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2. 20:51ㆍ음악/쟈덜- f
Billie Holiday (born Eleanora Fagan April 7, 1915 – July 17,1959)
빌리는 미국재즈 싱어이자 작곡가다. 그의 한때 연인이었던 Lester Young에 의해 Lady Day라는 예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녀는 재즈와 팝 노래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녀의 노래 스타일은 주로 기악가들에게 영감을 받았으며 가사 단어와 템포를 다루는 방법을 개척했다. 또한 대중들에게 노래에 친밀하게 접근하도록 유행시켰다. 비평가 John Bush는 그녀가 미국 팝보컬 스타일을 바꾸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빌리는 직접 곡들을 작곡 하기도 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재즈 Standard 곡이 되었고 "God Bless the Child," "Don't Explain," 그리고 "Lady Sings" 등이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다.
- Early Life -
Billie Holiday (1915~1959)는 미국 발티모어의 한 초라한 병원에서 1915년 4월7일 흑인 트럼펫 연주자인 Clarence Holiday 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를 낳은 사람은 "Sadie Fagan". 백인의 하녀로 일하던 그녀는 어느날 임신한 것이 발각되어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13세라고 한다. 새디 (Sadie Fagan)는 그후 한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어 환자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빌리를 낳았다. 빌리가 3세때 새디와 클러멘스는 결혼을 하지만 곧 이혼한다. 클러멘스는 트럼펫으로 성공해 보겠다고 열심히 연습을 거듭하던중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해 해외로 파병된다. 새디는 군수공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가난한 생활고를 해결 해 나가고 이윽고 전쟁이 끝나자 군수공장은 문을 닫아버린다. 또 제대해서 돌아온 남편은 어느 악단을 따라 멀리 떠나버려 새디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고심 끝에 그녀는 빌리를 친정에 떠맡기고 뉴욕으로 식모살이를 떠나야 했다.
빌리는 가난하고 비좁은 동물 우리같은 곳에서 갖은 학대와 모진 매질을 받으며 눈물과 한탄에 젖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기에게 이런 삶을 가져다준 부모들에게 특히 무관심하게 그녀를 버리고 얼굴도 모르는 이름뿐인 아버지를 증오해서 아버지의 성을 Holiday를 Halliday로 바꾸어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결국은 다시 바꾸게 된다. (아버지가 생부인지 아닌지의 논란도 있다) 그녀에게 유일한 말동무는 늙은 증조모 뿐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마자 증조모를 목욕시키고 닦아 주곤 했지만 그나마 그녀마저 어느날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한동안 시름에 젖어 살던 그녀는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틈틈이 남의집 아이도 봐주고 잔심부름과 청소도 해주면서 용돈도 벌고 때로는 창녀들의 잔심부름도 해 주었다. 그때 그녀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Louis Armstrong이나 Bessie Smith의 음악은 그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것이었다. 그후로 그녀는 재즈가 흘러나오기만 하면 어디든 달려가서 들었고 간혹 영화관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구경 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쩌다 한번씩 여주인에게서 얻은 헌 옷가지들을 그녀에게 보내주곤 하는데 그 무렵 그녀는 떠돌이 악단을 따라 순회공연을 떠났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서인도제도 여자와 재혼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얼마후 그녀의 어머니는 얼마간의 돈을 벌어 볼티모어로 돌아와 펜셀베이니아 거리에 집 한채를 사서 모녀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훨 까프라는 남자와 재혼도 하는데.. 어느날 빌리는 다크라는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그 당시 빌리 나이10살) 그런데도 경찰은 오히려 그녀가 먼저 남자를 먼저 유혹했다고 누명을 씌워 유치장에 넣어 버린다. 이윽고 법정에 선 그녀는 카톨릭 감화원으로 보내지는 억울한 판결을 받지만 다행히 가족 친구들의 도움으로 2년 후에 가까스로 풀려 나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어린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흑백 인종차별에 진절머리가 난 모녀는 뉴욕으로 이주를 한다.
이곳에서도 빌리는 Wilbert Rich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후 여주인과의 불화로 쫒겨난다. 그녀의 어머니는 "Florence Williams"라는 여자에게 빌리를 맡기는데.. 당시 포주 노릇을 하고있던 그녀는 빌리에게 젊은 백인들을 상대로 창녀 노릇을 하게 한다. 어느날 그녀에게 거절을 당한 흑인 깡패 한명이 앙심을 품고 그녀를 고발 하고 결국 그녀는 Brooklin 수용소에 수감 된다. 그곳에서도 동성연애를 즐기는 한 뚱보 여자의 청을 거절했다가 그녀의 모함으로 4개월간의 복역 선고를 받고 이번에 수감된 Welfare 섬 형무소는 폐병환자와 들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힘들게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된 그녀는 몸을 파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당장 입을것 먹을것이 궁해진 그녀는 또다시 길거리 생활을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간청으로 그만둔다. 얼마후 모녀는 다시 합쳐 셋방살이를 시작하지만 어머니마저 중병에 걸려 앓아 눕는 바람에 집세가 밀린 그들은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빌리는 길거리로 나가 무작정 어느 클럽 지배인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통사정한다.
낯선 소녀의 무작정한 요청을 지배인은 거절하는데 마침 그때 옆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사람이 어린 빌리에게 불쑥 물어본다고 한다. "혹시 노래 부를 줄 아니?" (왜 이런질문을 했을까..?) 어쨋든 방세 걱정이 앞섰던 그녀는 대뜸 얼떨결에 평소 혼자서 흥얼대던 "Travelling All Alone"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의외로 그 노래는 손님들을 감동시키고 덕분에 방세보다 많은 57달러의 현금을 팁으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그녀는 여러 밤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당시 유명한 재즈클럽 Monette's 라는 재즈클럽에서 공연을 하던중 유명한 음악평론가 John Hammond의 눈에 띄어 운명을 바꾸게된다. 그후 해몬드의 소개로 Benny Goodman을 만나 데뷔작업을 하고
이후 피아니스트 Teddy Wilson이 이끄는 그룹과 지속적인 활동을 한다. 또 이들이 함께 작업한 "What A Little Moonlight Can Do", "Miss Brown To You"같은 곡들은 그녀가 주요 재즈가수로 알려지게 하는 결정적 역활을 한다. 1년후 그녀는 자기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고 스윙시대 최고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그룹들과 공연을 하고 해몬드 주선아래 윌손은 점차 커지는 쥬크박스 산업에서 스윙스타일의 Pop을 모방한 음반을 낼 목적으로 Brunswick 레코트 사와 계약을 한다.
빌리는 자기감정에 맞게 노래의 가락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방법은 그야말로 혁신적이었다. 빌리와 윌손은 "Twenty Four Hours A Day"와 "Yankee Doodle Never Went To Town" 팝성향의 곡들을 편곡해 Jazz Classic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30~1940 사이 그녀가 윌손과 녹음한 곡들은 Jazz Vocal 역사에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빌리 할리데이는 "Lady IN Satin"이라는 앨범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그 앨범 타이틀곡인 "I'm a fool to want you"는 국내 광고음악으로쓰여 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는데 그 앨범에서 빌리의 Vibra-tion은 미묘한 매력을준다. 예를들어 마디 끝부분에서 비꼬는 듯이 혀를 끌어올리는 듯한 음색은 무엇을 말하려는것인지. (이게 위에서 말한 혁신적이라고 하는것같다)
그후 그녀는 "Hutcher" 클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노래를 부르고 간혹 대중들로부터 누구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저는 오직 느낌을 가지고 노래할 따름입니다. 느낀것을 솔직하게 노래 부르면 듣는 사람이 무언가를 따라 느껴 주게 되는 것이지요." 라고 ....!!!
또한 그녀는 Apollo 극장에서의 공연 성공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무렵 그녀는 예전 어머님집에서 숙식하기도 했던, 그무렵 같은공연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피아니스트인 베니 굿맨과 교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흑백의 남여가 사귀는것에대한 주변의 눈총으로 사랑의 결실은 맺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의 친밀도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는데 영은 그녀를 Lady Day라 불렀고 빌리는 그를 President라고 답해 주변의 부러움을 산다.
이무렵 그녀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노래로 달랬고 그녀는 "Artie Shaw"의 주선으로 13 명의 백인 악사들과 함께 보스턴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어진 Kentucky, Saint Louis에서의 공연은 성공적 이었지만 그녀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호텔 숙박에서부터 음식점에 이르기까지 흑인들은 백인들과 함께 머물고 식사 할 수 없다는식의 인종차별을 당한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국에 중계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데 그런데 여기서도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천대를 받고 화가난 그녀는 악단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다운타운의 카페 Society에 출연하는데 이곳에서 자주 불렀던 Strange Fruit (기묘한 과실)이라는 흑인 인종차별에 관한 노래를Colunbus 레코드사에서 녹음되어 날개돋힌 듯 팔려 나가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된 그녀는 산페르난드 발레이의 클럽, 켈리포니아의 클럽에서도 공연을 할수 있게 되었다.
이무렵 그녀는 음악계의 거성 "George Orson Welles"를 만나 사귀게되지만 당시 "시민 케인"이라는 영화로 명성이 드높던 오손을 감싸는 무리들이 그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두사람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후 인연을 맺은 돈많은 "Charlie Burnette"라는 사람의 호의 덕분에 주급 175달러의 대우를 받고 무대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부 연주 공연 때는 로만 그랜츠라는 인물과 사귀기도 하고 한때는 업다운 하우스의 경영자인 "Klarke Monroe"의 동생 이자 바람등이인 "Jimmy Monroe"와 매릴랜드 주의 시골로 도피 생활을 떠나기도 하는 등 남자 편력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일로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지만 두사람은 결흔하고 마약 중독자였던 지미는 그녀에게 악영향 만 끼친다. 그녀는 남편 마약비용을 마련하기위해 지인들에게 손을 벌리기도 하고 그결과 그녀 또한 이내 마약의 노예가 되버리고 결국 결혼 생활이 파탄나자 그녀는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다.
뉴욕에서 다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앨러배머 출신인 젊은 트럼펫 악사 "Joe Guy "를 만나 애정을 나누고 그와 동거 하면서 밴드를 조직해 함께 일을 한다. 대형 버스를 하나 구입 해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던 중 그녀의 어머니 "새디"가 운명했다. 더욱이 이 무렵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녀는 남부의 캠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1944년에 취입한 " 경쾌한 나그네"가 인기를 끌게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약 중독 때문에 극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다행히 "토니 클리처"의 도움으로 맨허턴에 있는 한 요양소에 들어가 아무도 몰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비밀을 지켜 주겠다던 병원측이 위약해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당국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그후 운이 좋게도 1946년에 영화 "뉴올린즈"라는 영화에 출연 할 수 있었지만 마약 복용 및 은닉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년간 징역살이에 처해져 웨스트 버지니어의 올더슨에 있는 연방 여성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치료는 커녕 허울뿐인 병실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수감되어 있는동안 때때로 농장에 나가 채소를 가꾸거나 돼지 우리를 치우는 등 노동일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부엌대기의 조수 노룻을 하기도 했으며, 어떤때는 일사병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운좋게도 마음씨 예쁜 여자 간수장은 매주 동료 수감자들의 편지를 세통정도 뽑아 가족들에게 전달 해 주기도 하고 출옥과 동시에 그녀가 연예계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만기가 되어 출옥한 그녀는 조 글래더도움으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는데 출옥한지 10일 후에 그녀는 카네기 흘 무대에 섰고 대호평을 받았다. 그러자 당시 예보니 클럽을 경영하고 있던 "존 레비이"가 어떤 이유인지 그녀에게 접근,무대와 값비싼 의상,구두,보석,호텔방,저택등을 제공하면서 청흔을 한다. 그녀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결혼 하지만 그후에도 각지의 극장으로 순회 공연을 떠났으며 거의 중노동을 하다시피 열성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레이비는 수입금 전액을 중간에서 혼자 가로채 버리고 게다가 빌리는 레이비가 짜놓은 각본에 맞춰 마약위반죄로 고발되었다. 다행히 누명이 벗겨져 풀려나지만 그녀는 레이비와 이혼수속을 밟은 즉시 "루이 매캐이"라는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런 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지를 돌며 꿈에도 그리던 유럽 순회공연을 떠나고 가는 곳곳마다 대호평을 받지만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또 한차례 수난을 당한다. 이번에는 불법총기 소지죄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남편과 더불어 행복하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는 빌리. 1959년 5월31일 갑작스런 심장질병으로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병원으로 수송된다. 거기에는 이미 경찰들이 배치 되있었고 죽어가는 빌리는 병실앞에서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된다. 할러데이는 7월17일 간경변으로 죽을때까지 경찰관의 보호아래 있었다고 ...
그녀의 나이 45세. New York , Bronxs, Saint Raymond's 묘지에 묻혔다. - wiki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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