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5. 12:40ㆍ詩.
늑대야 늑대야
허홍구
남자는 모두 도둑놈, 늑대라며
늘 경계를 하던 동창생 권여사로부터
느닷없이 소주 한잔 하자는 전화가 왔다
"어이 권여사 이젠 늑대가 안 무섭다 이거지"
"흥 이빨 빠진 늑대는 이미 늑대가 아니라던데"
"누가 이빨이 빠져 아직 나는 늑대야"
"늑대라 해도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이제 먹이감이 되지 못하거든"
이제는 더 이상 먹이감이 되지 못해
늑대가 무섭지 않다는 권여사와
아직도 늑대라며 큰소리치던 내가
늦은 밤까지 거나하게 취했지만
우리 아무런 사고 없이 헤어졌다
그날 권 여사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아- 나는 아직도 늑대가 분명하다
무서운 일
허홍구
쌔임(선생님)요
/ 와 (왜)
결혼하면 마누라하고 꼭 같이 자야합니꺼?
/ 빌어먹을 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놈아 !
와, 같이 자는 게 싫은 기가 아니면 겁이 나나
그 기 아니고요
피곤할 때는 혼자 자는 게 훨씬 편한데....
그리고 여름엔 디기 더울텐데
/ 미친놈, 잠만 잘라고 결혼하나
그래, 니 말이 맞다
나도 오십이 훨씬 넘어서야 알게된 일이지만
자기 싫을 때도 같이 자야하는 결혼이라면
오ㅡ 그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무섭다
허홍구
미친 사람이
칼 들고 있으면 무섭다
무식한 사람이
돈많은 것도 무섭고
권력을 잡으면 더 무섭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실력 있고 잘난 사람들 중에
사람이 아닌 사람은 더 무섭다
참 무섭다
언제나 웃고 있는
너그러워 보이는 탈을 벗기면
흉악한 얼굴들이 보인다
언뜻 언뜻 나의 얼굴도 보인다
몸서리치게 무섭다
부음을 받고
- 먼저 간 인월스님에게
이른 봄날
눈부시던 목련은 기별도 없이 가고
내 동갑내기 스님 인월은
무거운 몸뚱이 벗어놓고
급히 떠났다는 전갈이다
분별없는 중이 되겠다며
깎은 머리도 기르고
작업복에 땀을 흘리고
때로는 세상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하더니
남아있는 몸뚱어리와
땅 바닥에 내려앉은 꽃은
그 흔적을 지우며
묵언법문중이다
내 몸이 곧 나인 줄 알았다가
그것마저 내 것이 아닌 줄 알겠네
모두 다 홀랑 벗어 던지고
가볍게 떠나야 할 때
나는 어찌 꽃잎으로 갈까
뭐가 이렇노
허홍구
독립 유공자 후손 잘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매국노 후손 못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양심적인 사람 잘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허가 난 도둑 못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나라 팔아먹은 부정부패의 원흉 못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씨이팔 뭐가 이렇노
소설가 송일호 씨와 술을 마시다가 나눈 얘기다
술로 속을 씻어 뱉어낸다
10년 묵은 대장장애가 일시에 없어졌다
참 시원타
사람의 밥이 되어
허홍구
하루가 전부인
하루살이의 일생도
길바닥에 떨어져 밟히는 나무 이파리도
결코 가벼운 목숨이 아니오니
나, 작은 한 톨의 쌀로
이 세상 몸 받아 올 때
하늘과 땅, 밤과 낮
비바람이 있어야 했다
쌀 한 톨이 나를 키울 때,
농부의 손마디가 굵어지고
허리가 휘었다
작은 이 몸
이제 사람의 밥이 되어
나를 바치오니
부디 함부로 하지 말게 하소서
봄
허홍구
꽃망울 터지는 봄날
"선생님은 참 재밌고 젊어 보여요."
내 팔에 매달리는 꽃이 있다
스물 한 살 젊디젊은 여인
묵은 가지 겨드랑이 가렵더니 새 순 돋는다.
아무래도 이번 봄에는 꽃밭에 넘어 질 것 같다
꼭, 넘어 질 것 같다
바람둥이 남자 / 허홍구 (수필)
세월이 유수(流水) 같다는 말은
나이가 들고 보니
젊은 시절이 물 흐르듯 쉼 없이 빨리 흘러갔다는 뜻 아닌가?
내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지만
나이가 60에 이르고 보니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이다.
세상이 바뀌어 이 나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현역에서 물러나 있지만
나는 아직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
누구는 이 나이가 되면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있거나
분에 넘치는 여러 개의 감투도 갖고 있던데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이름 앞에 감초처럼 붙어 다니는 형용사가 있다.
물론 시인이나 수필가 혹은 홍보국장과 같은 것들이
간혹 이름 앞이나 뒤에 붙여서 불러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듣지 않는 곳에서 저희들끼리는
내 이름자 앞에 바람둥이란 형용사가 자주 붙어 다니는 모양이다.
하기야 내가 쉰 살 전에 며느리를 보고 손녀를 봤으니
옛날 우리가 흔히 했던 말로 일찍 까진 셈이다.
철없는 나이에 여학생과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일찍 장가를 보낸 것이겠지만
부모님의 속을 얼마나 태웠을까.
요즘 같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오래 전부터 내려온 도덕의 규범에 스스로 묶이고 만 것이다.
아버님의 엄중한 문책과 지시는 거역 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사나이가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간단한 이 말씀 한마디가
한창 공부해야 할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니 그때부터 주변에서는 나를 바람둥이로 불렀는지 모른다.
군대생활 3년 동안도 혼자 군가를 못 부르고
무리 속에 끼어 입으로만 흉내 내는 지독한 음치에다가
디스코나 사교춤은 더 더욱 할 줄도 모르고
신세대들이 말하는 몸짱도 아니고
여유를 부릴 만큼의 시간과 경제력도 없는 그저 그런 내가
전국적으로 소문난 바람둥이란 별명을 가졌으니
가히 놀라운 일 아닌가?
그러나 생각 해 보니 (물론 혼자 생각이지만)
나만큼 여자를 좋아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물론 총각 시절에
이쁘고 사랑하는 여학생을 두고도 함부로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손도 한번 잡지 못하고 아끼고 점잔을 빼다가
결국 그녀는 적극적인 친구의 부인이 되어버렸고
아들이 셋이나 있을 때인데도 남의 집 유부녀의 멋스러움에 빠져서
맘 변치 않고 평생을 살 수만 있다면 한 3년은 감옥도 갔다 올 수 있을 거라고 맘을 먹었으니
기가 찰 노릇 아니었는가?
지금도 전철을 타고 가다가 마주앉은 중년여인의 고운 잔주름과 잔잔한 눈 그늘 속에서
혼자 휴식을 취한다고 하면 남들이 믿어 줄는지?
죽은 듯이 있다는 말은 숨죽이고 있다는 뜻이지만
바람은 살아 있다는 몸짓이 아닌가?
내 이름 앞에 붙은 바람둥이란 말은
펄펄 살아 움직이는 사나이란 뜻이다.
가까이 지내는 어느 여류수필가는 나를 두고
“바람둥이 예찬” 이라는 글을 적어야겠다고 까지 했으니
굳이 부끄러워 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 생각만 해도 찌르르한 전류가 흐르고, 위로가 되고, *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분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조용한 가운데 좀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여인
* 무작정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허물어지게 하는게 아니라
깨어 있게 할 줄 아는 센스 있는 여자
* 상처를 입은 듯 연약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면서도 완강함이 비치고
쓰라린 과거를 가졌지만 은은한 미소 속에
오늘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살아가는 그런 기막힌 감각을 가진 여자
를 나는 오래 전부터 혼자 가슴에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이의 눈빛 속으로 발목 적시며 들어가 보면
조약돌 같은 사연을 읽어 낼 수가 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잘난 체 하지 않고 그 외롭고 쓸쓸한 자리에 함께 퍼질러 앉아 보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사랑 받게 될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시인 권천학의 시(詩) “시인 허홍구를 말하다” 를 덧붙이며
바람둥이 허홍구의 바람은 살아 있을 때까지
쉬지 않는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 할 것이다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 / 허홍구
마흔아홉에 며느리를 보고 쉰 살에 손녀를 봤으니 나는 어쩌다 젊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일찍 결혼한 탓인지 몸집이 좀 커보여서 그런지, 아니면 바람 탓인지는 모르되
나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가 실제의 나이보다 네댓 살은 더 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전철을 타고 가다보면 가끔은 대학생들의 자리를 양보 받기도 하는 처지이고 보면
남들이 보기에도 젊지 않은 것만큼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점잖아지는 게 아니라
힘이 빠지고 나면 저절로 점잖아지는 법이라 했었는데,
나의 가슴은 아직도 이토록 뜨겁고
어느 장소에 있든 멋있는 여인을 만나면 무슨 명화라도 감상하듯이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시키기도 하고,
중년 여인의 그윽한 눈 그늘에서는 잠시 휴식을 취해 보기도 하는 판이니
보기에는 점잖아 보여도 실은 점잖은 게 아니라 큰 일 날 듯하다.
'점잖다'는 말은 혹 젊지 않다는 뜻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도 힘이 넘치면 점잖지 않다는 뜻으로 주책이라는 말을 곧잘 듣게 되는 것이다.
도덕을 강조하고 예의를 숭상하는 우리네 사회에
또 할아버지가 된 내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당찮은 얘기라서 남들은 미친놈이라 욕할는지는 몰라도
실은 없는 듯 하면서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내 가슴 가득한 비밀 사랑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오고 위로가 되며,
외롭고 쓸쓸할 땐 아무도 모르게 둘만이 만날 수 있는 집,
그 외진 골목길 끝 불 밝힌 창문 안에 둘만이 가질 수 있는 숨막히는 암호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몸을 함께 하지 않아도 식어 가는 가슴에 불을 지피게 하고
생각만 해도 가슴 가득한 위안과 평안한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그런 여인 하나
가슴에 꼭꼭 숨겨 두고 싶다.
때로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어 허물어지고 싶은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그런 연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늙음이 주책으로 보여도 식지 않은 가슴으로 있게 해 준 여인,
남 몰래 찾아가서 석양지는 창가에 앉아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마주하고 싶은 여자,
일상의 업무에 지치고 피곤할 때 어깨를 대기도 하고
무릎 베고 누웠다가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은 여자,
남들이 유혹을 해도 굳은 지조로 살았지만 나를 허물어지도록 할 줄 아는 야한 여자,
그러나 무작정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허물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깨어 있게 할 줄 아는 센스 있는 여자를 가슴속에 간직해 두고 싶다.
오스카 와일드는 '남자는 과거를 가진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미래를 가진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나도 밝고 예쁘고 명랑하고 곱기만 한 여인보다도
언뜻언뜻 스치는 쓸쓸함이 있어 보이고 우수에 젖은 듯한
그리고 은은한 미소 저편에 나만이 알 듯한 과거를 가진 여자를 나는 좋아한다.
나는 멋없고 무드 없는 남자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무드는 저절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여자의 빛나는 센스에서 연출되는 것이다.
센스있는 여자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포근한 가슴과 예절바름 속에 싱싱한 대화가 넘친다.
초생달 같기도 하고, 한여름 밤의 수박향기 같은 여자,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분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고,
조용한 가운데 좀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여자,
어쩌면 나는 그런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상처를 입은 듯 연약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면서도 완강함이 비치고,
쓰라린 과거를 가졌지만 은은한 미소 속에 오늘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살아가는
그런 기막힌 감각을 가진 여자를 내 가슴 은밀한 곳에 묻어두고 싶다.
문전옥답을 두고도 굳이 골짝 가시덤불 속을 찾아가는 것은
거기에 은밀한 나만의 보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은밀한 곳으로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끝내 허망하고 아픔이 되어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둔 연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하루 종일 전류를 흐르게 하고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가슴속에 대못 같은 응어리를 용해시키고 뽑아줄 수 있는 뜨겁고 보드랍고 연한 여자를 가슴에 그리며 산다.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바람으로 쓰러져도 살아있는 날까지 불꽃이이고 싶다.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남아 있음은
내 가슴속에 그리는 연인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