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2011. 12. 10. 13:01詩.

 

 

시인 고정희는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지내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 사랑, 정의 실천의 정신으로 대학생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그녀는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 
운동가의 강인함과 시인의 열정 및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고정희는 훈련된 지도자의 역량으로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맡아 명실상부한 여성주의적 대안 언론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다.
고정희를 한국문화사, 여성문화사의 한 중요한 모범으로 기리고자 할 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고정희는 한국에서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하고 그 뛰어난 실천적 전범을 보였던 작가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고정희 이전에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역사성' 그리고 '여성과 사회가 맺는 관계방식'을

특별한 문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이론화한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고정희가 없었다면 한국문학사에 페미니즘이라는 중요한 인식의 장은 훨씬 더 늦게 열렸을 것이다.

 시인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초혼제>,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모두 10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고정희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와 정열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그 모든 시에서 생명에의 강한 의지와 사랑이 넘쳐난다.

고정희의 이와 같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탐구정신은 5. 18 광주 항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녀는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와 민중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다져지는 저항의 힘을 힘차게 노래하였던 것이다.

현실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글쓰기의 혁명은 이처럼 고정희에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삶의 지향점이었다. 
이토록 정직하게, 줄기차게, 자유를 향한 이념을 불태우며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고정희의 문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실천은 한국 문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귀감이 될 것이 틀림없다.

 

출처 : http://www.gohjunghee.net/archv/intro.asp

 

 

 

 

 

 

고정희 시모음

 


 

날개
상한 영혼을 위하여
그대 생각
시인
관계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하늘에 쓰네
편지
가을 편지
고백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지울 수 없는 얼굴
꿈꾸는 가을 노래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디아스포라 -슬픔에게
시의 숲에서 세상을 읽다
파도타기
사십대
들국
겨울 사랑
왼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상처
북한강 기슭에서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쓸쓸한 날의 연가
봄비
눈물샘에 관한 몇 가지 고백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베틀 노래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따뜻한 동행
포옹
가을을 보내며
사랑법 첫째
천둥벌거숭이의 노래 1
노여운 사랑
어머니 나의 어머니
전보
묵상
호박
연가 戀歌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산지기를 노래함
남남북녀 사랑노래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대표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출사표,
아름다운 사람 하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아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관계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 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첫 줄에서 끝 줄까지 불편함은 없었을까
아직도 문은 열어두지 않았을까
아예 열쇠 수리공을 부를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폭력이야
새벽에 어울리는 단정한 말들만이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희망인가?
신은 그 희망으로 목걸이를 약속하셨지
눈물로 혼을 씻는 자에게만 주시는 목걸이
아침이슬이 몸에 오싹하도록 걷고 또 걸어
나는 당신 집 앞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문은 굳게 닫겨 있습니다.
삼백여든아홉 번째 부자를 누르지만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장
문틈에 꽂아놓고 하늘을 봅니다.

 

 

 

 

 


편지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 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가을 편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고백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다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따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디아스포라-환상가에게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상처


당신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저 쓸쓸한 황야의 바람을 잠 재울 수 있었을 것 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가슴을 열었더라면

저 산등성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저무는 하늘에 신의 악보를 연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한발짝씩 천국 쪽으로 운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의 기쁨과

편안한 강기슭과 아름다운 섬의 일박이일이 또 다시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합니다.

우리들이 함께 춤추던 밤의 힘찬 포옹과 무심한 새벽 달빛과 무정한 세월 뒤에

속절없이 피고지는 산꽃 들꽃이 또다시 온몸을 들썩거리게 합니다.

아아 자나깨나 내 머리맡에 너무 큰 하늘이 내려와 있어 밤마다 서슬을 세운 별들이 명멸하고

적막한 산천 처마 밑에서 노여운 내가 마녀처럼 울고 있습니다.

 

 

 

 

 

 


북한강 기슭에서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의 등을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등을 기대지 못하고 돌아
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도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 하나
를 사이에 두고 미류나무잎새처럼 안타까이 손 흔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도 북한강이 흐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에 안식이 깃드는 황혼녘이면 두 눈에 흐르는 강물들 모여 구만리 아득한 뱃길을 트고
깊으나 깊은 수심을 만들어 그리운 이름들 별빛으로 흔들리게 하고 끝끝내 못한 이야기들 자
욱한 물안개로 피워올리는북한강 기슭에서, 사랑하는 이여, 내 생에 적셔 줄 가장 큰 강물
또한 당신 두 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요하여라
너를 내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 바다 오동도 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아름다운 사람 하나 / 들꽃세상

 

 

 

 

 

쓸쓸한 날의 연가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시집 ; 아름다운 사람 하나 / 푸른숲

 

 

 

 

 

봄비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행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습니다.



1990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가을을 보내며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한 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에 그리움을 붓자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시집 ; 아름다운 사란 하나 / 푸른숲 

 

 

 

 

 

 


노여운 사랑


가을바람과 옷깃을 스친 뒤 세상이 지루하여 낮술을
마셨습니다 쨍그렁 소리가 나는 빈 술잔에 칸나꽃대 같은
노여움을 따라 부으며 꿈에 본 수미산도 잠기게 하고 날개
달린 낮달도 띄워 당신 생각 단풍으로 아롱지도록 술잔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 편지11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은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갈 것입니다

지리산의 봄 / 문학과지성사 1987.10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된 슬픔도 다져넣고
참나무숯불에 괄게괄게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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