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21. 23:14ㆍ詩.
1965년 강원 정선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 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1998년 제 1회 <고대문학 신예작가상> 수상 제14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 제19회 소월시문학상 수상현재 서문여고 교사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강가에서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 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 아무르강은 러시아와 중국, 몽골 등 3개국의 국경을 거치는 강
네 영혼의 중앙역 키냐르, 키냐르……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저녁마다 너를 만나던 이 지상의 물고기 자리에서 나는 왜 네 심장에 붙박이별이 되고 싶었는지 네 기억의 붉은 피톨마다 은빛 비늘의 지문을 남기고 싶었는지 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외로운 몸짓으로 네 몸을 거슬러 오를 때도 내 영혼은 왜 또 다른 생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 생이 더 이상 생일 수 없는 곳에서, 생이 그토록 생이고만 싶어하는 곳에서 부르지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은밀해서 생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확실한 생이 겨자씨처럼 작은 숨결을 내뿜으며 덜컹거리는 심장의 비밀을 데리고 저녁처럼, 문지방처럼, 음악처럼 네 영혼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인용 부분
마두금(馬頭琴) 켜는 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의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정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 마두금 - 몽골의 전통 현악기
가을 저녁寺 나는 걸어서 가을저녁寺에 당도합니다 한 사내가 물거울에 자신의 낯을 비추어보며 추억을 빨래하고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잉걸불처럼 타들어가는 개심사 배롱낭구 꽃잎에는 어느 먼 옛날 백제 처녀의 마음도 하나 들어 있을 테지요 저녁 예불을 드리던 개심사 범종 소리는 서른두 번째에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마지막 종소리는 가을 저녁寺로 불어오는 바람에게나 내어주고요 가을 저녁寺에 호롱불이 돋는 地上의 유일한 저녁입니다 한 사내가 연못거울에 어두워지는 낯을 비추어보며 끝내 자신이 걸어가 당도할 집을 생각하는 참 고요하고 투명한 가을 저녁입니다 나는 걸어서 가을 저녁寺를 내려옵니다
추억도 없는 길 하늘은 신문의 사설처럼 어두워져 갔다주점의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고구름은 저녁의 문턱에서 노을빛으로 취해갔다바람은 한 떼의 행인들을 몰아 욕정의문틈으로 쑤셔 넣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무수한 욕망으로의 이동이라고 그날 저녁의이상한 공기가 나의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그러나 이상도 하지 술을 마시고 청춘을 탕진해도온통 갈망으로 빛나는 가슴의 비밀,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며세월의 화석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막무가내로 나의 기억을 흔든다검은 표지의 책, 나는 세월을 너무 오래들고 다녔다 여행자의 가방은 이제 너무 낡아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흠칫 놀라곤 하지만세월에 점령당한 나의 기억을 찾으러둥그런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며 저녁의 나는이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지상의 간판들은 화려하고도 허황하구나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추억도 없는 길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다호
아무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염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 위의집들 빠르게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나는 아무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참새구이들이 투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추억이 페달이었네 폐허와폐허와 폐허와 또 다른 폐허속에서 푸푸푸른 현기증이 나도, 페달을 밟으면서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아이디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세월이 갔네 아무데서나사랑을 했네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 기형도의 시 [빈집]의 인용 부분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에는 불량품이 많다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고요히 촛불을 밝히는 시간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서 촛불을 켜 들고, 그래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하얀 돛배 창밖엔 눈이 내렸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 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또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 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 눈은 진눈깨비가 되어 퍼붓다가, 멎고, 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 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삶의 공터 위로.....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새들은 목포에 가서 죽다 그곳에 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다 바람에 부서지는 섬들과 모래톱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물방울들, 그곳에 꼭 네가 있을 것만 같다 어젯밤에는 바람 속으로 망명하는 꿈을 꾸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잎들이 밤새도록 내려 서럽도록 그리운 너의 안부를 덮어주었다
불멸이 아니어서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리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 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 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찾아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꽃을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들 찾아 나섰다그런데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 낯설었는데,어쨌든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내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물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랫동안 불멸을 꿈꾸었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때 어떻게해야 하는지 나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사랑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숨쉬고 존재하며,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그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그대를 찾아 나섰다가 나는 불멸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불멸이 몹시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불멸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불멸이 아니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불멸에 닿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같은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그녀에게 고통이 습관처럼 밀려올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바다가 보일 거야 석양빛에 물든 검은 갈색의 바다, 출렁이는 저 물의 大地
누군가 말을 타고 아주 멀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일거야 그럴 때, 먼지처럼 자욱이 일어나던 生은 다시 장엄한 음악처럼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지
북소리, 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어봐 고독이 왜 그렇게 장엄하게 울릴 수 있는지 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
너를 뛰쳐나갔던 마음들이 왜 결국은 다시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오는지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온 것들이 어떻게 서로 차가운 살갗을 비벼대며 또다시 한 줄기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나는지
고통이 습관처럼 너를 찾아올 때 그 고통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 봐 고통과 깊게 입맞춤하며 고독이 널 사랑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너만의 보폭으로 걸어가 봐
석양빛에 물든 저 검은 갈색의 바다까지만 장엄한 음악까지만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깎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다네 가슴속 푸른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 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집시처럼 떠돌다 이제서야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홀로 걸어왔는지 지금 내 앞에 망연히 서있네 서러운 악보처럼 펄럭이고 있네
어느 맑고 추운 날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왜 나에게 와서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슬리퍼를 직직 끌며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이제는 떠나지 못하게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추운 한 시절 견디며킬킬대고 있네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사해졌다고
달맞이꽃
달빛 한 줄기 없는 다락방에서 추억의 꽃씨처럼 누워 어린 시절의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들 누가 눈치채기나 할까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밤의 기둥을 깎아 저 먼 은하수로 통하는 동굴을 파고 있는 생쥐들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해요,저 튼튼하고 긴 앞니의 자유 열 손가락 꼽아본들 나에겐 그런 신기한 재주도 없어 그저 풀썩거리며 먼지만 내다 만 하루 노을을 접어 뒤춤에 구겨넣지요 문을 열고 나가 사랑을 하고 돌아와 문을 닫고 그리워하는 건 흔하디흔한 습관성 발작 달빛 한 줄기 없는 다락방에서 추억의 꽃씨처럼 누워 어린 시절의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들 누가 눈치채기나 할까요
베티와 나 - 영화 '37도 2부'
조금은 어두운 대낮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정지된 풍경들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나네아, 난 어지러워무너진 언덕 너머에는출렁이는 네 어깨와도 같은신열의 바다가 있네어디라도 가려하지 않는바람과 배 한 척 있네베티,내 푸른 현기증과공터의 육체 위에 너의 보라색 입술을 칠해 줘베티 기억하고 있니내 어깨 위에 걸려 있던 너의 다리그 아래로만 흐르던 물결,물결 속의 달바람불어,경사진 사랑의 저 너머에서함께 출렁거리던깊고도 위험했던 나날들기억해?그때 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37도 2부의 숨결들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조금은 어두운 대낮,막판의 희망이게으른 새들처럼 엎드려서 울고 있는
우편함 속에 사랑을
창 밖에는 노을이 밀려오구요 燒酒 한잔 생각만 간절하구요 바람에 섞여 소문들 흘러가네요 나는 앉아서 늙어만 가요 내 눈꺼풀의 창문은 어둡고 쓸쓸해 자전거를 타고 가던 당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요 떠나가는 염소구름도 이제는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금 추억 안에 서서 거리의 나무들과 함께 걸어가네요 거리는 이미, 하늘로 통하는 동굴의 입구 같은 별들이 무수한 길들을 만드는 밤이구요
버찌
허공의 경계선을 지나 운석처럼 버찌들이 떨어진다 저들이 태어나 한 생애를 견디고 끝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한 점 핏방울로 맺히는 망명점. 북반구의 유월
기억나지 않는 生涯
저 너머로, 지가 그 무슨 열혈남아라도 되는 양 핏빛으로 버찌가 떨어진다
이해받지 못한 울음 덩어리의 生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다들 돌아가버린 한적한 오후의 도서관에서내가 생애처럼 긴 담배를 피워물 때어디서 작은 새들이 날아와처음 보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꽃들은낡은 외투에 손을 꿰는 아이들의 손끝마냥불쑥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상값정리되지 않은 외상값에 대한 생각처럼나는, 그 어떤,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집요한 상념에 잠기어 있었는데, 비가 내려내 생각의 한가운데로 비가 내려, 그 무엇이속삭이고 있었다, 하늘 한구석에서누군가 또 낚시질을 하고있군, 글쎄비 내리는 오후는 저녁처럼 어두워져가고 있었는데갑자기 어두운 하늘에 검은 말 한 마리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저 비에 젖은 별들은진흙탕의 세월을 지나온 시간의 말발굽이야, 그 무엇이속삭이고 있었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나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그 나지막한 속삭임에게 들려주었다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장만옥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
- 네 고통의 시선이 다하는 날, 나는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외눈의 태양이여, 그대의 눈이 온전히 감길 때 헛된 꿈도 사라지고 단 한번, 내 짧았던 사랑도 완성되리 그대 드디어 눈을 감는구나 환한 봄날, 햇살은 가루약처럼 쏟아져 風景의 한쪽을 더욱 환하게 하는데 나는 저기 저, 오랜 두통의 마루를 지나 태양의 눈을 감기러 가는 달 만삼천팔백칠십 개의 내가 그대에게로 가면, 가서 그대 깊은 품속에 안기게 되면 그대 드디어, 두 눈동자의 등불을 끄고 고요히 침묵하겠구나 내 생애 마지막 일식에 대하여 그 짧은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적소 ― 창밖엔 하염없이 비가 와, 저게 바로 사랑의 적소야, 빗방울들! ― 3월에는 모든 게 허하다 ― 그대여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며칠째 황사가 자욱하여 동쪽엔 사악한 기운이 승하고 서쪽 또한 지독한 날들이 이어지네, 이젠 내 약시의 두 눈마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 나 잃었네, 이제 내 미력한 사랑으로는 그대에게 닿을 수 없도다, 그대여 기억하는가, 언젠가 우리 복사꽃 휘날리는 벌판에서 하루 종일 함께 술잔을 부딪히며 사랑했었지, 기억나는지 그때, 그대 맑은 눈동자 속에서 나 죽어도 좋았을 것을 ― 4월에는 모든 게 허하다
― 프리데리케 마이뢰커 파스칼 키냐르 호치민 이런 사람들하고 술 마셔 싫지 않으면 전화해줘, 함께 마시게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올 거야 황사가 가고 황약사가 올 거야 취생몽사라는 술을 들고 구양봉에게로 말이야 ― 5월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랑의 적소다
― 여기에는 없는 곳, 산초나무 잎사귀가 음악처럼 피어나는 곳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어라, 그대와 내가 만나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허공에 한 채의 소슬한 부석사를 지어 올릴 수 있는 곳, 꿈에도 그리워지는 꿈이 있어 눈 뜨면 다시 잠들고 싶어지는 생(生)의 이 황막한 저녁에 누이처럼 맑은 그대는 어느 산녘에 산초나무 잎사귀처럼 조그맣게 피어 있는 것이냐, 그대 생각에 초저녁별들이 고장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켜지는 밤이 오면 내 손끝에서 떠나간 노래들은 그대 가슴 어디쯤을 흐르고 있을까, 풍경(風磬) 소리 바람을 따라 흘러가버린 곳, 그 소리를 좇아서 마음이 한 열두 달 헤매던 곳에서 오늘도 그대는 산초나무 잎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나는데, 그대여 이 밤도 나는 술잔을 들고 하염없이 걷나니, 복사꽃 휘날리는 벌판을 지나 지금 여기에는 없는 곳, 가난한 등불 아래 산초나무 잎사귀가 피는 곳으로, 그대는 오라 ―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에는 매순간이 허하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내 사랑은 강철로 된 갠가 보다 ― 12월엔 과연 비, 풍, 초, 다 버리고 백마 탄 초인이 오기는 할 것인가 ― 사랑의 적재적소에 사람의 적소(謫所)가 있다 사랑의 적재적소에 사랑의 적소(謫所)가 있다 사랑의 제재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랑의 읍사무소엔 사랑의 급소(急所)가 있다 12월엔 읍사무소로 가서 사랑을 하자 1월과 2월은 비워두고 또 앞으로 다가 올 그 많은 날들은 그냥 비워두고
그대의 발명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사곶 해안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있네. 하얀 빤스 한 장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걸어 들어갈 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목소리처럼 이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네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출처, 다블,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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