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6. 17:12ㆍ詩.
장작불
백무산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붙지 않으면
쓸모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는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돛대도 아니 달고
백무산
1
생전에 뵙지 못한 권정생 선생께서 가신
안동병원을 찾았지만
나는 곧 빈소를 잘못 찾아왔음을 알았습니다
고인은 아직 집에 계신 듯, 문상객들의 눈치놀음이
데면데면한 것이 민망하여 술자리를 물리고
집으로 조문을 갔습니다
마을 이름 하나만 믿고 마을에 와서도 집을 묻지 않았습니다
집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을을 지나 집의 언저리까지 끌고 온 내 짐작은
지붕이 보일 무렵 그만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선생의 집에 와서
민망하리만큼 눈물 적셨습니다
헛간채보다 못한 적빈의 살림살이가
눈물겨워서가 아니었습니다
2
얼치기 반풍수가 보기에도
이곳은 집이 앉을 땅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흉사에나 쓸 물건이나 상여를 넣어둘 곳집이 있거나
역병 든 사람 죽음길 보내는 초막이 있거나
흉한 곳에 흉한 것을 두어 흉을 좀 눌러보자고
복 바랄 일 애당초 가망없고 처절함만이라도 면해보고자
빌고 또 빌어보던 골매기 성황당이나 있어야 할 터였습니다
게다가 마냥 열린 북쪽에서 닥치는 칼바람이
수시로 집을 헐뜯고 뒷산 빌뱅이 언덕이
의붓자식처럼 내다버린 곁줄기 하나가
집터에 이르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져 사룡(死龍)이 되어 있었고
뒤에서 무력하게 흘러온 개울물은
집을 외면하고 저 가기 좋은 길로만 바삐 가고 있었습니다
땅속은 골수가 빠진 뼈처럼 부스러져 있었고
습한 기운은 집의 아랫도리를 뱀처럼 휘감고 있었습니다
3
아, 이곳에 누워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뼈마디 마디 저미는 숱한 밤을 어찌 지새우셨을까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아랫마을을 범하기 전에
그 길목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밤을
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싸우신 것일까
굳이 흉한 곳에 몸을 두어
대속하신 것일까
삶을 대속물로 드린 것일까
죄의 대속물 같은
고통의 대속물 같은
대속으로 흘리신 피 같은
그것이 선생의 글이었을까
세상의 흉한 터가 문학의 본적지일까
4
나의 두 눈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워져
선생의 집을 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크게 잘못 읽었을까 두려웠습니다
마당 앞에 놓인 범상치 않은 바위에 비친
맑은 기운 하나도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집을 나와 밭을 가로질러 멀리 나아갔습니다
마을이 한눈에 보일 때까지
개울을 따라 한참 나아가 뒤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본 선생의 집은
강아지 꼬리 형국으로 흘러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똥무더기 하나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 똥무더기가 선생님의 집이었습니다
5
그러자 내가 무엇을 못다 읽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선생님의 그 철부지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 놀던 대로 다리를 벌리고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아, 그곳에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건 집이 아니라 작은 쪽배였습니다
낮달 같은 쪽배를 타고 구름 물결에 둥실 뜬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 쪽배는 세상을 떠메고 있었습니다
여위고 창백한 뼈 마디마디 다 드러낸 낮달 같은 쪽배에
눈물겨운 세상을 다 떠메고 있었습니다
그만 놓아드려야겠습니다
질긴 업장의 밧줄 하나 풀어드려야겠습니다
집을 허물어 배를 띄워야겠습니다
쌀밥 고봉밥 같은 어매 사는 나라로
목화솜같이 따듯한 여인 하나 사는 나라로
그만 훨훨 놓아드려야겠습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눈을 기다려
백무산
사나흘 눈 내리고 녹기도 전에
또 눈 내리자 사람들은
하늘 보며 지겹다 하지만
나는 눈이 모자라 하늘을 보네
길 끊겼다 투덜대고 원망들 하지만
내사 이때라도 세상길 한번 뚝
끊어먹는 일 반기고 좋아라
사방팔방 들뜬 길 지르고 뚫린 다음
마음길 돌아보지 못해
나무들과 형편없이 멀어져버렸네
흰 눈 내려 사방팔방 뚫린 길 지우고
눈밭에 나무로 서서 한철 겨울을 나고 싶어
눈을 기다려 폭설을 기다려 하늘을 보네
복
백무산
기특한 여자아이 손이 늘 얼음처럼 차다
몸 불편한 부모 손발 대신하느라고
아직 응석 부릴 솜털 뽀얀 나이인데
어른 몫 하느라 아이 몸짓이 아니다
커서 잘살겠다고 이웃들 덕담들 하지만
그 아이 불길한 미래를 나는 여러번 본 일 있다
아주 여러번
부모 동생 짐 덜자 지지리도 못난 남자 만나
습관이 운명을 부르고 사람을 부른다.
그 사람 뒷바라지에 딸린 시부모 시동생 치다꺼리
자식이나 잘 커주면 좋으련만 사고는 쉴 새 없고
남의집살이에 공장일 가는 곳마다
배부른 자들 봉양하느라 마흔 쉰 예순
늘그막에 발 뻗고 자식 며느리 밥상이라도 받을라치면
덜컥 큰 병원에서 오시란다
늘 꼼지락대던 어린 우리들에게 어른들은,
- 좀 처연히 있어 버릇하라, 복 달아난다!
- 복이 왔다가 어디 앉을 곳이 있어야 앉지!
그랬다, 나비도 조용한 꽃에 앉고
새들도 바람잔 가지에 앉는다
땀에 절어 일하는 사람들
복 앉을 처연한 어깨 없어 가난하다
저 아이 어깨에 나비가 앉게 해야 한다
저건 착한 일이 아니다
아이가 죄를 짓도록 버려둔 것이다.
누가 오시려고
백무산
봄비 무연히 내리네
땅속뿌리들 뒤척이게 해놓고
달뜬 흙냄새 아득히 들판에 풀어놓고
빗줄기 싸리비 다발로 정결하게 들판을 쓸어놓고
물안개 하얀 손길에 산허리 뒤척이게 해놓고
왜 이토록 비워두셨는지요
왜 이토록 비워두셨는지요
어쩌자고 이 마른 기억의 자갈밭에
숨은 낱알 하나 두근거리게 하고
저리 빈 것들은 다
어디서 불러내셨나요
어쩌자고 저리 들판 가득 펼쳐놓으셨나요
비워 이토록 두근거리게 하셨나요
누가 오시려고
누가 오시려고 이토록
비 가득 비워놓으셨나요
이 길에서 삶을 혁명하리라
백무산
햇살은 부처
길은 법당
바람은 경전
길은 머물지 않고
머무는 것은 생명이 없네
햇살을 잡지 못하듯이
손에 잡히는 것은 언제나 어둠뿐이듯이
흐르는 강을 잡으니 강은 사라지듯이
나비를 잡으니 나비춤이 사라지듯이
진리를 잡은 손 안에는 허위의 어둠만 가득하듯이
구름은 부처
달빛은 법당
물소리는 경전
구름은 머무는 법이 없네
달은 한번도 같은 달이었던 적이 없네
둘이 아니라 하나라 하다 하나에 빠지고
삼세 근본이 공이라 하다 공에 빠지고
일체만물이 허망하다 하다 허망에 빠지고
길을 붙들다 길을 잃고
길을 버리다 길에 빠지네
풀꽃은 부처
들바람은 법당
새들 지저귐은 경전
꽃은 머물지 않네
길은 들바람과 같은 몸, 저 산모퉁이에서
사라지고 일어나네
내 목소리 크니 너의 목소리 들리지 않고
우리 목소리 크니 저들 목소리 죽고
사람의 소리 크니 짐승의 소리 죽고
평화는 숨죽이는 일, 내 자리 비우는 일
평화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일
침묵해 작은 소리 귀 기울이는 일
내 자리 비워 너를 앉히는 일, 평화는
내 목소리 비워 뭇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평화는 너와 나를 방생하는 일
흰눈은 부처
설산은 법당
인간의 신음소리는 경전
내가 너에게 베푸나 교만하지 않고
본래 내 것이 아님을 배우는 일
내가 네게 의탁하여 나를 낮추나 비굴하지 않고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님을 배우는 일
탁발은, 받아서 베풀고 주어서 의탁하는 것
그래서 놓아버리는 일, 마음에서 손에서 일체를
놓아버리는 일, 놓아버리는 일은 흐르게 하는 일
흐르게 하는 일은 살리는 일
모든 길과 모든 생명은 머물지 않네
모든 실제는 오직 흐를 뿐, 생명은 머문 실체가 없어
지킬 수도 없네, 생명 아닌 것과 싸우자니
생명이 깃들 곳이 없네
다만 그냥 두지 않는 일과 싸울 뿐
다만 그냥 두지 않는 일에 저항할 뿐
떠거운 육신은 부처
환락의 거리는 법당
고통의 신음은 경전
이 마음을 떠나서 어디서 구할까
이 길을 떠나서 어디서 구할까
아아, 이 피고름 물컹한 고깃덩이, 이 육신을
떠나서 어디서 무엇을 구할까
내 고통 너의 슬픔 떠나서 무엇을 구할까
길은 들바람처럼 또 저리 사라지고 일어나는데
삶은 저리 잡힐 듯이 거품이 이네
아침 햇살 어린 물무늬처럼 인생은 저리 허망하고 찬란하여라
이 길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죽어도 다시 오지 않으리
이 몸 이 마음 그대로 끌고는 다시 오지 않으리
이 길 떠나 삶을 혁명하리라
혁명의 시간, 장정의 길을 강물처럼 흘러가리라
칠흑 어둠에 부처가
백척간두 칼날 위에 법당이
아, 불타는 집에는 경전이
2004년 8월 23일
노무현으로 읽는 예수
- 백무산의 시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영전에 드린다'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건 프로 정치가 아니야, 바보야
진보란 그런 게 아니야!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건 사이비 민주주의야, 바보야
애국은 그런 게 아니야!
아, 우리가 당신을 버렸습니다
말뿐이던 우리가 텅텅 빈 우리가
허세뿐이던 우리가 당신 손을 뿌리쳤습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열 번 스무 번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돌아서니
난데없는 철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벼랑에 떠밀고 내려다보니
바위 벼랑 아래 처박힌 피투성이 얼굴은
우리의 얼굴이었습니다
운명이었습니다
아, 운명이었습니다
운명은 첫 순간에 종말을 결정해 버렸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권력자는 뜨거운 정의의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순결한 영혼을 동경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권력과 순결한 영혼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려는 짓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높이 세우려는 짓 따위에 열정을 품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권력자가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거부함으로써 운명의 비극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내의
외침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나의 패배가 여러분의 승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피에 굶주린 자들에게 당신을 먹이로 던지고
피의 잔을 나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 슬픈 선지자의 꿈이여!
당신은 정치가가 아니었습니다
아, 살아서 훌훌 벗어버리고 싶었던 사람이여
다 벗고 인간만 남기고자 했던 사람이여
정치도 벗고 권력도 벗고 모든 권위도 벗고
오직 벌거숭이 인간만 남기려 했던 사람이여
차별 없는 인간만 남겨 조건 없는 사랑을 꿈꾸었던 사람이여
당신의 눈물이 우리들 가슴에 강물처럼 일렁입니다
당신의 눈물이 검은 아스팔트 위에 붉게 출렁입니다
(백무산·시인, 1955-)
여공일기
최명학
하나님 보러 갈 짬이 없어요
새벽별 보며 일터에 가고
어스름 등에 지고 돌아오는 나날
조출 잔업 특근 철야 그물에 갇혀
일에 쫒기다 바라본 창밖
새까만 연기 하늘을 가려
닫힌 하늘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고
하나님 보러 갈 짬이 없어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시인 詩 몇 편 (0) | 2011.01.07 |
---|---|
신경림 시 모음 (0) | 2011.01.06 |
곽재구 '나 살던 고향'(정태춘 노래) 外 (0) | 2011.01.06 |
김경미, 나희덕, 최승자 (0) | 2011.01.06 |
정태춘 / 보리피리 (0) | 2011.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