명을 보내되 비전투 임무를 주는 것이었는데, 시민단체들의 파병반대운동이 큰 의지가 되었다.
한미관계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잡으려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얼마나 긴 시간을 두고 어떤 순서로 해결할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주한미군 재배치, 용산기지 이전,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이라크 파병 등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그런 전략에 입각해 관리했다.
북한 핵문제는 본질적으로 북미관계에서 생긴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도해서 해결하기는 어렵다.
한반도 분쟁의 당사자이면서도 전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 때문에 5년 내내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북한과미국에 대해서 화가 날 때도 많았다.
그 분노를 밖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북핵문제의 본질과 구조는 변함이 없다.
체제 위협을 느끼는 북한이 핵무기를 지렛대로 삼아 그 위협을 항구적으로 해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과 북한에 대해서 평화를 깨트리는, 채찍을 쓰지 않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는 내 카드패를 감추는 협상전략보다 예측이 가능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게는 남측을 믿고 미국과 대화를 해도 되겠다는 믿음을 주려 했고,
미국에게도 한국을 믿고 북과 대화를 해도 되겠다는 믿음을주려고 노력했다.
한국 정부가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면 불신 때문에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없다.
나는 미국 행정부를 설득했다.
핵폐기와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 북미수교, 경제지원, 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현안을 일괄타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북한이나 미국 네오콘보다도 더 버거운 상대가 국내 언론과 한나라당이었다.
더 강한 압박과 실질적인 제재를 요구했다.
북한에 대한 증오와 대결주의를 조장하는 정치인과 언론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2006년 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이것은 대북송금특검, 이라크 파병 수용, 대연정 제안에 이어 정치적 지지층이 등을 돌리게 만든 네번째 선택이었다.
즉흥적으로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한 것처럼 비판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취임하고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미 추진하기로 기본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국민이 정부때 체결한 한 · 칠레 FTA 국회 비준동의 문제로 농민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는 상황이라서
일을 진전시킬 형편이 못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과 FTA를 추진했으나 서로의 요구가 너무 달라 중단하고 캐나다와 협상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한 · 캐나다 FTA 를 통해서 미국을 끌고 오겠다고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미 FTA 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한번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경제 정책적 판단 말고 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권하고 싶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사의 흐름을 타고 과감한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경제의 흐름을 보면 장기적으로 FTA를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던 대한민국은 굴욕외교를 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검찰조직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해서 두 가지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하나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어 수사권을 주는 거였다.
그러나 걸창조직이총동원된 로비에 의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이 지켜지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팬개쳐 버렸다.
이 두가지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국세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착각을 했다. 대통령이 국세청의 정치적 중립과 투명성에 대한 의지가 없으면,
국세청 같은 관료조직은 하루아침에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 이상을 추구한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었다.
내 불찰이었다. 나는 생각의 함정에 빠졌다.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합당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고,
권력과 선거구제를 주고받으면 어느 쪽도 손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쪽 사람들은 합당과 연정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 혼자 잡은 정권인가? 당신 혼자 넘겨주고 말 것인가?" 이렇게 되묻고는 차갑게 돌아서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권력과 정치를 보는 국민의 시선과 의식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 못했던 것이다.
대연정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대연정을 해서라도 선거구제를 고치려고 욕심을 부렸던 이유만큼은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참패를 보면서 생각했다.
정치에도 인간적 신뢰가 있어야 한다.
노무현과 차별화를 하려면 차별화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무엇 때문에 차별화 해야겠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인기가 없으니까, 당신의 지지율이 떨어졌으니 차별화해야겠다면 차별화하는사람도 얻을 것이 없다.
이것은 또한 인간적인 배신이다.
그선거에는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다 책임지겠다는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근거도 없는 '경제파탄론' 앞에서 먼저 반성한다고 말해버렸으니 무엇을 가지고 선거를할 것인가.
원칙을 지키면서 패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원칙을 잃고 패배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던가? 가장 중요한 것은 공약 실천이었다.
"상식이 통하고 우너칙이 지켜지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나라",
"정경유착, 반칙, 특혜, 특권이 없는 사회",
이 약속을 지키려고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이라는 네 가지 국정원칙을 세웠다.
마지막 것은 시원치 않았지만, 나머지 셋은 성과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를 파탄냈다는 비난을 들었다.
야당과 언론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면 5년낸 경제 파탄이 아닌 순간이 없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소비생활이 줄어들고 중산층이 주저앉고 양극화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적 근거나 원칙 없는 비판이 너무나 많았다.
한나라당과 보수신문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집권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다.
진실이 아니다. 그 반대가 진실이다.
우리가 집권하기 전에 한국경제는 엎어져 있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2003년과 2004년에 카드채 위기가 다시 닥치면서 휘청거렸지만 참여정부가 붙들어서 똑바로 걷게 만들었다.
그 10년 동안 한국경제는 웬만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탄탄한 체력을 길렀다.이것이 진실이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 1인당 국민총소득은 1만 2100 달러였다.
내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2만 1695 달러가 되었다.
이것은 김영삼 정부(IMF) 때 7355 달러에서 세 배로 올려놓은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말 외환보유고는 36억 달러에 불과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채무를 조기 상환하고 1234억 달러를 채워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것을 두 배가 넘는 2620억 달러로 만들어 이명박 대통령에게 물려주었다.
국민소득과 외환보유고 못지않게 중요한 국민경제의 경쟁력 지표가 종합주가지수(코스피)와 과학 경쟁력이다.
김영삼 정부 1998년 6월 280 포인트까지 내려갔다.
국민의 정부가 이것을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켰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10월 26일 코스피 지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2,000 포인트를 돌파했다.
2007년 연평균 종합주가지수는 1,897 포인트였다.
해마다 4% 안팎의 안정된 경제성장률을 달성했고, 물가인상률은 2~3%로 잘 관리했다.
혁신과 남북관계 개선으로 2%는 더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5%의 잠재성장률 속에는 혁신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고, 남북 경협이 온갖 방해로 인해서 맘대로 되지 않앗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배럴당 28 달러였던 유가가 다음 해에 50달러로 올라갔고,
결국 70달러선을 돌파한 후 내려오지 않았던 것도 부담이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했으며 기초체력과 기술 수준이 한결 탄탄해졌다.
과학기술 경쟁력도 10년 동안 빠르게 성장해 세계 6위권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에서는 나를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했다.
그런데그 말을 한 분(손학규)이 당을 옮겨 이쪽으로 넘어왔다.
"경제는 심리"라고들 한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언론은 밤낮 없이 경제가 망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맘에 안들어서 부정적으로 기사를 쓰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경제를 일부러 깎아내려서야 되겠냐 싶어서 하소연을 했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
***
에필로그
(전략)
서울역 분향소에서 내 귀에 대고 나고 강한 목소리로 속삭인 시민들이 있었다.
"복수합시다!" "복수해 주세요!" "꼭 복수할 겁니다!"
그들에게 정말 복수해야하는 것일까?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 질문에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복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또는 하고 싶어도 복수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들과 화해해야 하는가?
그가 정치 생명을 걸고 추구했던 '국민통합'이 그런 사람들까지 껴안는 것일까?
화해하기로 마음 먹으면 화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 대답할 수 없다.
(후략)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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