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7. 11:10ㆍ詩.
1957년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80-1982년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1983-1990년 작품활동 중단,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이 기간 동안 명상서적 번역작업을 하다.)
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들 체험.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인도여행. 오쇼 라즈니쉬 명상센터 생활.
1988-1991 가타 명상센터 생활.
1992-1993 제주도 생활.
1994년 태국, 스리랑카, 인도, 네팔, 히말라야 여행.
시 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명상집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민들레 사랑하는 법>,
수필집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딱정벌레>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번역집 <성자가된 청소부> <장자, 도를 말하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등 40여권 번역.
류시화 홈페이지 http://www.shivaryu.co.kr/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바람 부는 날의 풀
바람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자살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이별법
사랑이 오실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한 사람을 떠나보냅니다
비록 우리 사랑이 녹아내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해도
그래도 한때 행복했던 그 기억만은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이 사랑
그대가 주었던 슬픔은 모두 잊고
추억의 상자에서 꺼내어
아름다웠노라, 지극히도 아름다웠노라
회상할 수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우리 사랑이 이별로 남게 되어
지금은 견디기 힘든 아픔뿐일지라도
사랑이 오실 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헤어지는 지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로....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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