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 김수영 /

2011. 11. 9. 12:28詩.

 

 

 

 

시계
-열애일기 1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너는 발 빠른 분침으로
나는 발 느린 시침으로
한 시간마다 뜨겁게 만나자
순간을 사랑하는 숨결로 영원을 직조해내는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먼지알 같은 들꽃들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우리 그리고
한 천년의 강물이 흘러간 뒤에
열 두점 머리 한가운데서
너와 나 얼싸안고 숨을 멈추어버린
그 시계
다음 생에는 우리 이 세상 한 복판에서 너의
영원을 함게 부둥켜안은 미이라가 되자
박새들의 아프고 슬픈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확언하건대, 모든 사랑의 시는 진실로 사랑하는 대상이 없으면 써지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시도 없는 것이다  - 한승원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金洙暎)-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夜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록,「참 빨랐지 그 양반」外  (0) 2012.01.02
고정희  (0) 2011.12.10
다시, '님의 침묵'  (0) 2011.10.19
모듬시-가을  (0) 2011.10.11
이문구  (0) 2011.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