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 바람의 말 & ......

2011. 5. 21. 11:20詩.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건가.

가끔 바람부는 쪽으로 귀 디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Piano By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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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의 눈

 

 

가을이 첩첩 쌓인 산속에 들어가

빈 접시 하나 손에 들고 섰었습니다.

밤새의 추위를 이겨냈더니

접시 안에 맑은 이슬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슬은 너무 적어서

목마름을 달랠 수는 없었습니다.

하룻밤을 더 모으면 이슬이 고일까,

그 이슬의 눈을 며칠이고 보면

맑고 찬 시 한 편 건질 수 있을까,

이유 없는 목마름도 해결할 수 있을까.


다음 날엔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이슬 대신 낙엽 한 장이 어깨에 떨어져

부질없다, 부질없다 소리치는 통에

나까지 어깨 무거워 주저앉았습니다.

이슬은 아침이 되어서야 맑은 눈을 뜨고

간밤의 낙엽을 아껴주었습니다.

― 당신은 그러니, 두 눈을 뜨고 사세요.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위도 보세요.

다 보이지요? 당신이 가고 당신이 옵니다.

당신이 하나씩 다 모일 때까지, 또 그 후에도

눈뜨고 사세요. 바람이나 바다같이요.

바람이나 산이나 바다같이 사는

나는 이슬의 두 눈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도

바람의 앞이나 바다의 뒤에서

두 눈 뜬 이슬의 눈을 보았습니다.

 

 

 

 

 

 

 

 

늙은 비의 노래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사방의 시야를 막고
헐벗고 젖은 속세에 말 두 마리 서서
열리지 않는 입 맞춘 채 함께 잠들려 하네

 

눈치 빠른 새들은 몇 시쯤 기절에서 깨어나
시간이 지나가버린 곳으로 날아갈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없고 늙은 비의 어깨만 보이네
세월이 화살 되어 지나갈 때 물었어야지,


빗속에 혼자 남은 내 절망이 힘들어할 때
두꺼운 밤은 내 풋잠을 진정시켜주었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안해졌다.
나중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개가 된 늙은 비가 어깨 두드려주었지만

아, 오늘 다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빗속에 섞여 내리는 당신의 지극한 눈빛.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

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 

아직 믿기지 않지만

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 

같이 늙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바닷바람은 속살같이 부드럽고 

잔 물살들 서로 만나 인사 나눌 때 

물안개에 덮인 집이 불을 낮추고 

검푸른 바깥이 천천히 밝아왔다. 

같이 저녁을 맞는 사람아, 

들리냐,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새로웠다. 

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느냐, 

끊어질듯 가늘고 가쁜 숨소리 따라 

저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졌다.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다. 

저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 

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 

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꽃의 이유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전 화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맑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에서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물빛 1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 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 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정신과 병동 

 

 

비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한 명

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버린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풍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도

지겹지 않고

까운 입은 삐에로는

비 오는 것만 마음 쓰인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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