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시... 천상병「막걸리」&

2011. 4. 7. 20:08詩.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운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 천상병, 「막걸리」전문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아내는 이 한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 천상병, 「술」전문

 

  

 

 

내가 말없이 술잔 비우는 건

윤회를 꿈꾸는 세월에 주먹을 치며 나를 달래는 일이다.

내 가슴 일부를 누구 스친 바 없는 시간에 미리 섞는 일이다.

허기진 공복에 잔을 씻고 씻으며

미지의 시간을 위로해주려는 그런 마음이란 말이다.

 

- 강태민, 「내가 술을 마시는 건」 중에서

 

 

  

 

 

그 독특한 절의 모양새 안타까워 술을 마신다

절 앞 수백 년 먹었을 팽나무

어느 날 포크레인에 흔적도 없이 파여날까 염려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마신 술 점차 올라

줄줄대는 계곡 물소리 들리지 않는다

 

- 조해훈, 「대운산에서 동동주를 마신다」 중에서

 

 

  

 

 

언제나 새벽은 편하다, 자유롭다

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새벽녘이면 으레 포장마차

합천집으로 간다

동향인 주인아주머니와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

날은 뿌옇게 새고

새벽이슬 받으며

술기운에 쓰는 글 나부랭이도

이땐 자유롭게 술술 풀려져

합천집 소주가 나의 잡문인지

나의 잡문이 그집 소주인지…

 

- 최원준, 「술맛을 배우며」 중에서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 황지우,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중에서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중에서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김영승, 「반성16」 전문

 

 

 

 

 

 

 

 

 

 

황지우 시가 필이 팍 꽂히네요. 머지 않아 늙은이가 됐을 때를 생각하며 쓴 시로군요.

 

술집에 혼자 가서 마셔본 적 있으십니까? 포장마차 말구요.

손님이나 주인이나, 피차 어색하죠.

젊은놈이 혼자 와도, 늙은이가 혼자 온대도 마찬가지죠.

젊은 놈은 술먹고 깽판칠까봐. 늙은이는 목 매달까봐.

ㅋㅋㅋ

그런데 문제는 황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훗날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네요.

늙으면 폐인이 된다고 해서 분하게만 생각하면 안돼요.

일정부분은 인정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비관하는 건 누구나가 다 그럴 겁니다.

'아름다운 폐인'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늙는 자체가 아름다울 수는 없을테니까

맹하니 나이 먹는단 얘기는 아니겠고,,

"돈! 돈!" 하는 얘기도 물론 아니겠고,,

저에게는 저 말이

'인생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황 시인이 '못 견디겠다'고 한 말은 이해가 좀 안됩니다.

저는 지금도 나아가고 넓혀짐을 느낍니다.

작년 다르고 올 다르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요.

내년 내일 또 달라질 자신이 있어요.

아직은 그렇습니다.

제가 지난날에 써 놓은 글을 봐도 일취월장했음을 느낍니다.

친구는 풋풋한 맛이 없어졌다며 아쉬움을 나타내던데,

저는 그런 생각 안듭니다.

이번에 손가락 때문에 수술실 들어가서도 생각을 많이 했는데,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폐인'이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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