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 21:12ㆍ詩.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
재밌지요?
어느 카페에 게시된 걸 읽었는데, 되게 재밌습디다.
시인 이름이 눈에 '탁' 익는 게
(이런 야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 몇 명 안되죠),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에 '밤꽃 진 자리…'라는 시('門')를 쓴 그 시인입디다.
제가 그 시를 두어번 우려먹은 적이 있어서
바로 기억했습니다.
위트도 대단하고
속도감 있게 말 엮어가는 재주가 비상한데,
지금 시라고 하니까 시인 것이지,
블로그 포스팅으로도 훌륭하잖습니까?
이런 분이 댓글 쓰면 무지 재밌겠어요.
. ^___^ .
작명의 즐거움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봄 가뭄에 보리누룽지처럼 졸아붙은 올챙이 눈
그 작고 깊은 끈적임을 천 배쯤 키워놓으면
그게 바로 콘돔이거니, 달리 요약 함축할 길 없어
개펄 진창에 허벅지까지 빠지던 먹먹함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2008년 제3회 윤동주상 수상 작품집)
*
*
어떻게 이런 시에다 윤동주 문학상을 줄 생각을 다 했을까?
.
門
이정록
밤꽃이 진 자리.
그곳이 밤송이의 배꼽이다.
그리고 그 배꼽이, 그 사거리가,
밤톨에겐 門이다.
세상 쪽 환한 가시를 등지고
어둔 內部의 방구들에 붙어 살던 밤톨이
쿵, 문밖으로 떨어진다.
녀석의 배꼽에 밤색 털이 솟아 있다.
그 터럭 속에서, 환하게
쥐밤나무의 문이 열린다.
내 詩는, 그 문을 들락거리는 性器다.
쥐좆이다.
발기의 끝자리에 밤꽃 향기 무성하리라.
*
*
이양반, 고등학교 선생님입디다. 가르치는 학생들도 당연히 이 시를 알겠지요?
우리 고등학교때도 국어선생이 시인이셨는데.... 전국구 시인은 아니고....
입학하자마자 시집 한 권씩을 강제로 사라고 합디다.
기대를 크게 했는데 수업하는 걸 보니, 그것도 시 부문을.... 에이그~~~~~~!!!!!!.
시인 별 거 아니구나, 를 그때 알았습니다.
풋사과의 주름살
이정록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편지
이정록
폭풍우가 나만 비껴가겠나?
대나무 흰 뿌리가 다 파헤쳐졌네.
우후죽순의 시절 다 지나갔네만
모진 목숨 어쩌겠나? 짧은 마디 비틀어
하늘 쪽으로 춤사윌 펼치고 있네.
이파리로 시작해서 이파리로 끝나는
가운데가 뿌리인 생, 말편자 같은
척추마디를 달려가고 있네만
관통이나 직통은 멀기만 하네.
벼랑에 매달려있기 때문도
마디가 많기 때문도 아니네.
어디로 뻗어 나가도 결국
몸 안에다 마디만 늘이는 일,
빈손이 허전하면 톱이라도 들고 옴세.
대나무 숯불구이 어떻겠나?
대는 대를 떠나야만
관통이든 파죽이든 끝장을 볼 것
아니겠나? 모진 것끼리
피식피식, 대 꽃 한번 피워 봄세.
홍어
이정록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
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 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이십팔 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
얼음막걸리를 젓는다
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
우리 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금강 빗자루
이정록
박한 원고료 모아 아내에게 디지털카메라를 선물했건만,
가슴 쿵쾅거리는 금강산 나들이 전날까지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계 다루는 건 젬병이라 짐만 될 뿐이라고,
게다가 잃어버리기 대장 아니냐고 핀잔만 준다.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가슴에 산하를 담아야지 디지털이 뭐냐고 삐죽거리다가,
제 입방아가 지나쳤다 싶었는지 자정 지나 슬그머니 카메라를 꺼내온다.
이건 절대 건드리지 마라, 이건만 누르면 된다,
출국심사만큼 까다롭다.
아, 눈부시고 가슴 저린 금강산!
그런데 눈짓 몇 번 보내지 않았건만, 삼 일은 맘 놓고 쓴다던 충전지가 방전돼버렸다.
가방 깊숙이 카메라를 집어넣고,
아내 말처럼 모름지기 시인이 되어 맘속에다 선녀도 들앉히고 만물상도 차렸다.
사진만 빼놓고는 보람찬 동국여지승람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내는 카메라의 안부부터 챙겼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사진은 없고 온통 개펄 비질 뿐이다.
아내가 갑자기 구룡폭포처럼 웃음 쏟아낸다.
상팔담 하팔담 끊일 듯 에돌며 움푹움푹 대소를 놓는다.
여보, 이건 절대 만지자 말랬잖아.
동영상에다 돌려놓고 산을 탔으니 팔자걸음에 들입다 길바닥만 찍어댄 거잖아.
그 순간 갑자기, 북측 판매원 김용숙의 우렁이손톱이 떠오르더니
내가 그녀의 입을 빌려 똑 부러지게 말 건네는 게 아닌가.
그럼 내래, 분단의 사슬을 뚫고 처음으로 금강산 올랐는데 풍경이나 담아올 줄 알았네?
내래 시인 아니네. 금강산을 가장 밀착 취재한 첫째 시인으로 대접해달라우.
그리고 고거이 절대 삭제하면 아니 된대이, 하고는
말의 서랍을 콱 닫아버리니 마음 짱짱해지는 거였다.
흘끔, 그 동영상이란 걸 들여다보니
우람하고도 당찬 한 사내가 입김 내뿜으며
조국산하의 삿되고 녹슨 잡귀를 싹싹 쓸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춥고도 매운 대한, 비로봉의 이마가 이곳 남측으로 눈부시게 솟아올랐겠다.
용숙동무의 우렁이손톱도 잠깐 금강으로 쨍 떠오르는 것이었다.
역전쌀상회
이정록
문패가 셋이나 걸려 있죠.
마지막 문패 속 이름도 이태 전에 떠났어요.
쌀가마닐 지다 삐끗한 허리를 저승까지 데려간 거죠.
할머니 혼자 알전구 밝히고 있죠.
삼십 촉이면 쌀보리며 팔순의 허벅지까지 찔레꽃처럼 눈부시죠.
그런데, 쌀집 앞 은행나무만 소갈이 났나요.
리어카 묶여있는 앉은뱅이 은행나무만 쇠사슬을 흔들며 투덜거리죠.
가만 생각해보면, 그 은행나무 참 기특하죠.
저 혼자 불쑥불쑥 가지를 늘이면 삼십 촉으론 어림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굴속 같이 어두우면 메밀꽃 같은 할머니 잇몸을 어찌 보겠어요.
그리고 참,
그 은행나무가 기지개를 못 켜는 까닭이 또 있죠.
키질 할 때마다 뛰쳐나온 쭉정이들이 은행나무의 발등에다 뿌리를 내린 거예요.
그 어떤 가로수가 제 작은 밥그릇에 들깨를 들이고 보리 이삭을 패게 할 수 있겠어요.
머리 꼭대기에 주렁주렁 강낭콩 비녀를 꼽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시내 일만 이천 은행나무들이 구린내를 쏴대는데
그 눈칫밥 받아먹으며 어떻게 키를 늘일 수 있겠어요.
녹두 대공과 보릿대 예닐곱이 어깨를 겯고 용을 써보지만
골목골목에서 쏟아지는 눈 흘김 어찌 다 막아 낼 수 있겠어요.
손아귀보다 굵어지면 어찌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할아버지의 새벽 천식, 그 기차소리 너머로 손차양을 할 수 있겠어요.
잠깐, 저길 좀 보세요.
펑크 난 리어카가 낑낑거리며 쌀집으로 들어가네요.
햅쌀 세 가마니가 평당 몇 천만 원의 깔판 위에 몸 부리네요.
쌀가마니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
저 거친 손바닥 아래에다 세상 잔머리들 다 들이밀면 좋겠어요.
강낭콩이며 작두콩, 친친 감긴 식구들과 함께 한 번 들르시죠.
찔레꽃처럼 환하게 저기 저 쌀집에서부터 다시 첫걸음을 내딛자고요.
엄니의 男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新派延命調)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괜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아녀, 이게 다 붙인 거여.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미친 놈, 남정네는 무슨?”바지락 껍데기처럼 볼 붉어진다.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짓자리는 어림도 웂어야.”
일제히 신파연명조로 풀벌레 운다.
눈을 비빈다는 것
이정록
첫나들이 나온
아기 참새들이 종알대고 있어요
저 혼자 날아가지도
흩어지지도 말라고
어미가 다짐받고 있네요
한참 만에 어미 참새가
벌레 한 마릴 물고 왔어요
막막한 세상으로 아기들이
다 날아가 버렸는데 말이에요
다섯 마리 가운데 무녀리 한 마리
녀석의 마지막 끼니가
앙다물려 있네요
어미의 벙어리울음을
벌레의 솜털이 다 받아내고 있어요
하늘을 날아온 저 벌레의 집에도
남은 식구들의 목메임이 있겠지요
일파만파, 세상을 조여 오는 그 몸부림이
어미 새의 젖은 눈길과 만나면
회오리가 일겠지요
삼킬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는
슬픈 실타래, 허공에 가득할 테니
눈을 비비는 거겠지요
그댈 만나러 갈 때마다
참새처럼 작아지는 거겠지요
눈꺼풀이 떨리는 거겠지요
갈대
이정록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 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一筆도 없이 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물길
이정록
食口라는 그릇에
찰람거리는 물의 총량은 같다
손자녀석이 턱받이를 걷어내자
舌癌의 할아버지가 침 질질 흘린다
물줄기가 원자력병원까지 번진 것이다
대처로 떠난 자식들 눈물 콧물 다 말라버리자
감나무 아래 머위 잎이 눈물 받는다
홀어머니가 매일 이마를 짚는 감나무
그 손자국의 높이가 낮아진다, 해마다
감나무는 키가 자라고 어머니는 가라앉는다
수저통 속 수저들처럼 물기를 놓지 말아야 한단다
식구들아 活이란 글자를 들여다보아라
혀가 젖어 있어야만 먹을 수 있단다 살아갈 수 있단다
오늘은 새벽 일찍 일어나 고향 쪽으로 큰절 올린다
꿈자리에 아버지의 채찍이 다녀가신 것이다
태반에서 빠져나간 물줄기는 어디로 갔나
전선마다 맺혀있는 물방울들, 뚜두두두
뚜두두두, 전화선을 타고 오는 어머니의 기침소리
이웃집 인삼밭으로 일 나간다, 하신다
인삼이 좋긴 좋은가 보더라 게서 일하고 오면
몸이 가뿐하더라, 하신다 주인 몰래 많이 주워먹었더니
목이 탄다, 하신다 머위 잎이 전화기 밖으로
푸른 손을 내민다 잔뿌리 주워와서 인삼김치 담가놨으니
가져가라, 하신다 정화수가 내 눈자위로 엎질러진다
물줄기가 이 쪽으로 다 쏠렸으니 한동안 가물겠다
콩 이파리들 신작로 아래로 축축 늘어지겠다
인삼김치는 오래되면 깔깔하다, 하신다
잔대처럼 마르다가 팍 물러져서
아예 못 먹게 된다, 하신다
듣고 있냐 내 말 듣고 있냐 예가 왜
말이 없댜, 전화가 끊긴다
개나리꽃
이정록
개나리 활대로 아쟁을 켠다
아쟁은 아버지 같다,
맨 앞에 앉아 노를 젓지만
물결소리는 가라앉고 거품만 부푼다
황달에서 흑달로 넘어간 아버지
백약이 무효인 개나리 울 아버지
해묵은 참외꼭지를 빻아서 콧구멍에 쏟아 붓고는
숨넘어가도록 재채기를 한다,
절대 안 되여
사약이여 사약,
한약방에서 절레절레 고갤 흔든
극약처방이 노란 콧물을 뿜어 올린다
오십 년 묵은 아버지 콧구멍,
개나리꽃사태다
이렇게 살어 뭐혀,
두두두 무너지는 북소리
몸 뒤집은 아쟁이 마룻장을 두드린다
이제는, 배도 노도 갈앉은 지 십수 년
속 빈 개나리 활대로 아쟁을 켠다
개나리나무는 내공 깊은 속울음이 있다
마디도 없는 게 악공이 되는 까닭이다
개나리 꽃그늘에 앉으면 자꾸만 터지는 재채기
아쟁소리 위로 노란 기러기발 끝없이 날아오른다
다시 황달로 돌아온 아버지처럼,
봄은
극약처방 없이는 꼼짝도 않는다
하늘 접시
이정록
시골 어머니를 위해 누님은 에어컨과 스카이를 달아드리고
아우는 텔레비전과 청소기를 사드렸는데,
맏아들인 나는 병아리눈곱만큼 나오는 전기세와 벙어리 전화세 내드리는 게 전부다
그런데 누님은 누님이시다
누님이 달아드린 그 위성 케이블이
치매 걸린 광줄댁, 풍 맞은 대밭머리 아주머니, 수다와 버캐가 전문인 박달자 할머니까지,
동네과부들을 어머니 방에 다 모이게 하는 것이다.
모두 모여 벌건 대낮에 훌러덩 식식거리는 영화를 꼴깍꼴깍 보고 계시다.
이 집 텔레비는 원제 저리 다 벗겨 놨댜?
어이쿠, 어이쿠, 저 양코배기들 방아 찧는 것 좀 봐.
풍 맞은 몸으로 흉내 내려니 반쪽만 에로배우다.
굳은 한 쪽 팔다리는, 주책 좀 그만 떨라니까!
젊어 떠난 서방이 엉거주춤 옷섶 추슬러주는 듯하다.
풍 맞고야 앞서 간 남편과 몸을 섞다니,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함박꽃 틀니들, 공옥진 초청공연이 따로 없다.
웃음바다에 둥둥둥 떠가는 치매의 복사꽃잎들,
떠돌이 약장수에게 약 들여 놓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 나는 노파 전용 영화관의 맏아들이 된 것이다.
돌아가시기도 전에 벌써 스카이 라이프이라니!
짠하기도 하지만, 누님은 역시 누님이시다.
녹슨 처마 끝 천국의 접시여.
하느님도 세상 재미가 쏠쏠하신가?
새털구름 불콰한 하늘 접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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