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6. 15:08ㆍ詩.
엽서, 엽서
김경미
단 두 번 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 년 혹은 이년 전인가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텅 빌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밑 좋은 그림엽서 보았을 때
내겐 우표만큼의 관심도 없을 사람을
아득히 멀리 있음에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이양 그립다 쓰지요
당신 끝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 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표절
김경미
우리는 매일 표절 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 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흔들리는 것들
나희덕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
네가 듣지 못하는 노래,
이 노래를 나는 들어도 괜찮은 걸까
네가 말하지 못하는 걸
나는 감히 말해도 괜찮은 걸까
새들이 울면
그 소리를 네게 들려주고 싶다
- 나희덕 <手話>에서
지지난 해던가, 도종환 시인이 혼자 지내는 산속 흙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나팔꽃 동인을 함께할 만한 여자 시인이 없을까요? 했더니 바로
"희덕이가 시를 정말 잘 쓰지." 한다.
나중에 들어보니 나팔꽃의 다른 시인들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선수끼리는 안다. 누가 진짜배기인지.
- 백창우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최승자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게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게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게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어드릴게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드릴게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게요.”
Y를 위하여
최승자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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