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0. 08:44ㆍ詩.
여기쯤에서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해도
말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폭설(暴雪)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어머니
어머니,
요즘 술을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잘못했읍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겠습니다
어머니!
요즘의 연구과제
요즘 나의 연구과제는 오탁번이다
오탁번의 역사인식과정에 대한 고찰
오탁번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물론 지금 다른 글을 쓰는
낯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풀도 아니다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작은 곤충으로 아주 희귀하게 발견된다
천둥산 박달재 오리나무 가지 끝이나
치악산 산매미 울음소리 사이에서
실잠자리 겹눈에나 잠깐 뜨인다
너무 희귀해서 곤충도감에 수록된 적이 없다
채집할 가치가 없으므로 곤충학자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눈깔과 뿔과 주둥이의 모양이
잠자리 같고 하늘소 같고 쇠똥구리 같다
다리가 땅을 파고 뛰기를 하는 데 알맞은 건
딱정벌레와 비슷하지만
갑옷과 고운 날개가 없는 걸 보면
동물 중에서 가장 종류가 많은 딱정벌레는 아니다
성충이 되어서도 유충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고
어둠이 풀섶에 내리면
화학적인 에너지를 완전히 빛으로 바꾸어
같은 종의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내는
개똥벌레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불빛이 너무나 작아서
어느 여자도 어떤 학자도 눈치채지 못한다
쇠똥을 떼어내어 둥글게 다진 다음
식량으로 갈무리하면서
그 속에 알을 낳고 싶어한다
아 오탁번은
아직 채집되지 않은
너무나 작고 눈에 안띄는 벌레다
쇠똥 속에 집을 짓고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눈빛
개똥 같고 쇠똥 같은 불빛을 발산한다
내가 오탁번의 성충으로 직접 변태하기 전에는
그놈의 역사인식과정을
명쾌히 밝힐 실험도구가
나에겐
아직 없다
엘레지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빙어에게
간이주점 때묻은 식탁
큰 유리대접 안에서 헤엄치는
빙어
오늘 아침까지도 의림지 깊은 물 속에서
산란의 꿈을 꾸던
빙어
한 마리에 3백원씩 주고
열 마리를 산 채로 먹다
젓가락으로 대가리를 꼭 집어서
고추장에 찍어 입 안에 넣다
빙어
미안해 잘가 안녕
의림지 깊은 추억 속에서
너는 신라 때부터의 내력으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몸으로
몇 백년의 세월을 이어왔지만
지금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흐리다
꽃샘바람
더 춥게 불다
1년살이 꿈이
헤엄칠 때마다
빙어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땅거미 진 고개를 올라서며
내가 나를 죽인다
염치도 없는
대가리를
매운 고추장에 처박는다
빙어 사랑해
안녕
죽음에 관하여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걸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좋게 났던가
이따위 추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딱 부러졌다
손에 쥐가 났다
카마수트라의 힌두 사내
벌거벗은 녀석 제 물건 곧추 세우고
침상 위에 점잖게 누워 있다
머리맡에는 알몸의 하녀가
녀석의 머리를 젖가슴으로 받치고 있다
또 다른 하녀가 발치에 서서
시렁 위로 연결된 줄을 당기면
잘 생긴 나체의 부인이 망태를 타고
도르래처럼 시렁 위로 올라간다
메주덩이 매달린 시렁 밑에서
막내아들 만들던 아버지 생각난다
하녀가 도르래 줄을 풀면
서방을 하늘처럼 섬기는 부인이
호박보다 더 큰 젖가슴을 하고
터번 쓴 사내의 물건 위로 정확히 낙하한다
막내를 낳고는 젖이 말라 붙은 채
디딜방아에 겉보리 찧던 어머니 생각난다
메기수염을 한 힌두의 사내는
인도대륙의 잘 생긴 여인을
망태에 죄다 담고나 싶은 지
메기웃음 지으며 물건을 뽐낸다
*카마수트라 -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고대 인도의 性愛에 관한 경전
시안, 2000년 겨울호
우화羽化의 꿈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
영 대쪽같지 않고
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
나의 삶이 끝나면
블랙홀 근처
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
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
맴맴맴
우주가 떠나가도록
울어는 보고 싶다
시집, 벙어리장갑, 문학사상사
쥐에 관한 명상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 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 오면
내 꿈길까지 따라오며 보채던 쥐들은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 놓고 숨어 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하관(下館)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저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튓마루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선운사에서
1
선운사 입구
민박집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먹는
토실토실한 암탉도
나팔꽃 우산 쓰고 선운사 찾아가는
어린 여학생들의 맨종아리도
다 선운사 기운을 빼다 박았다
암탉이 갓 낳은 피묻은 달걀이나
송곳니로 톡톡 구멍 내어
쭉 빨아 먹어봤으면
솜털 보송보송한 뺨이나
그냥 한 번 만져봤으면
2
동백꽃은 다 떨어져
서녘 바다로 흘러가고
빽빽한 동백숲이
엿 먹어라 엿 먹어라
헛손뼉을 친다
금동불상 앞에 합장은 하지 않고
해우소에 들러
근심걱정 모두 버린다
똥오줌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선운사에서
내 몸도 모두 버린다
나는 이제 몸이 없다
간절한 생각뿐이다
여류신인의 일기장에서
1
그 순간 제철소의 용광로가 보였다 대장간이 보였어 풀무 속에서 이글거리는 시우쇠처럼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내 몸으로 파고들어왔어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소리치면서 나는 그 순간 죽고 싶었어 아니 아니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웠어 시뻘건 쇠막대기 이글거리며 내 영혼으로 파고들어올 때 나는 내 몸뚱이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
2
갈대밭이 바람에 마구 쓰러지고 있었어 멀리 멀리 바다소리 내 귓가에서 출렁거렸어 솨솨솨 갈대잎 흔들리는 소리가 내 몸에서 터져나왔어 소금기 비릿한 파도소리에 나는 죽고 싶었어 아니 아니 그 순간 오래 오래 살고 싶었어 내가 자살하면 내 몸뚱이가 소멸된다는 게 너무 슬펐어 하지만 자살 말고 순간을 영원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우표 한 장의 행복
오늘 나는 170원을 공짜로 벌었다
회신용 우표를 동봉하여 배달되는
그렇고 그런 우편물이 가끔 있는데
회신 안해도 되는 것들이 많다
인물백과사전을 내는 출판사나
데이터뱅크를 차려놓고
시인 작가와 대학교수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신문사나
여론조사를 하는 단체에서
회신용 봉투에 우표를 붙여서 보내지만
나는 우표만 뜯어내어
요긴할 때 써먹는다
더듬이가 예쁜 물방개 우표는 100원
늦털매미 우표는 150원
하늘거리는 수선화는 130원
오늘은
조선백자 그림이 예쁜
170원자리 우표를 공짜로 얻었다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내 마음 모두 전해줄 우표를
침 발라가며 잘 뜯어내어
지갑 속에 넣었다
나는 아주 기분이 좋다
퇴근길에
생맥주 500cc 마셔야겠다
타지마할
이맘때쯤 다시 만나기로 하자
이제 여기서 헤어지고 나면
가을 깊어가고 겨울이 오고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야무나강이든 갠지스강이든
저 멀리 남한강이든
그 강물 흘러가는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손톱 밑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의 햇살따라
벵골만 건너 캘커타 지나
아그라 붉은 태양 아래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타지마할
죽은 다음에도 되살아나는
왕과 왕비의 살냄새 거웃냄새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타지마할의 눈부신 대리석 위에
보름달이 솟을 때
여기쯤에서 만나기로 하자
사랑에는 꼭 이별이 있는 법
저승의 푸른 하늘 아래
대리석이나 오동나무 관이 아니면
관솔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관 속에
금은보화 비단옷이 아니면
무명옷이나 삼베옷 두르고
그도저도 아니면
청바지 차림으로라도
또 몇 백년
강물이 흐른 뒤
우리들 사랑이 타지마할에서
이맘때쯤 다시 꼭 만나기로 하자
꽃모종을 하면서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뻐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고욤나무
갑사 들어가는 아름드리 숲길에서 문득 만난
키만 싱겁게 큰 비쩍 마른 고욤나무 한 그루
잎사귀도 고욤도 없이 빈 손 하늘까지 펴고
계룡산 깊은 울음소리 염주알처럼 헤아린다
봄 여름 다 보내고 단풍잎 어지러운 하늘에
꿈속에서도 그리운 뺨 눈물 머금은 저녁노을
고욤나무의 적막한 꿈이 가지 끝에 이울고
부처님의 금빛 손가락 목탁소리에 무심하다
어휘에 관한 명상
아무리 외워도 늘 소용없다
가로 세로 언제나 헷갈려서
라디오를 켤 때 안테나가
가로로 올라가는지 세로로 올라가는지
밀물 때 조개를 캐는지 썰물 때 캐는지
제부도 바닷길이
물보라 속으로 잠길 때가
밀물 때인지 썰물 때인지
정말 모르겠다
pull에서 밀고 push에서 당기고
르네쌍스 호텔 커피숍에 약속이 있는 날
무거운 문 밀고 들어가다가
그만 또 헷갈린다
pull이라고 써 있는데도
문을 힘주어 밀다가 서양인한테 들키면
국위손상이 되고 벌금도 내는 것 아닐까?
내가 바보일까?
중학교 때 가끔씩 1등도 했었는데?
첫사랑 여자의 왼쪽 눈썹 위에
주근깨가 다섯 개 있던 것도 기억하지만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도무지 뜻을 알 수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는
위에서 아래로 놓인 상태라야 되는지
옆으로 된 방향이라야 되는지
당겨야 할지 밀어야 할지
밀물처럼 하는지 썰물처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가로? 세로? 밀물? 썰물? Pull? Push?
이 간단한 어휘들이 내 앞에 와서는
왜 해체되어 무의미가 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엄마
엄마는 아빠하고 안방에서 자고
나는 동생과 내 방에 잔다.
동생이 자다 깨어 칭얼거려서
엄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엄마 아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우는 동생 내가 달래 재운다.
아침이면 아빠가 싱글벙글 웃는다.
-엄마가 동생공장공장장인 걸 몰라?
<오탁번 시집 벙어리장갑에서>
겨울강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 연기 마주 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 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얼음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닷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뜰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백두산 천지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치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꿏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두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哺乳圖
밭 가는 어미소 따라
강동강동 뛰는 송아지를
ㅡ네미! 네미!
할머니가 부르며
등에 업은 아기를 추스른다
밭에서 일하던 며느리는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에미! 에미!
저 부르는 말인 줄 알고
밭두둑으로 냉큼 올라온다
-음마! 음마!
아기가 방싯방싯 웃는다
-저라! 저라!
-어뎌! 어뎌!
소 모는 힘찬 소리에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내딛는
어미소 따라가며
-음매!음매!
송아지가 젖 보채며 운다
배냇머리같이 보드라운
금빛 털이 함함하게 빛난다
-음마! 음마!
에미 젖 먹는 아기를 보며
할머니가
어미소 모는 애비에게 말한다
-송아지도 젖 보채누나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은 듯
-음매!음매!
어미소가 송아지를
송아지가 어미소를
서로서로 부른다
젖 먹던 아기가 옹알이하며
쇠젖 먹는 송아지를
도렷도렷 쳐다본다
<2007 창작과비평 봄호>
絶世美人
-2006년 3월 21일 오후3시
조선시대 다식판 하나 사려고
양성동 골동품 가게에 들렀는데
늙은 주인은 어디 가고
갓 스물 된 아가씨가 손님을 맞는다
볼우물이 고운 복숭아빛 뺨과
몽실몽실한 가슴을 보며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희고 미끈한 종아리는
왜무처럼 한 입 베어먹고 싶었다
다식판은 보는 둥 마는 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4시 반
천등산 손두부집에 들렀는데
삼원색 요란한 월남치마에
발목 다 보이는 나일론 양말 신은
젊은 아낙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한다
브래지어 한쪽 컵이 망가졌는지
짝짝이 가슴이 봉긋봉곳한
주근깨도 예쁜 아낙의 얼굴을 보며
식사 주문도 잊은 채
정신이 휑하니 아득해졌다
-2006년 3월 21일 오후 6시 반
늙은 느티나무가 새잎을 피우고
저녁놀이 서녘 하늘 물들일 때
내내 방망이질한 가슴 진정시키려고
솔잎술 한잔 마시며
옛 사진첩을 그냥 뒤적거렸다
내가 서른여섯살 되던 가을
서른한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질렀다
골동품 가게 아가씨보다도
손두부집 젊은 아낙보다도
몇곱절 예쁜 젊은날의 아내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지갑 속에
아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며
아침저녁 새새틈틈 보고 또 본다
어느날 다따가
絶世美人이 된 줄도 모르는
아내는
달팽이관이 고장나서
메슥메슥 입덧하듯 토하고 있다
아아 아득히 흘러간 젊은 시절
아내가 아기 배고 입덧할 때
귤 하나 사다줄 생각 못했던 나를
호되게 벌주고 있다
-2007년 1월 12일 오전 9시
새해 들어 입덧 더 심해진
絶世美人의 손을 꼭 잡고
영하 12도 눈보라 치는 날
춘천 성심병원 이비인후과로 간다
<2007 창작과비평 봄호>
방아타령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TV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태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뺨 부볐다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뭐여?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시와반시, 2003 가을호
산밭에서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매일 이 지경으로 일을 하면
밑구녁도 아예 비뚤어지겠다
건너 산에선 뻐꾸기가 울다 졸다 하였다
밭두럭에선 암소가 제 새끼의 사타구니를
뜨거운 혀로 자꾸자꾸 빨았다
가파른 산밭을 매면서 아낙네들은 말했다
서방이 제 구멍을 못 찾으면 낭패다
밤눈 밝기는 그중 밝으니 괜한 말이다
옥수수 자루가 수염을 날리며 웃었다
돌멩이와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치는
호미 소리에 뻐꾸기도 암소도 웃었다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
똥볼
축구시합하러 운동장으로 나갈 때
내가 코딱지를 파 먹으면서
개미 똥구녁 맛 같다고 하니까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여자 부반장 복실이가
멥쌀눈을 흘겼다
나는 동해물팀 공격수
등번호 9를 달고 냅다 달렸다
찬스를 잡아 슛을 했는데
아뿔사! 똥볼이 됐다
복실이가 메롱메롱 놀렸다
날아가던 황새가
똥볼에 놀라 물똥을 찍 쌌다
동해물! 장백산!
배고픈 아이들이
악머구리떼처럼 소리쳤다
오늘 축구시합은
복실이 때문에
재수 옴 붙었다
동해물팀이
3대빵으로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