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1. 12:00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셋
일본 말 중에서 '와비(わび)' '사비(さび)'만큼 복잡 미묘한 의미를 가진 말도 드물 것이다.
'와비(わび)'는 결손의 정서에 가깝다.
그러나 모자라되 아쉽지 않고, 헐벗되 비루하지 않은 경지다.
그래서 '와비(わび)'는 곧 '가난의 미학'과 통한다.
'사비(さび)'는 한적한 정서에 가깝다.
스산하되 외롭지 않고, 고요하되 무료하지 않은 경지다.
곧 '유적(幽寂)의 미학'이다.
-손철주, 그림 보는만큼 보인다-
일본인이 한국인의 恨이라는 독특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일본인의 와비, 사비에 관한 감정을 짐작하지 못하리라.
아니, 현대의 일본인 중에서 과연 얼마 정도나 와비, 사비를 이해하는 이가 있을지조차도 몹시 의심스럽다.
와비란 가난함이나 부족한 가운데에서 마음의 충족을 끌어내는 일본인의 미의식의 하나이다.
사비는 한적한 가운데에서도 더없이 갚고 풍성한 것을 깨닫는 미의식이다.
와비와 사비는
茶道나 하이카이(시의 형식. 단시의 형태로 웃음과 해학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의 정신적인 美意識으로 기능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중세라는 시대 배경을 빠뜨리고는 설명할 수 없는 미의식이기도 하다.
전국시대의 전란을 거쳐, 그후 모모야마시대의 현란하고 화사한 번영을 지나, 이윽고 도달한 경지라고나 할까.
갑자기 최순우 선생님의 글이 생각납니다.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쇼.
비몽사몽간에 어디선가 유량한 교향악이 들려 오고 있었다.
잠시 눈을 뜨고 동쪽 미닫이를 바라보면
휘영청 밝은 달빛에 일렁이는 배나무 그림자가 창문 가득히 그림처럼 비치고 있었다.
낙엽 져서 성긴 잎 사이로 열매 그림자가 그리도 또렷하게 설렜고
한 잎 두 잎 져 가는 낙엽 그림자가 동화 속에서처럼 신기로웠다.
눈을 감으면 다시 음악 소리가 다가오고,
꿈인 양해서 또 눈을 떠 보면 툇마루에 두 발을 얹고 방 안의 동정을 살피는 바둑이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이어지는 음악 소리.
나는 이 아름다운 꿈에서 깰까 봐 다시금 눈을 감아 꿈을 청하곤 했다.
이것은 벌써 아득히 가 버린 어느 해 가을 달밤,
호젓이 밤을 지키던 고향집 미닫이창에 대한 추억이다.
서울에서 살게 된 후에도 나는 늘 달 그림자가 의젓이 빛는 동창이 있었으면 했고
그러한 소원이 이루어져서 나는 한 10년 전부터 동쪽으로 영창이 트인 한실 서재에 다시 살게 되었다.
그 첫해 늦은 가을 달밤,
나는 옛일처럼 불을 끄고 호젓이 누워 동창에 비친 감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애틋한 사람의 얼굴을 허공에 그려 보곤 했다.
아래윗방에 각기 높직하게 자리잡은 영창에 달빛이 너무도 가득해서
감나무 그림자는 마치 멋진 추상화처럼 구도가 잡혀 있었고,
달이 이울어 감에 따라서 이 희한한 그림 아닌 그림폭은 허전하게 지워져 가곤 했다.
이른 봄날이면 보라색 새벽 노을이 이 영창에 물들어 오기 마련이고
초여름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무성해지는 감나무 그늘에 가려져서
달 그림자 없는 한여름을 지루해하기도 했다.
내 방에는 서쪽 뒤뜰로 면한 쪽에도 아래윗방에 넓은 용자(用字) 미닫이창이 트여 있었다.
이 창 밖, 조그마한 뒤뜰에는 자작나무 서너 그루, 이름 모를 산나무,
홑겹진달래, 산동백, 도토리나무 등속이 한 그루씩 옹기종기 서 있다.
나는 고향에 살 때부터 잔재주를 부린 뜰이나 값진 정원수들로 꾸며진 뜰은 질색이었고,
오히려 어디에서나 있는 산나무들을 자연스럽게 가꾸면서
신록과 낙엽과 소박한 꽃과 열매 들을 바라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왔다.
서울집 동창의 꿈을 잃은 뒤 나는 곧잘 새벽잠에서 깨어나
서창의 후련한 용자 미닫이창에 그림자 진 신비로운 새벽 달빛을 혼자 보기 아쉬워하기도 했다.
정갈하고 조용하고 밝은 서창가에 앉아서 하오의 한나절을 부스럭거리노라면
낙엽 소리, 풍경 소리에 해쓱한 뒤뜰 산나무들이 석양 햋빛에 그림자 져 주기도 하고,
된서리 내린 날 언뜻 미닫이를 열면
이름모를 산나무에는 주홍빛 잔 열매들이 단풍 사이로 알알이 빛나서
꽃보다도 고운 데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후략)
하루 종일 이런 글이나 베끼고 앉았으면 좋겠습니다.
최 선생님이 이 글을 쓰실 때의 나이가 어찌 되셨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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