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4. 18:48ㆍ詩.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 굽이 돌아가
백무선白戊線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세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은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에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북(北)쪽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아므을만(灣) : 흑룡강 하류의 아무르 지역.
* 니코리스크 : 시베리아 하구의 항구 도시 니콜라에프스크를 가리킴.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무곡(貿穀) : 장사하려고 많은 곡식을 사들임.
* 둥글소 : 황소.
* 싸리말 : 싸리비. 함경도에선 아이들이 이것을 말 삼아 타고 놂.
* 짓두광주리 : 바느질고리의 함경도 방언.
* 저릎등 : 겨릅등의 함경도 방언. 긴 삼대를 태워 불을 밝히는 장치.
*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승(住持僧). 옛날에는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이 갓주지 이야기를 했다고 함.
*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를 베고 남은 밑둥.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 강원도치 : 강원도 사람.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는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경도 방언.
전라도 가시내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호개 : 호가(胡歌), 호인(胡人)들의 노랫소리
* 눈포래 : 눈보라.
* 불술기 : 불수레, 즉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