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 08:14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이 책에서는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간디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간디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제시한다거나 전기적인 사실을 좆아가는 것을 이 글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정치학에서 간디를 테마로 다루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입니다. ‘간디의 다양한 수단을 정치학적으로 어떻게 위치를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미개척 영역입니다. 간디를 정치가로 파악하려고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구석이 있고, 또 종교인으로서 그를 포착하려고 하면 이 역시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간디는 간디다” 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면면이 그에게는 있습니다.
나카지마 다케시 著
대학 세미나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습니다. 간디에 대해서 몇 차례 얘기한 결과, 많은 학생들이 “간디는 정말 훌륭한
인물이야” 하면서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자 그러면 일본에서 국민투표로 총리를 선출한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은
간디를 뽑을 건가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학생들의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관념적으로는
간디를 이해할 수 있고 훌륭하다고 인정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문제로 고민해본다면, “글쎄요, 그건 좀…” 하면서
서둘러 입을 닫아버립니다.
1
간디는 비폭력이면서 동시에 인도의 독립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간디는 인도를 주권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망
을 강렬하게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틀림없는 폭력장치입니다. 주권국가 체제에서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
으로 점유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그렇다면 ‘인도를 국가로서 독립시키는 것은 비폭력의 부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떠오릅니다.
간디는 기본적으로 군대의 소유를 부정했지만 경찰조직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벌(罰)에 대한 두려움이 범죄를
예방하는데 유익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즉 벌을 내리는 국가의 폭력을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용인하고 있습니
다. 간디는 모든 구체적인 폭력을 부정했던 비폭력 원리주의자가 아닙니다.
간디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중과 매스미디어의 열광으로 인해 크게 좌우되어
참된 정의가 실현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언변이 좋아서 호언장담을 하거나 파티 등을 끊임없이 해
대면, 사람들은 북치는 사람처럼 그 사람의 북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의회가 그렇습니다.” 간디가 중시했던 것은
촌락적인 직접 민주주의 제도였습니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얼굴을 볼 수 있는 범위 내의 커뮤니티를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규정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합의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인식했습니다. 이는 아나키스
트들이 생각하는 코뮌의 발상에 근접한 구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힌두어로 ‘역사’는 ‘이티하스’라고 부릅니다. 語意는 ‘이렇게 되었다’입니다. 간디는 이 의미에 주목하며, 이는 또 간디
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간디에게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특이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
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는 상황을 암묵적으로 이끌어온 것, 바로 그것이 역사이고 우리의 언어와 사고 양식, 전통 등
일상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은 ‘역사’가 관습을 매개로 옮겨온 빼어난 지혜입니다.
요컨대 ‘사티아그라하’ (*사티아=진리, 아그라하=주장)는 어떤 특수한 인간이 주장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역사’를 통해서 계승되어온 양식과 그것에 바탕을 둔 침묵의 행위 속에 잠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관습에 의해서
부지런히 전승되어온 우리의 일상 감각 속에 ‘사티아’는 잠들어 있습니다. 이 ‘자연스러운 것’을 당연한 것으로 실천하
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부과된 ‘다르마’이고, 그것을 다음 세대로 계승해나가는 것이 ‘사티아그라하’ 의 중요한 포인
트입니다. ‘사티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그라하’가 자연스레 용솟음쳐 오르며 의식화됩니다.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며 진리에 바탕을 둔 정치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사티아그라하의 중요 포인트였습니다.
3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란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사물, 사상(事象)을 보는 눈은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의 동일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나라는 현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라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연히 <나>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모두 연결된 것으로 다른 생명에 상처를 내면 내 생명도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
을 죽여서는 안되며, 나에게 상처를 입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간디의 비폭력이나 채식주의는 모두 이러한 생각과
연동된 것입니다.
4
그가 기계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애당초 ‘물레’도 기계이고 모든 기계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
니다. 간디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기계에 대해서 전부 다 비판적이십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기계가
아니라 기계에 대한 광신에 반대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컨대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고 모든 욕망을
기계의 발전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광신'에 대해서, 간디는 날카로운 비판의 창끝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는 조용히 물레 돌리는 작업을 중시했습니다.
5
미나미 : 종교의 세계에도 국제회의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자리에 출석하면 대개는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사이좋게
지내자는 얘기들이 나오거든요. ‘산 정상은 하나요, 오르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말은 매번 듣는 익숙한 얘기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는 공연히 뿔이 나곤 합니다. 이게 간디의 주장에 반하는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종교에 똑
같은 정상이란 없습니다. '제행무상'과 '절대신'이 동일한 정상에 도달할 리가 없지요. 그런 건 다 환상입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다른 길을 전부 다 올라가보았느냐?"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실제로 똑같은 정상에 오르면
좋겠지만, 도중에 길이 구부러지거나 반대쪽 산기슭으로 나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자신의 종교가치를 기준으로 진
리가 하나라거나, 아니면 그냥 사이좋게 지내자는 표현에 불과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타
종교'라는 것은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공허한 논리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간디가 "여하튼 함께 걸어가는 것만큼
은 가능하겠죠"라며 재빠르게 걷기 시작한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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