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2) - 이동원

2011. 6. 20. 20:55음악/음악 이야기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 노래의 작사가인 셈인데, 선생의 간단한 약력부터 살펴보죠?

 

1917년 11월 28일생인 박기동 선생은 전남 벌교가 고향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박준태) 덕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유학을 가게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노래로 낙인찍히면서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80년대까지도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19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현재 호주 시드니 거주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부용산이라는 노래는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떤 곡인지 소개?

 

부용산은 1948년에 목포에서 만들어졌고, 이후 널리 애창되었던 곡입니다.

작곡을 했던 안성현이라는 분이 무용가 최승희와 월북하고 나중에 빨치산이나 민주화운동세력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 아니 금지곡이 되어 공개적으로 부르지 못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져 왔습니다.

구전으로만 전하다 보니 노래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과 추측들이 생겨났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용산 노래 원본이 발견되고, 실제 작사가인 박기동 선생이 호주에 살고 계신다는 것 등이 밝혀지면서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 둘 확인되기 시작하였고,

지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부용산 시비와 노래비가 세워지고, 음악회가 열리고, 관련 책도 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목포에서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탄생하게 된 남다른 배경이 있다는데?

 

당시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에는 김정희(1931.10.1∼1948. 10.10)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던 수재로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로 전학을 왔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 김정희학생을 가르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박기동 선생을 항도여중으로 불러왔다고

자주 이야기했을 정도의 천재적인 소녀였습니다.

김정희라는 학생은「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글짓기 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학생이 요절하게되자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음악담당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구전상으로는 학생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박기동 선생이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 이전에 본인의 누이동생을 위해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구전되어 오는 내용과는 달리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은 누이동생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노래의 가사는 원래 박기동선생이 쓴 '부용산'이라는 시였습니다.

부용산은 실제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M의 조그만한 산의 이름인데,

'부용산'이라는 시(詩)를 쓴 박기동은 그의 나이 10세 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습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곳 부용산에 그를 묻고, 그날 부용산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노래의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가 만들어진 배경은 벌교이고, 노래로 만들어지고 불려지게 된 것은 목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노래가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생명력은 어디에 있을까?

 

김정희라는 학생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불려진 이 노래는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잔잔한 멜로디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널리 애창되었습니다. 

좌우익의 갈등이 심한 혼돈시기에 빨치산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고향을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즐겨 부르기도 했고,

민주화 운동의 시기에는 운동권 학생들의 민중가요로도 애창이 되었습니다.

실제 박기동 선생을 만나서 여쭤본 적이 있는데,

노래말중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이란 부분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 같고,

곡의 뒷부분 '푸르러 푸르러'로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마치 "상여 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게 처리되어 있어서,

그런 부분이 남도민의 한이 서린 정서에 잘 부합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구전으로만 전하던 부용산 노래가 대중에게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98년 한국일보에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면서부터입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던 부용산 노래가 다시 햇빛을 보기 시작했고,

고향인 목포와 벌교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이어지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99년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를 시작으로 고향인 벌교의 부용산에 정자와 시비(99년 9월)가 세워졌고,

부용산 노래가 만들어진 목포여고 교정에는 부용산 노래비(02년 4월 24일)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방송에서는 다큐멘타리가 제작되어 부용산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둘 알려졌습니다.

 

호주에 살고 계신다고 했는데, 박기동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있군요.

박기동 선생을 직접 뵙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운 좋게도 세 차례 정도 그분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기동 선생은 87세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옛날 일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계셨습니다.

부용산이라는 시 한편으로 인해서뜻하지 않은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정작 본인이 이 곡이 빨치산이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애창가요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시를 쓴지 51년이 지난 뒤 호주에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인 김성옥씨의 부탁으로 실로 50여 년 만에 부용산 노래가사 2절을 만들면서 옛 감회에 젖어서 끝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혹시 박기동 선생으로부터 직접 부용산 노래를 들어보신 적은 있는지?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지난 2002년에 5월 20일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박기동 산문집이 발간이 되었는데,

그때 목포에서 몇몇 지인들이 모여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박기동 선생도 잠시 귀국을 해서 함께 참석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를 낭독하셨고,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각기 돌아가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용산 노래를 열창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참석자들의 요청에 따라 박기동 선생도 직접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부용산 노래는 1997년에 가수 안치환이 정식으로 음반에 취입을 했었는데, 그때 만 해도 구전 가요 작자미상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멜로디도 원곡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죠.

후에 박기동 선생의 제자인 김효자씨가 원곡 악보를 가지고 있어서, 최근에 원곡의 멜로디가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박기동 선생과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듣고 있다보니까,

그러면 이 노래를 만든 작곡자는 어떤 분이였을까 궁금해지는데, 알려진 바가 있습니까?

 

노래를 만든 분은 당시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1920∼?) 선생으로 또 하나의 천재적인 예술인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북했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나주 남평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나왔으며,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는데

당시의 제자들은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미남 선생님으로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안성현 선생과 관련해서 매우 의미 있는 소식들이 최근에 들려오고 있는데,

그동안에 그가 만들었던 11곡의 음악이 담긴 작곡집만 전해왔는데, 두 번째 작곡집이 발견이 되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안성현 선생의 처조카 성경래 씨(49, 광주시 북구 연제동)가 발굴했는데,

“고모부의 음악적 행적을 찾기 위해 10여 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어렵사리 작곡집을 구해 간직해 왔다”고합니다.

이 작곡집을 통해‘안성현’의 올바른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곡집은 일제 강점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민들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詩)를 비롯해

‘부용산’(박기동 詩), ‘낙엽’(안성현 작사작곡), ‘앞날의 꿈’(조희관 詩), ‘진달래’(박기동 詩), ‘내 고향’(조희관 詩) 등

암울했던 민족의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노래한 2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작품집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미공개 된 조희관 선생의 시, 박기동 선생의 시들이 담겨 있어

문학적으로도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또한 최근에 광주 쪽에서부용산을 주제로 하고, 작곡작인 안성현 선생의 삶을 모태로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도 있는데,

고향 쪽에서도 부용산과 그 곡을 만든 박기동시인, 작곡자 안성현 선생에 대한 추모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퍼온글

 

 

 

p.s

 

박기동 시인은 2005년 5월9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원 내 아내 옆에 안장됐다.

'음악 > 음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Blues is Life  (0) 2011.07.05
동요 하나  (0) 2011.06.29
《박수는 언제 치나요》  (0) 2011.05.27
클래식의 위기  (0) 2011.05.27
자클린의 눈물  (0) 2011.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