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2011. 5. 24. 17:51詩.

 


 


네거리의 順伊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듯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할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조선지광}, 1929. 1.

 

 

 

 

 



우리 오빠와 화로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게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똥 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장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두 소리와 함께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 전 짜리 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萬國地圖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골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 뿐이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프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조선지광} 83호, 1929. 2.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항구의 계집애야! 異國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독크'는 비에 젖었고
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쫓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
오오 사랑하는 항구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난간은 비에 젖어 있다

"그나마도 天氣가 좋은 날이었더라면?"……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소용없는 너만의 불쌍한 말이다
너의 나라는 비가 와서 이 '독크'가 떠나가거나
불쌍한 네가 울고 울어서 좁다란 목이 미어지거나
異國의 반역 청년인 나를 머물러 두지 않으리라
불쌍한 항구의 계집애야― 울지도 말아라

추방이란 標를 등에다 지고 크나큰 이 부두를 나오는 너의 사나이도 모르지는 않는다
네가 지금 이 길로 돌아가면
용감한 사나이들의 웃음과 알지 못할 정열 속에서 그 날마다를 보내이던 조그만 그 집이
인제는 구둣발이 들어나간 흙자죽밖에는 아무 것도 너를 맞을 것이 없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의 계집애야! ― 너 모르진 않으리라
지금은 '새장 속'에 자는 그 사람들이 다― 너의 나라의 사랑 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귀여운 너의 마음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그 사람들은 너를 위하고 너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어째서 목숨을 맹세하였으며
어째서 눈 오는 밤을 몇 번이나 거리에 새웠던가

거기에는 아무 까닭도 없었으며
우리는 아무 인연도 없었다
더구나 너는 이국의 계집애 나는 식민지의 사나이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너와 나― 우리들은 한낱 근로하는 형제이었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한 일을 위하여
두 개 다른 나라의 목숨이 한가지 밥을 먹었던 것이며
너와 나는 사랑에 살아왔던 것이다

오오 사랑하는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비는 바다 위에 나리며 물결을 바람에 이는데
나는 지금 이 땅에 남은 것을 다 두고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라로 돌아가려고
태평양 바다 위에 떠서 있다
바다에는 긴 날개의 갈매기도 오늘은 볼 수가 없으며
내 가슴에 날던 '요꼬하마'의 너도 오늘로 없어진다

그러나 '요꼬하마'의 새야―
너는 쓸쓸하여서는 아니 된다 바람이 불지를 않느냐
하나뿐인 너의 종이우산이 부서지면 어쩌느냐
어서 들어가거라
이제는 너의 '게다' 소리도 빗소리 파도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가 보아라 가 보아라
내야 쫓기어 나가지마는 그 젊은 용감한 녀석들은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쇠창살 밑에 앉아 있지를 않을 게며
네가 있는 공장엔 어머니 누나가 그리워 우는 北陸의 유년공이 있지 않으냐
너는 그 녀석들의 옷을 빨아야 하고
너는 그 어린것들을 네 가슴에 안아주어야 하지를 않겠느냐―
'가요'야! '가요'야! 너는 들어가야 한다
벌써 '사이렌'은 세 번이나 울고
검정 옷은 내 손을 몇 번이나 잡아당겼다
이제는 가야 한다 너도 가야 하고 나도 가야 한다

異國의 계집애야!
눈물을 흘리지 말아라
거리를 흘러가는 '데모' 속에 내가 없고 그 녀석들이 빠졌다고―
섭섭해하지도 말아라
네가 공장을 나왔을 때 電柱 뒤에 기다리던 내가 없다고―
거기엔 또다시 젊은 노동자들의 물결로 네 마음을 굳세게 할 것이 있을 것이며
사랑에 주린 유년공들의 손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젊은 사람들의 입으로 하는 연설은
근로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불같이 쏟아질 것이다

들어가거라! 어서 들어가거라
비는 '독크'에 내리우고 바람은 '대기'에 부딪친다
우산이 부서질라―
오늘― 쫓겨나는 이국의 청년을 보내주던 그 우산으로 내일은 내일은 나오는 그 녀석들을 맞으러
'게다' 소리 높게 京濱街道를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오 그러면 사랑하는 항구의 계집애야
너는 그냥 나를 떠나보내는 서러움
사랑하는 사나이를 이별하는 작은 생각에 주저앉을 네가 아니다
네 사랑하는 나도 이 땅에서 쫓겨나지를 않는가
그 녀석들은 그것도 모르고 갇혀 있지를 않은가 이 생각으로 이 분한 사실로
비둘기 같은 네 가슴에 발갛게 물들어라
그리하여 하얀 네 살이 뜨거워 못 견딜 때
그것을 그대로 그 얼굴에다 그 대가리에다 마음껏 메다쳐 버리어라

그러면 그때면 지금은 가는 나도 벌써 釜山, 東京을 거쳐 동무와 같이 '요꼬하마'를 왔을 때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서러웁던 생각 분한 생각에
피곤한 네 귀여운 머리를
내 가슴에 파묻고 울어도 보아라 웃어도 보아라
항구의 나의 계집애야!
그만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비는 연한 네 등에 내리우고 바람은 네 우산에 불고 있다


 

 

 

 

 

 


양말 속의 편지


눈보라는 하루 종일 북쪽 철창을 때리고 갔다
우리들이 그날― 회사 뒷문에서 '피켓'을 모으던 그 밤같이……
몇 번, 몇 번, 그것은 왔다 팔 다리 콧구멍 손가락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프고 쓰린 것보다도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늙은 어머니들 굶은 아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모두들 다―사나이 자식들이다
언제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니
너만이 늙은 어메나 아베를 가진 게 아니고
나만이 사랑하는 계집을 가진 게 아니라고

어메 아베가 다 무어냐 계집 자식이 다 무어냐
세상의 사나이 자식이 어떻게 ××이 보기 좋게 패배하는 것을 눈깔로 보느냐

올해같이 몹시 오는 눈도 없었고 올해같이 추운 겨울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계집애 어린애까지가
다― 기계틀을 내던지고 일어나지 않았니

동해바다를 거쳐오는 모진 바람 회사의 펌프, 징 박은 구둣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도 우리는 이십 일이나 꿋꿋이 뻗대오지를 않았니

해고가 다 무어냐 끌려가는 게 다 무어냐 그냥 그대로 황소같이 뻗대고 나가자
보아라! 이 추운 날 이 바람 부는 날― 비누궤짝 짚신 짝을 싣고
우리들의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구루마를 끌고 나아가는 저― 어린 行商隊의 소년을……
그러고 기숙사란 문 잠근 방에서 밥도 안 먹고 이불도 못 덮고
이것을 이것을 이기려고 울고 부르짖는 저― 귀여운 너희들의 계집애들을……

감방은 차다 바람과 함께 눈이 들이친다
그러나 감방이 찬 것이 지금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선수들은 몇 번째나 몇 번째나 이 추운 이 어두운 속에서
다― 그들의 쇠의 뜻을 달구었다

참자! 눈보라야 마음대로 미쳐라 나는 나대로 뻗대리라
기쁘다 ××도 ×××군도 아직 다 무사하다고?
그렇다 깊이 깊이 다― 땅 속에 들어들 박혀라

으―ㅇ 아무런 때 아무런 놈의 것이 와도 뻗대자―
나도 이냥 이대로 돌멩이 부처같이 뻗대리라

 


―{조선지광}, 1930. 3.


 

 

 

 

 

 


夜行車 속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라 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굴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젓갈이나 거저 가져 올 게지……"
혀를 차는 네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잖은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은……
그믐밤이라 정거장 푯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나는지?

나으리들뿐이라, 누구한데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쟁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面所에서 준 표지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 뵈니까 그렇지!

차가 덜컹 소리를 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필연코 어제 아이들이 돌멩이를 놓고 달아난 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너 그 사이다 병은 집어넣어 무얼 할래.
오호 착해라, 그래도 누이 시집갈 제 기름병을 하려고……

노하지 마라 너의 아버지는 소 같구나.
빠가! 잠결에 기대인 늙은이의 머리를 밀쳐도,
엄마도 아빠도 말이 없이 허리만 굽히니……
오오, 물소리가 들린다 넓고 긴 낙동강에……

대체 어디를 가야 이 밤이 샐까?
얘들아, 서 있는 네 다리가 얼마나 아프겠니?
차는 한창 강가를 달리는지,
물소리가 몹시 정다웁다.
필연코 고향의 강물은 이 꼴을 보고 노했을 게다.

 


―{동아일보}, 1935년. 8. 11.

 

 

 

 

 

 



현해탄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나면
한 가닥 수평선밖엔 티끌 한 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南進해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몽블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시아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리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 걸린다.

아무렇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 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째 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이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도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 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喪帳을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이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 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었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이 조약돌보다 가볍게
玄海의 큰 물결을 걷어찼다.
그러나 관문해협 저쪽
이른 봄 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사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얕았는가?

오오! 어느 날
먼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은 나는 안다.
一八九○年代의
一九二○年代의
一九三○年代의
一九四○年代의
一九××年代의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칠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시집 {현해탄}, 1938년.


 

 

 

 

 


바다의 찬가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이랑,
무덤길에 선
노인들의 추억 속으로,
고스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은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얼음판처럼
뻐개질 듯하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야……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갯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너의
가슴에는
사상이 들었느냐

시인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의 곡조를
반주해라.

 


―{조선일보}, 1937. 6. 23.

 

 

 

 

 

 



깃발을 내리자


노름꾼과 강도를
잡던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廢 王宮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는 머리 우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神聖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현대일보}, 1946. 5. 19.

 

 

 

 

 

 

 

 

 

 

자고새면

 


자고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주검에서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진 장미넝쿨 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지를 사랑하기엔

더구나 마음이 애띠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 임화 전집(풀빛, 1988)

 

 

 

 

 

 

 

 

 

 

 

 

 

 

 

임화(1)

        - 아비찾기

                                              김윤식

 

임화는 제일급의 시인이자 비평가였고 실천가였다.

그리고 그는 계급혁명이라는 20세기가 빚어낸 가장 위대하고 비극적인 시대적 조건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아나키즘도 계급사상도 현실 부정 위에서 구축된다는 점에서 전위(前衛) 운동의 형태로 시작했다.

그러다 1930년을 전후한 일본 체험에서 계급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계급혁명이 군립하기 위해서는 조직훈련이 절대적 조건임을 투철하게 깨닫게 된다.

전위운동에서 벗어난 중기의 임화가 탄생했다.

비평과 시와 실천에 힘이 넘치고 우렁차고 민첨하게 된 것도 이 조직훈련의 실천에서 나왔다.

이 힘이 해방공간(1945~48)의 하늘에 불꽃처럼 폭발했고, 6.25는 그를 불꽃처럼 사라지게 했다.

 

1908년 경성에서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으며,

20세 전후에 가출을 해서 경성거리를 정신나간 사람처럼 헤매었다.

방황의 연속은 호기심과 열정을 낳았고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는 창조성을 길렀다.

소년은 멈춤이 없었다. 불꽃 그 자체로 시대의 복판에서 살았다. 타올랐다.

임화의 행적은 정치적이라기보다 영혼의 갈증이 중단과 공포 없이 여러 형태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이러한 순수한 열정이었기에 실체가 없었다.

 

소년은 여기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달아나고 있는데,

다다이즘, 미래파, 민중극장, 그리고 영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으로 빠져들고,

마침내 그는 카프라는 조직 속에 침투해 들어갔다.

또 거기에 멈추지 않고 현해탄을 건너갔고, 제3전선파를 구축하여 조직에 열중했으며

귀국해서는 카프의 서기장이 되어, 계급혁명에 신명을 바쳐 뛰었고 또 전향했다.

이러한 연장 선상에 8.15해방이 오고, 그는 더욱 혁명에 열중하여 남로당 문화담당 총책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정치적 죽음이 그의 삶을 중단시켰다.

                                                                                    (『임화』 김윤식. 한길사. 14.)

 

 

 

1927년 경 그는 다다와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단숨에 카프의 지도자 같은 표정을 보여준다.

'동지제군! 우리들에겐 이러한 훌륭한 선조와 역사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장래의 우리들을 위하야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는가!

자아 어서 앞으로, 적은 총을 재이고 있네.

어서 - 동지제군!

(1927.2.7)'


이 무렵 임화는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좋은 스승인 박영희(1901~?) 를 만났다.

박영희는 ‘내용-형식 논쟁’에서 김기진을 일격에 넘어뜨린 용사로 비춰지고 있던 시기였다.

‘내용-형식 논쟁’은 카프가 견고한 성채이며 공산당의 초기 형태의 조직성을 처음으로 겉으로 내보인 사건이었고,

카프가 목적의식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임화는 박영희를 통해 아비를 찾은 아들처럼 견고한 성을 발견하고 방황을 끝냈다.

그는 ‘분화’ 이론을 통해 문화 예술을 마르크스 이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분화 이후에, 즉 이 공동전선이 붕괴된 후에

우리의 진영은 전부가 단순한 목적의식적 비약을 강조하는 모든 선구적 능력을 가져

공산주의의 투쟁적 인테리겐차로 성립된 완전한 무산계급의 문예전선이 될 것이고

거기에서 벌써 무산계급으로서의 미적 완성의 추구를 할 것이라고 또한 나는 믿는 바이다.

즉 이 분화작용은 진영으로 하여금 의식적인 이데올로기를 소지하고 있는 직능적 예술운동의 전야(戰野)를 전개하려고 하는

사적 필연의 현상이요, 또 인위적 진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낳는 작품이 비본격적이고 포스터적이오 선전적이라도 하등의 관계가 없다.

 

                                                                   (임화 「문화의 전개」 조선일보. 1927.)

 

 

 

1927년 카프의 도쿄지부인 제3전선파는 카프가 제1차 방향전환을 완결하면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임화는 정신적인 아비 박영희를 떠나 김복진이 활동을 주도하는 제3전선파에 가담하게 된다.

1929년, 「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 등으로 카프 시가의 획기적인 시인으로 부상했으며,

김기진과 ‘예술 대중화 논쟁’을 통해 통렬하게 자기비판을 감행한다.

1929년 가을, 그는 도쿄로 향했다. 첫 가출보다 복잡한 제2의 가출이었다.

 

임화는 도쿄에서 충청도 천안의 빈농 출신 이북만(?~?)을 만났다.

이북만은 아내와 누이를 데려와 가난한 살림을 도쿄바닥에 차려놓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도쿄지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론 투쟁에서 그를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

그는 박영희를 대신해 임화의 아비 자리를 차지했다.

도쿄는 임화에게 근대였으며, 사상이었고, ‘움직일 수 없는 진리’였다.


그리고 임화는 세 번째 아비 나카노 시게하루를 만났다.

나프(NAPF)의 나카노가 유독 카프 도쿄지부와 조선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소지주 출신이며 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으며, 천황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세계 건설을 목표로하는

문인이자 이론 투쟁가였다.

그의 시작(詩作)에 재일 조선인 노동자가 현실적 힘으로 뒷받침되었다.

임화는 그의 시를 깊이 있게 읽고 있었으며 화답시를 쓸 정도로 친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문학상을 주고받기에 임화는 순수하고 유치했으며,

나카노는 민족 에고이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화(2)

    - 아비되기

                       김윤식

 

임화는 도쿄에서 합숙하던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1931년 경성으로 돌아와 혼례식도 없이 가정을 꾸렸고

딸 혜란을 낳았다.

카프 재조직 계획을 수립했고 권한과 함께 모든 조직 관계를 맡았다.

소시민 출신인 박영희는 카프가 합법적 문학 활동에서 공산당 비합법적 운동, 볼세비키화 되는 것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임화의 아비가 아니었다.

임화는 아비되기의 길로 적극적으로 들어섰는데, 가장 완벽한 방법은 감옥행이었다.

카프의 볼세비키화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였다.

임화는 감옥살이를 함으로써 비로소‘아비찾기’에서‘아비되기’로 귀결되었다.


혁명가의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이북만도 이귀례도 임화에게서 멀어갔다.

재건공산당사건으로 감옥에 갔다왔고, 이귀례와 이혼하고 소설가 지망생 이현욱과 재혼했다.

폐결핵을 앓았고 카프 전주사건 후 스스로의 손으로 카프 조직을 해산했다.

(카프 전주사건 : 극단 ‘신건설’은 카프의 직속 연출극단이었다.

1934년 신건설 창립작으로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제작하여 지방순회 공연을 했다.

이때 전북경찰서 고등계가 중심이 되어 신건설사 회원들을 대거 체포한 사건이 있었다.

박영희, 김기진, 한설야, 송영, 권환 등 80여명이 검거 되었다가 모두 불기소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문학사를 기술하게 되는데,

우리의 근대가 불과 30년의 역사라는데 절망을 하고 이식문학론을 내세운다.

이식문학론의 근거는 일본 근대문학사에 젖줄이 닿아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가 근대성을 문제 삼을 때도 일본의 근대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잡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임화는 엥겔스의 ‘벌자크론’이나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을 들고나왔으나,

추상적인 이론을 내세우는데서 나아가지 못해, 이론에 상응하는 창작 활동이 없었다.


해방이 되었다.

문학인들이 자기반성과 양심선언에 이어 새로운 목표를 향해 결집했다.

임화, 이태준, 김남천이 중심이 되어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였고, 홍명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뽑았다.

문학가동맹은 내부적으로 민족문학을 내세우면서 정치적으로는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의 외곽단체 역할을 했고,

임화는 기획부 차장을 맡아 남로당의 정치적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는 비록 카프 서기장 경력을 가졌으나 전향하였고,

한갓 시인으로 또 비평가로 굴욕적으로 살다가 해방조국을 맞은 것이다.

그는 역사를 오판한 것을 뼈아프게 반성하면서 용기를 내어 정치참여에 소망을 드러냈고,

결국 시인이면서 시인이 아닌 박헌영의 정치적 대변인이 되었다.

이로부터 임화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1947년 11월에 월북했고 1950년 7월에 문화연맹 간부로 서울에 왔다.

이태준, 김남천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으로 종군했으며 9월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남로당과 운명을 같이 했다.

 

6.25는 그를「네거리의 순이」계열로 되살려놓았다. 그는 그도 모르게 온전한 시인으로 되돌아갔다.

이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보고 있었다.

운명을 응시하며 종로 네거리에 서 있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응시하며 종로 네거리에 서 있는 중년의 사나이를 해칠 그 어떤 무기도 없는 법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 재판장 김익선 소장이

임화를 두고 “형법 제78조 및 형법 제65조 1항에 의하여 사형, 형법 제 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

형법 제68조에 의하여 사형을 각각 량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형법 제68조의 사형에 처한다.

그에게 속하는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고 한 것은 임화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누가 시인을 단죄할 수 있으랴.

 

                                    (『임화』 김윤식. 한길사. 168.)

 

 

 

당신이 섰던 종로 네거리는 지금 환청과 환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순이의 손자 손녀가 꿈도 수치심도 없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또 한 곳.
당신이 선택한 반도의 북쪽은 어떠합니까.
내 사랑하는 동무,

근로하는 여자들이 가면을 쓰거나 가면이 쓰인 채

백색으로 빛나는 공장에서 충성을 외치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굶주림의 끝은 보이지 않고, 정열은 무덤 속에 갇혔습니다.

용감한 사내는 군인이 되거나 죽거나 도망을 갔습니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는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잠시 당신의 삶 앞에 고개 숙입니다.

 

 

 

 

출처 : 이호희논술 cafe.daum.net/mito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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