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모든 것 (펌)

2010. 11. 1. 20:00미술/한국화 옛그림

 

 

 

 

 

김홍도 자화상 (金弘道 . 1745~ ?) 

 

 

 

 

 

  

                                                  김홍도가 젊었을 20대 시절에 그린 자화상이다.

일제시대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었으나, 그 후 원인과 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北韓으로 건너 갔다.

현재 평양의 조선 미술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물론 이를 부인하는 의견도 있다.

 

 

 

 

 

 

 

 

김홍도가 40세 되던 1784년에 그린 "단원도"에 나오는 자화상으로,

거문고를 켜고 있는 사람이 김홍도이다.

자신의 집에서 진솔회(眞率會)라는 모임에 참석한 정란(鄭瀾)과 강희언(姜熙彦)과 함께

詩를 읊고 감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본관은 김해, 字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이다.

김홍도는 1745년(영조21)에 한양에서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외가는 대대로 도화서 화원을 배출한 집안이었기에 외조부와 외숙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 경기도 안산에 칩거 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평론가이었던 스승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은 인물,화조,사군자 등 모두 능숙한 김홍도를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하였으며,

20대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1년에 왕세손(후일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正祖를 그렸다.

안산에서의 이러한 인연으로 지금의 안산시 단원구의 유래가 되었다.

 

 

 

 

 

 

이름과 號의 뜻

 

 

홍도(弘道)는 해석하면 "도를 넓힌다"라는 뜻으로

논어의 글 "사람이 능히 道를 크게 하지, 道가 사람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字, 능(士能)은 맹자의 글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서만

가능하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에서 유래한 것으로

물질에 좌우되지 않는 참다운 선비, 즉 뛰어난 인격자가 되라는 의미이다. 

 

단원(檀園)은 명나라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1575~1629)"의 고상한 인품을 사모하여 그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김홍도는 老年에 들어 단노(檀老),단옹(檀翁)이라고 응용하여 사용하였다.

서호(西湖)는 김홍도 초년 시절의 號로 중국의 아름다운 호수로,그가 살았던 지금이 용산,마포,밤섬 주변을

칭하였다.  

 

고면거사(高眠居士)라는 호는 "베개를 높이하고 편히 자는 거사,

취화사(醉畵史)는 술 취한 환쟁이, 첩취옹(輒醉翁)이란 호는 곧 취하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노년에는 단구(丹邱) 또는 단구(丹丘)라는 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선인이 머물며, 밤낮으로 늘 밝은 곳"이라는 뜻이며,

그 밖에 농한(農漢 ..농사 짓는 사내), 농사옹(農社翁 ..농사 짓는 늙은이), 대우암(對右菴 ..존중함을 마주 한다),

오수당(午睡堂 ..낮잠을 즐기는 집) 등을 사용하였다.

 

 

 

1788년 스승 김응환(金應煥)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地圖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홀로 對馬島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金弘道 士能章

 

 

 

1790년 용주사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撑畵)"를 그렸고,

1795년(정조12)에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나라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 인물화, 신선화, 불화, 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산수화는 사실(寫實)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주었다.  

 

또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활 정서와 農, 工, 商 등의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 모습을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과감히 시도하였는데,

색채의 濃淡과 明暗으로써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나타낸, 이른바 훈염기법(暈染技법)이 그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작품이 500점이 넘는다. 

 

 

 

 

 

 

                김홍도의 외모와 재주에 대한 기록들

 

조희룡(趙熙龍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는 그의 저서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단원에 대하여 "그는 풍도가 아름다워 기상이 크고 특출하며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선 중의 하나라고 지목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는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홍도는 그림에 솜씨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지가 오래되었다.

삼십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에게 시켜 주관케 하였다.

화원은 관례로 새해 초에 첩화(帖畵)를 그려 바치는 규정이 있다.

금년에 홍도는 물헌(勿軒) 웅화(熊禾)가 주(註)를 붙인 朱子의 詩로 여덟 폭 병풍를 그렸는데,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

이미 김홍도가 하폭에 원운시(原韻詩)를 썼으므로, 나는 그에 더하여 화운시(話韻詩)를 썼는데,

눈 여겨 보고 감계(鑑戒)의 자료로 삼을 뿐이다 "

 

 

 

 

김홍도의 활동시기는 특히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영조 말년과 그 재위 중인 24년이 중심이 된다.

특히 김홍도는 정조가 도화서 화원 30명 가운데 우수한 10명 정도를 선발하여 우대하면서 운영했던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제(差備待令畵員制)에서 조차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시 김홍도는 퇴고의 화원으로 특별한 지위에 있어

굳이 자비대령화원 녹취재(祿取材)에서 다른 화원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 김홍도는 소금장수로 돈 많이 번 김한태에게 그림을 그려 주는 대가로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김홍도가 살던 집으로 지금의 마포구에 있었다.

김홍도는 호(號)를 단원(檀園)이라 하였지만 역시 그가 살던 집의 이름도 "단원"이라 지었다.

그래서 그림의 제목도 "단원도(檀園도)"인 것이다. 

김홍도는 단원(檀園)이라는 이름에 애착을 가져는데,

단원의 유래는 명나라 문인화가인 " 단원 이유방(1575~1629) "의 고상한 인품과 그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의 號를 그대로 따 온 것이다.

김홍도는 老年에 들어 단노(檀老), 단옹(檀翁)으로 응용하여 사용하였다. 

 

이 그림은 그가 40세가 되던 1784년 그린 그림으로 종이바탕에 수묵담채이며, 크기는 78.5cm x 135.3cm이다.

화면의 상단에 김홍도의 자제(自題)에 의하여 1781년 청명절(淸明節)에 자신의 집에서

정란(鄭瀾), 강희언(姜熙彦)과 함께 가졌던 진솔회(眞率會)의 모임을 회상하며,

1784년 섣달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세 사람의 모임은 김홍도의 집 동쪽 끝에 붙어있는 들마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거문고를 타고 있는 사람이 김홍도(金弘道) 자신이고,

그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詩를 읊고 있는 긴 수염의 인물이 정란(鄭瀾)이며,

그 뒤에서 둥근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앉아 이를 감상하고 있는 사람이 강희언(姜熙彦)이다.

 

 

 

 

               

                     강희언을 모시고 왔던 종이 문밖에서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다. 

 

 

 

 

 

 

 

  

 

마루 위에 놓여있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술병을 비롯하여 방안의 서탁과

공작꼬리가 꼽혀있는 백자병, 벽에 걸린 비파, .... ,

이 집의 운치를 높이고 있는 후원 주변의 오동나무, 버드나무, 연못, 종려나무, 괴석, 석상,

기르고 있는 학(鶴) 등에서 김홍도가 일상적으로 누렸던 풍류생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화면을 깔끔하게 이끌고 있는 필치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적인 사용, 석법(石法)과 오동나무의 묘사법,

잡목들에 구사된 짙은 먹색이 그림 전체에 액센트 구실을 하는 기법 등은

40대 이후에 심화되는 그의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40세를 맞이하며 그렸던 이 그림은 그의 생활모습과 함께 畵風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단원유묵첩 檀園遺墨帖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은 김홍도가 48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외아들 김양기(金良驥 ..

그도 역시 畵員이 되었다)가 1818년 3월에 아버지 김홍도의 시문(詩文)을 모아 서첩으로 꾸민 것이다.

"不 肖 男 良 驥 謹 裝 (불초 못난 아들 양기(良驥)가 삼가 꾸몄습니다.)"

 

 

 

 

 

 

단원유묵첩에는 김홍도의 당호로 추정되는 "오수당(午睡堂)" 글씨를 시작으로

해서 행서와 해서로 쓴 크고 작은 글씨들로 채워져 있다.

최치원과 이유겸 그리고 중국 명사들의 글을 옮긴 것, 아들과 지인에게 쓴 간찰(簡札)도 포함되어 있다.

 

 

 

 

 

                                            김홍도 친필 .. 낮잠을 즐기는 집

 

 

 

이 책은 김홍도의 個人史는 물론 그의 인간미와 생활상, 서예 기량 등을 전해주는 매우 의의가 큰 작품이다.

이 책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최순우가 덕수궁미술관(舊,李王家美術館)에서 발견한 것으로,

1914년 미술관측이 당시 돈 15원을 주고 일본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모두 40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지에는 "불초남양기근장(不肖男良驥謹裝 ..못난 아들 양기가 삼가 꾸몄습니다)"는 내용이 적혀있고,

홍석주, 신위 등의 서문과 발문이 앞뒤에  첨부되어 있는데,

내용는 김홍도의 그림과 글씨에 대한 상찬(賞讚)과 아버지의 서첩을 꾸민 아들에 대한 칭찬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출생년대가 밝혀지다

김홍도만큼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화가가 또 있을까?

하지만 김홍도는 많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죽은 해는 1806년 이후로 추정될 뿐, 아직까지 정확히 알 수 없고,

태어난 해가 1745년으로 확실해 진 것도 불과 40년 전에 밝혀졌다.

그 근거는 ....

 

 

 

 

 

 

 

단원유묵첩에 실린 김홍도의 글씨(위 사진)가 있는데...

이는 김홍도가 명말청초 서예가인 왕탁(王鐸)의 편지를 6쪽에 걸쳐 옮겨 적은 후

 "을축년(1805년), 회갑되는 해 정월 22일 아침 우연히 써 연록(延祿 ..아들 김양기의 별칭)에게 준다"는

기록이 있어, 회갑 되던 해에서 역산하여 그의 출생년도가 1745년으로 확인된 것이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日寒如此家中都得安過 而汝之課讀如一否

                        吾之病狀內簡書中己悉矣不須更言耳

                        汝之師丈宅朔錢未能覓送可歎歎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같으냐?

               나의 병 증세는 내간서에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말 할 필요가 없으리라

               너의 선생님댁에 보내는 학비를 보낼 수 없어 마음이 한탄스럽다 

이 서첩에 실려있는, 김홍도가 아들 김양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인데,

병도 깊었고, 아들의 학비도 모내주지 못할만큼 그의 말년은 쓸쓸하고, 경제적으로도 빈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의 詩 

 

               문장이 세상을 놀라게 한들 다만 누가 될 뿐이오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역시 그저 수고로울뿐

                      어찌 산창의 고요한 밤에

                      향 피우고 말없이 앉아 솔바람에 귀기울임만 하리오

 

                      옛 먹을 가볍게 가니 책상 가득히 향내 나고

                      벼루 골에 물 부으니 얼굴이 비치도다

 

                      산새가 날마다 오니 기약있어서가 아니요

                      들꽃은 심지 않았어도 절로 향을 내는구나

 

                      단원 늙은이

                      문뜩 찬 매화나무를 보니 한수 강변에 꽃을 피웠네

                      봄색 이른 줄 알지 못했더니 구슬 희롱하는 미인과 같네

 

 

 

 

 

            산거만음  山居만吟  산에 살며 생각나는대로  읊다 

 

                  文章驚世徒爲累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들 허물이 될 뿐이오

                  富貴薰天亦饅勞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역시 괜한 수고일 뿐이네

                  何似山窓岑寂夜   어찌 같겠느냐. 산창에서 고요한 밤에

                  焚香默座廳松濤   향 피우고 고요히 앉아 솔바람 소리 듣느니만 못하네

                                

  

   

 

 

김홍도는 정조의 명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 후불탱화를 그린 이듬해에는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功을 인정받아 벼슬직을 하사받는데, 충청도 연풍지역의 현감이라는 직책이었다.

도화서 화원으로는 흔치않은 높은 직책에 오른 김홍도..

화원이 아닌 행정관료로서의 김홍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1791년 12월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연풍현청 건물 .. 豊樂軒

 

 

 

연풍현감(延豊縣監) .. 中人 신분으로는 오를 수 있는 최고직책인 정6품 벼슬직에 오른 것이다.

延豊은 충북 괴산군에 속한 작은 산골마을이다.

당시의 가구 수는 1,100호, 인구는 약 3,200명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김홍도가 현감으로 부임한 그해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극심하였다.

이때 김홍도는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현청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고 죽을 끓여 나눠먹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김홍도의 선행은 "일성록(日省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연풍현감 김홍도는 재해에도 나라의 곡식에 의존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 후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김홍도는 조령산 중턱에 있는 상암사(上庵寺)라는 절을 찾았다.

그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자식을 갖게 해 달라는 개인적 소원도 빌었다.

기도 덕분인지 김홍도는 연풍에 와서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후 그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후에 탄핵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상암사 중수기(上庵寺 重修記)의 기록에...

 

  

                       김홍도가 祈雨祭를 위해 암자에 올랐다가...

                        늙도록 아이가 없더니 이 산에서 빌어 아들을 얻었다.  

  

그의 나이 48세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은 훗날 아버지의 따라 화원이 된 김양기(金良驥)는 아버지의 詩文을 모아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을 만들었다.

단원은 연풍에서도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이 시기에 단원은 인근 단양의 사인암도, 옥순봉도, 도담삼봉도 등의 그림을 남겼다.

 

 

                  김홍도의 탄핵 

그런데 부임 3년째 되던 해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충청위유사(忠淸慰諭사), 홍대협(洪大協)이 단원 김홍도의 실정(失政)에 대하여 상소를 놀린 것이다.

그 탄핵사유는...

  

                 김홍도는 고을의 수장인 몸으로 즐겨 중매(仲媒)나 행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하며, 사냥이나 즐겨하여 원망과 비방이 자자합니다. (정조19년) 

 

사실 탄핵의 사유가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백성을 위하여 중매를 섰으며, 사냥 안 하는 현감이 얼마나 되겠는가?

상납의 건은 잘 모르겠다.

아마 中人 출신임에도 正祖의 총애를 받아 현감이라는 벼슬에 오른는 것을 못마땅해 한 사대부들의 편견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어쨋든 김홍도는 연풍현감직에서 파직되고, 곧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정조는 아직 잡지 못한 죄인은 사면하라는 지시를 내려 김홍도를 구제하여 주었다.

이롷득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총애와 신뢰는 한결같았다.

하여튼 기록이 충분치 않아 확실치는 아니하지만 김홍도의 목민관으로서의 활동은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正祖는 김홍도를 다시 궁으로 불러 들였고,

도화서 화원으로 복귀한 김홍도는 그 해 왕실의 최대 행사를 기록하는 총책임을 맡게 된다.

당시 정조는 수원 화성의 준공을 앞두고 왕실의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는 正祖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 자신이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었던 것이다.

이로서 김홍도는 우리에게 여러 훌륭한 기록화들을 남겨주게 되는 것이다. 

 

 

 

 

               김홍도의 쓸쓸한 末年                              

    

正祖의 무한한 신뢰를 받으며 활동하던 김홍도의 황금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1800년, 正祖가 49세의 나이로 돌연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규장각을 이끌던 많은 개혁파들이 힘을 잃었고, 그들 속에는 김홍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가 즉위한다.

김홍도는 비롯 힘은 잃었지만 규장각 화원으로서 다시 도화서에 들어가기 위하여

1804년 나이 어린 사람들과 함께 시험을 치루는 수모를 겪었고, 이듬해 신병으로 그만 두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추선부도"를 그리며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正祖라는 거대한 날개를 잃은 김홍도는 초야에 묻혀 말년을 보낸다.

그 쓸쓸한 생활 속에서도 위로가돼준 것은 그림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듯한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에는

"종이창에 흙벽 바르고 이 몸 다할 때까지 벼슬없이 詩歌나 읊조린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담은 화제(畵題)가 적혀있다.

 

 

 

 

                                                         布 衣 風 流 圖

 

 

 

그가 말년에 그린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나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를 보면

세속과 담을 쌓은 듯한 초탈한 심정이 잘 드러난다.

당시 김홍도는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궁핍하였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등장할 정도이었다. 

 

 

                 녹아에게 

                 날씨가 차가운데 집안은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같으냐?

                      너의 선생님에게 보내는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김홍도가 언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늦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그린 추성부도(秋聲賦圖 ..아래 그림 참조),

노년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처눕적인 재능을 타고난 불세출의 화가.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조선역사 500년을 통틀어 가장 태평성대하고,

예술활동이 활발했던 문예 부흥기이었다. 

 

시대의 요청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그것도 기존의 화법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한 김홍도의 그림 속에는

그가 실았던 세상의 태평한 기상과 문화를 존중하던 그 시대의 자긍심이 들어 잇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지금, 김홍도가 남긴 다양한 그림들은 그 어떤 史料나 기록보다 지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窓이 되고 있다.

 

 

 

 

                                              말년의 작품들

 

 

 

 

 

 

 

 

 

 

 

 

 

  

  

 

 

 

 

 

  

김홍도는 1745년에 출생하여, 1771년에 왕세손 이산(후일 正祖)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부터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된 김홍도는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그려 바쳤고,

1781년에는 또 한 번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正祖는 김홍도의 풍속화를 즐겨보며 바깥 세상을 보았고, 1788년에는 금강산의 산수화를,

1789년에는 일본지도를 그려오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어느 학자는 세계 3대  초상화가로 불리는 일본의 도슈사이 시라꾸가 김홍도라는

假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794년 통신사 두절로 일본 내 사정이 궁금해진 正祖가 당시 연풍현감으로 있던 김홍도를 일본에 밀사로

파견하였고, 그렇게 일본으로 간 김홍도가 시라쿠(寫樂 .. 그림을 그림으로써 행복하다)란 별명으로

활동했다는 것인데, 이는 가설일 뿐이다.

그에 대한 반론도 명확하다고 하니, 그저 정조와 김홍도의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 정도라 여기면 될 것이다.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오래 되었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畵事에 속한 일은 모두 弘道로서 주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正祖는다시 그를 궁으로 불러 그 해 왕실의 최대 행사를 기록하는 총책임을 맡기게 된다.

1795년 2월9일부터 8일간 이루어진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능행반차도(陵行班次圖)" 또한 김홍도의 손길이 미쳤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화성(華城)의 건설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도 김홍도의 몫이었다.  

 

                                                                     

 

 

 

 

           김홍도의 스승 .. 표암 강세황 

 

표암 강세황 (豹菴 姜世晃  1713~1791) ..

그는 正祖시절, 詩,書,畵,評에 모두 능하여 당시 예술계를 주름잡았지만,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김홍도의 예술혼을 탄생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老年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예원(藝苑)에 머물며 書畵에 매진하였다.

 

 

 

그는 3남6녀의 남매 중에서도 부친이 64세에 얻은 막내로서 갖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늦둥이이었다.

그래서 유달리 밝고 해학적인 성품을 지녔으니, 그의 제자인 김홍도 역시 농담과 해학에 능하였고,

詩書畵樂에 이르는 여러 교양을 섭렵한 것도 모두 스승으로부터 온 내력이었다.

 

 

 

 

 

 

 

 

아래 그림 역시 작자 미상의 강세황 초상화인데..

위 아래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작자 미상의 아래 그림은 머리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상반신은 흉배 붙인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각대(角帶)를 둘렀으니 이는 예를 모두 갖춘 조선의 관복이었다.

그러나 위의 강세황이 직접 그리고 찬문(贊文)을 붙인 자화상은 그저 평복에 오사모(烏紗帽)만을 썼으니,

요즘 표현으로 신사복 정장에 운동모자를 쓴 정반대의 모습이다. 

강세황은 조선시대의 화가로는 매우 드물게 모두 5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의 실수이었을까? 그의 장난이고 해학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스스로 쓴 윗부분의 찬문(贊文) 내용을 보면 그 연유를 알 수 있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

                               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

 

                               가슴에는 수천권의 책을 읽은 학문을 품었고

                               감춘 손에는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

                               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

 

                               자기 초상 자기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

                               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작자 미상의 강세황 초상화

 

 

 

 

 

 

       단원기(檀園記) .. 스승이 본 제자

   

평론가이기도 하였던 스승 강세황이 최상의 평가를 보낸 작가는 경기도 안산에서 인연을 맺은 제자 김홍도이었다.

강세황이 김홍도의 그림에 화평(畵評)을 쓴 작품은 그들의 관계를 말해주듯 숫적으로도 압도적이어

현재 확인된 것만 해도 20여폭이 넘는다. 

 

시기적으로는 강세황의 나이 65세(김홍도의 나이 33세)부터 70세(김홍도 38세) 사이에 집중되며,

강세황이 마지막 76세(김홍도 46세)에 쓴 작품까지 있다.

김홍도와의 관계는 김홍도가 부탁하여 쓴 단원기(檀園記)에 일목요연하게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는 사능(士能 ..김홍도의 號)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였고,

그에게 그림(畵訣)을 기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에는 같은 관청에 같이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함께 지냈고,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藝林)에 있으면서 지기(知己)다운 느낌을 가졌다.  

 

  

 

 

 

 

 

                                                                     

 

 신언인도  愼言人圖

 

 이 그림은 전해져 오는 김홍도의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김홍도(단원)이 29세 되던 1773년에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畵題를 쓰고,

단원이 그림을 그려 정범조(丁範祖)에게 준 그림이다.

그림의 주제는 옛날 말을 삼가한 인물에 대한 것으로,

그림도 그림이지만 스승 강세황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畵題와 그 의미가 심장하다.

 ( 크기  114,8 × 57.6 cm)

 

 此古之愼言人也  戒之哉無多言  多言多敗  無多事  多事多患

                       安樂必戒  無行所悔 勿謂何傷  其禍將大  勿謂何害 其禍將大 

 

이는 옛적에 말을 삼가한 사람이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일을 많이 벌이지 말라. 일이 많으면 우환이 많다.

안락하면 반드시 경계하라.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

무슨 다칠 일이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그 禍가 장차 오래 가리라.

무슨 害가 있으랴고 말하지 말라. 그 화가 장차 크리라.

 

 

 

                                              

 

 

 

             군선도  群仙圖 .. 국보 제139호

이 군선도(群仙圖)는 단원 김홍도가 32세인 1776년에 그린 그림이다.

늙지 않고 오래 살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 마음 먹은대로 신통력을 부리며 사는 神仙과

神仙化된 실존인물을 그린 그림인데,

3,000년만에 한번 꽃이 피고, 다시 3,000년만에 결실을 보는 천도복숭아(蟠桃)가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집에 천도복숭아가 익었다고 하자,

신선들이 약수(弱水)의 파도를 건너 초대되어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천도복숭아 한 개를 먹으면 일천갑자(60,000세)를 산다고 한다.

 

 

 

 

 

 

 

 

 

 

 

 

 

 

                                                        

 

 

 사인암도舍人岩圖.. 보물 제782호

 

 

 

 

 

 

 

 단원의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들어있는 산수화 10폭 중에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화)가 몇 폭있는데,

그 중에는 도담삼봉(島潭三峰), 사인암(舍人岩), 옥순봉(玉珣峰) 등 단양(丹陽)의 절경을 그린 그림이 있다.

 

 

 

 

 

                                                   도담삼봉

 

 

 

 

                                                  옥순봉 

 

   

 

병진년(1796년) 무렵의 단원의 산수화는

實景에 입각했으면서도 실경을 넘어서 회화적인 재구성으로 관념산수(觀念山水)의 경지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이 사인암도 역시 실경과는 사뭇 거리가 있지만,

우람하고 장대한 병풍같은 절벽바위의 위용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압벽은 종횡으로 그은 선으로 바위주름을 나타내고,

여기에 濃淡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前後와 요철을 그러내고,

또한 농담이 있는 태미점(苔米點)으로 운치를 더 하고 있다.

화면 아래쪽 강변의 돌무더기와 수목들 그리고 사인암 정상의 나무 등도 단원 산수에 나오는 정형으로

농담을 구사하여 전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소나무 표현 역시 예리하고, 濃墨과 淡墨으로 잔가지와 잎을 나타내어 단원 소나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자색(紫色)의 수직벽에 가로, 세로로 불규칙한 절리(節理)가 비구상(非具像)의 화폭을 펼쳐

노송을 멋지게 그려냈다.

그리고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솟아 오른 절벽이 남조천에 반영되어 한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전해 오는 단원의 마지막 작품

 

 

 

 

 

 

 

이 그림은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저명한 문필가 구양수의 글 "추성부(秋聲부)"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가을 밤에 책을 읽다가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며

자연의 영속성과 인간 삶의 덧없음을 노래한 걸작이다. 

이는 김홍도의 불우했던 晩年의 삶과 연관시켜 작품에 처연한 분위기를 더 하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 집에 조용히 앉아있는 구양수의 모습은 김홍도의 末年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이에 그린  水墨淡彩畵로 크기는 56.0 X 210.4cm이다.   

 

 

 

 

 

 

 

 

  

김홍도의 이 작품은 집 안에 구양수가 조용히 앉아있고, 童子가 하늘을 가리키는 몸짓하는 순간을 포착하였다.

화면에는 메마른 가을 산이 그려져 있고, 산 능선 위로는 수평 방향의 갈필로 음양을 주어 밤 중임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식 초옥(草屋) 둥근 창에는 구양수가 보인다. 

구양수가 책을 읽다가 소리가 나자 동자에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서 살피라 했고, 이에 밖으로 나간 동자는.... 

 

                                 星月皎潔  明下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별과 달이 훤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라고 답하였다는 바로 그 유명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동자는 손을 들어 바람소리 나는 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집에서 기르는 鶴 두마리는 목을 빼고 입을 벌려 그 바람소리에 화답하듯 묘사되어 있다.  

 

또 마당의 낙엽들은 왼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 흩날리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는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고, 언덕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고

그 옆쪽에는 대나무에 둘러싸인 초옥이 있다.

좌우에 산이나 언덕을 배치하여 草屋과 마당을 감싸듯 부감하듯 그려냄으로써

주제를 강조하는 포치방식은 역시 構圖에 대한 김홍도의 뛰어난 감각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秋聲賦 .. 구양수 

 

구양자(歐陽子)가 바야흐로 밤에 글을 읽고 있는데,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섬뜩해져서 그것을 들으며 말하였다.

"이상하구나!" 처음에 빗소리 바람소리 같더니 갑자기 내달려 숫구치고 밀려들어 밤에 놀란 물결과 같고,

비바람이 물아치는 것 같았다.

 

 

물건에 부딪쳐서는 째그렁 금과 철이 온통 소리를 내는 듯하였고,

또한 적에 나아가는 병사들이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소리는 들리지 않고

단지 사람과 말이 다니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동자에게 일렀다. 

 

"이는 무슨 소리이냐? 네가 나가서 보거라" 동

자가 말하기를 "별과 달이 밝고 깨끗하여 은하수가 하늘에 있습니다.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나무 사이에서 소리가 납니다."

  

나는 말했다. "아아 슬프도다. 이는 가을의 소리로다. 어찌하여 오는가?"

대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깔은 암담하여 안개 날리고 구름 걷히며 그 용모는 맑고 밝아

하늘 높이 태양이 반짝이는 듯 하며 그 기운은 으스스 차가워 사람의 살과 뼈를 돌침으로 찌르는 듯하고

그 느낌은 쓸쓸하고 적막한 산천과 같다. 

 

그러므로 그 소리는 몹시 처절하여 외쳐대며 성내는 듯하다.

풍성한 풀이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아름다운 나무 빽빽하여 기뿔만 하였지만,

풀은 가을이 스치면 색이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맞으면 잎이 떨어진다.

그 꺾여 시들고 부스러져 떨어지는 것은 이에 그 기운의 남아있는 매서움 때문이다. 

 

대저 가을이란 형관으로 말하자면 음이다. 또한 무기의 상이며 오해엥서는 금이다.

이를 천지의 의로운 기운이라 이르니 항상 엄정하게 죽이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다.

하늘이 만물에 나아감에 있어 봄은 생육하고 가을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가을은 음악에 있어서는 상성으로 서방의 음을 주관하고, 이척으로는 칠월의 음률이 된다. 상

(商)은 상(傷)이니 사물이 이미 쇠하니 슬퍼진다. 이(夷)는 륙(戮)과 통하니 만물은 盛함을 지나면 마땅히 죽는다.

  

오호라! 물과 나무는 무정함에도 때가 되면 흩날려 떨어진다.

사람은 동물로서 만물 중 오직 영험한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그 마음을 흔들고 갖가지 일이 그 몸을 수고롭게 하니 마음이 움직임이 있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 지혜로 불가능한 것을 근심하니

마땅히 그 촉촉하고 붉던 것이 고목이 되고, 검던 것이 희끗희끗해 진다.

어찌 금석과 같은 바탕도 아닌데 초목과 왕성함을 다투겠는가. 

 

누가 해치는지를 생각하면 역시 가을소리에 무엇을 한스러워 하겠는가.

동자는 대답없이 머리 드리우고 졸고 있다. 다만 사방 벽의 벌레 찌르르 찌르르 우는 소리 들으니,

내 탄식을 돕는 듯하다.   

 

 

 

 

 

 

 

 

현재 김홍도의 사망년대는 여러 설이 있지만,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린 직후인 1806년에 죽었으리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염불서승 念佛西昇

 

 

 

 

깎은 머리의 뒷모습이 투명하도록 정갈해 보이는 노승(老僧) 한 분이 연꽃과 연잎으로 장식한 구름 방석에 앉아

흰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고 있다.

머리에서는 두광(頭光)이 피어나서 보름달처럼 하늘을 밝히고

뭉게뭉게 흐르는 구름은 서방 극락세계로 끝없이 이어져 간다.

단원이 만년에 실행해 보고 싶었던 장면일 것이다.

그래서 그 소원을 그림으로나마 표현해 내었던 듯하다.  

당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는 만일회(萬日會) 염불결사(念佛結社)를 맺어 많은 대중들이

염불공덕으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해 가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그런 염원을 표출한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라 하겠다. 

 

화면 전체를 푸른빛으로 우려 하늘을 상징하였는데,

원관 주변에는 특히 하늘빛이 짙어 방광(放光)을 강조한다.

회색 장삼(長衫)이 햇빛의 반사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것을 담담한 묵법(墨法)을 달리하여 구분해 주었고,

구름과 연꽃,연잎 그리고 옷주름들을 만들어내는 필선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나,

그 부드러움 속에는 사람이 육신을 떠받들만큼 강인한 힘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단원이 노경(老境)에 터득해 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유운선법(流雲禪法)이다.

그래서 관서(款書)를 "단노(壇老)"라 쓰고 있다. 사능(士能)과 단원(壇園)..두 방의 인장이 찍혀있다. 

 

 

 

 

 

 

        소림명월도   疎林明月圖 ... 보물 제782호  

   성긴 숲에 뜬 달  ... 최고의 수작

 

 

 

 

 

 

조선시대 그림에는 "달"이 등장하는 그림이 몇몇 있다.

그러나 보름달이건, 초승달이건 모두 밤하늘에 둥실 떠 있지만, 이 그림은 달이 나무에 가려져 있다.

왜 굳이 나무 뒤에 달을 배치하였을까?

이 그림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성긴 숲을 어루만지는 달

  

앙상한 가지만 남은 잡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숲, 나무 뒤에 둥근달이 떠 있다.

한쪽에서는 개울물이 졸졸거린다.

소림명월(疎林明月)은 "성긴 숲에 뜬 달"이라는 뜻이다.

나무와 달이 연출하는 가을의 소슬한 적막감이 일품이다.

그림의 심리적 중심은 둥근 보름달이다. 또 실제로 달이 화폭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나무들 역시 중앙에 집중 배치된 채 달을 가리고 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김홍도가 먼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를 먼저 보아야 한다.

 

 

 

 

 

                                                    송석원시사야연도

 

 

 

이 "송석원시사야연도"는 당시 中人들의 문학운동을 주도하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실경이 아니다. 모임에 참석한 문인들에게 정황을 듣고 그린 것이다.

단원은 어디에 그림의 비중을 두었을까?

세부적인 디테일이었을까?

아니다. 자연 속에서 시상(詩想)을 떠얼리는 문인들의 감흥에 공을 들인 것이다. 

 

"소림명월"도 마찬기지이다.

가을 달밤이 주는 정취를 은은하게 우려낸다.

아무렇게나 자란 잡목들이 적막하면서도 쓸쓸하다. 가난한 숲이다.

"달"은 멋지게만 뜨는 것은 아니다. 소박한 잡목에도 달은 뜨는 것이다. 그것도 쟁반같이 둥근 달이다.

가난한 숲에도, 소박한 삶에도 달은 뜨는 법이다.

 

 

                                        

 

이 그림은 대개 분위기에만 주목한다.

그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법이나 구도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법과 구도를 보면 그림의 심장이 더 잘 보인다.

먼저 짙은 먹(濃墨)과 엷은 먹(淡墨)이 나무의 표정을 풍부하게 만든다.

 

 

 

 

 

  

달의 위치도 절묘하다.

나무를 보면 濃墨으로 된 부분이 세 곳이어서 삼각형을 이루는데, 삼각형 안쪽에 달이 배치되어 있다.

즉 그림 중앙에 서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아래쪽과 왼쪽, 그리고 이 나무의 위쪽에

농묵으로 된 가지가 조밀하게 모여 있다.

이 세 곳을서로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따라서 이들 삼각형을 구성하는 나뭇가지는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 모으면서, 달을 더욱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달의 위치

 

 

 

  

 

이 그림에서 가장 과감한 시도는 달의 위치이다.

달을 빈 하늘에 배치하지 않았다. 

오른쪽 위의 빈 공간에 달을 배치할 수도 있었지만, 단원이 주목한 곳은 중앙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 화폭의 중앙에 소재를 배치하는 구도는 피하는 편이다.

구도의 목적이 감상자에게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폭의 중앙에 소재를 배치하면 주변 소재들이 소외된다.

또 그림이 단순해지고 불편해진다.

  

김홍도도 이 점을 몰랐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달을 중앙에 배치한다.

감상자의 시선이 달 부근에 집중된다. 나머지 공간은 소외된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단원은 정면 승부를 건다. 달로 집중되는 시선을 분산시킨다. 어떻게 그랬을까? 

 

간단하다.

달의 전면에 잡목을 배치한것이다. 그의 재능이 빛나는 순간이다.

달을 중심으로 모이던 시선이 잡목을 고르게 분산된다.

오른쪽의 도랑물 소리가 비로소 눈에 잡힌다.

이 때 두드러지는 것은 달도 아니고 잡목도 아니다.

달과 잡목이 어우러진 은은한 정취이다.

단원의 노림수도 결국 가을 달밤의 적막한 분위기에 있었다.

51세의 무르익은 필력으로 소박한 장면을 절경으로 승화시킨 김홍도 최고의 걸작이다.

 

 

  

 

 

  

 

 

     무동(舞童)

 

  

단원의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구수하고도 익살스러운 흥겨움이 화면에 넘쳐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쁘다든지 미끈하다든지 하는 느낌보다는 이렇게 익살스러운 표현이 앞선다는 것은

단원이 서민사회의 생태를 너무나 잘 보고, 잘 알고, 또 사랑했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미가 지니고 있는 장점 중의 하나는 구수함이요 또 은근스러움이며 때로는 익살스러움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러한 서민적인 대상 속에서 숨김도 과장도 없이 풍겨나는 일종의 흥겨움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작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풍악의 박자가 숨 가쁘게 높아 가는 데 따라

무동(舞童)의 옷자락에서 사뭇 바람이 이는 듯, 춤추며 돌아가는 동작의 속도가 한눈에 들어 온다.

피리를 부는 말뚝벙거지의 사나이는 입김에 양 볼이 부풀어 있으며,

양 손에 북채를 들고 뒤를 북을 울리는 사나이의 얼굴과 긴 대금을 불며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 앉은 자세 등은

이 흥겨운 장면의 묘사를 비범한 구도와 포치로써 이루어 놓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 그림은 자칫 잘못하면 格式에 얽매이거나 운동감이 죽는 폐단을 곁들이기 쉽지만,

단원의 출중한 회화적인 역량은 살아서 날뛰는 이 흥겨운 군상을 표현해서 그 다양한 운동감과 선율의 흔들림을

멋지게 이루어 놓은 것이다.  

 

 

 

 

 

 

풍속화가 .. 김홍도와 신윤복의 비교. 차이

 

  

나이 차이는 있지만 同 時代를 살았던 김홍도와 신윤복.. 그들은 모두 風俗畵의 大家이었다.

특히 김홍도는 중국 산수화의 본보기를 되그리는 것을 일삼던 당시의 화단 풍조 속에서

산수화를 뚜렷하게 우리화하여 비로소 풍토감각이 짙은 한국 산수화의 한 정형을 세웠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풍속화의 주제는 거의 서민사회 전반에 걸치는 民生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윤복의 풍속화와 더불어 매우 주목할 만한 社會史的인 의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윤복의 풍속화가 거의 도회적인 세련을 몸에 지닌 서민들의 사랑의 행태와 그 낭만을 주제로 삼았던

반면 단원의 풍속화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 걸치는 넓은 시야에서 生業의 즐거움을 그의 특유한 익살과

구수한 맛으로 엮어 나간 작품이 많았던 사실은 매우 대조적이다.

 

 

 

 

 

 

 

 

          서당(書堂)

  

 

 

 

 

 

 

 

 

         점심

  

 

 

 

 

 

 

 

 

 

             고누놀이

  

 

 

 

어느 동구 밖 나무 밑에서 기약없이 벌어진 이 고누놀이의 정경은

무거운 지게를 방금 벗어놓고 잠시 숨을 돌리는 후련한 심정과 하찮은 승부지만 그런대로 한 곳으로

쏠리는 흥겨움이 있어서 고누를 두는 사람이나 훈수를 하는 둘레의 열띤감정을 자못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겉부시시한 총각머리의 흐트러진 모습들이나 앞가슴을 풀어 헤쳐서 배꼽까지 드러 내놓고 희희낙락해 하는

 그들의 자세 속에는 과거 한국 사회의 길을 소박하게 걸어간 수 없는 머슴살이의 스산스러움과 흥겨움이

함께 어우러져 보인다.

  

단원의 풍속화에는 세상을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표정이 밝고 뜬 세상을 살아가는

흥겨움같은 아련한 즐거움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원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어질고 너그러운 백성들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 가난 속에서도 그렇게 너그러운 표정들이 신기롭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장죽을 물고 노송그루에 비스듬히 기대어 더벅머리 총각들의 자태를 묵묵히 바라보는 맨상투 차림의 어른과

턱없이 희희낙락해 하는 젊은이들의 감흥도 매우 대조적이지만

길가에 벗어놓은 나무지게의 모습은 역시 정겹기만 하다.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단원이 57세 되던 1801년에 그린 그림으로 133.7 X 418.4cm의 크기이다.

삼공(三公..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자리를 주더라도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즐거움과 바꾸지 않겠다는 뜻을

그린 작품이다.  

자신을 총애하던 正祖가 죽은 후, 김홍도의 삶은 매우 고달펐다.

그러한 생활에서 단원은 더욱 도가적(道家的), 선적(禪的)인 세계에 집착하는 듯한 그림이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중국의 시(詩)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이나 가축은 모두 조선의 것이다.

그림이 화재로 다소 손상이 되었지만, 단원의 風俗, 山水 모든 것이 축약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사녀도(仕女圖)

  

 

 

 

 

사녀도(仕女圖)는 미인도이다,

원래 仕女圖는 중국에서 宮中의 女人을 그린 그림이었지마는 일반적으로 미인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女人 ..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원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서양에서는 여성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주로 나체화를 그렸지만,

동양에서는 의상과 머리 표현을 통하여 여성미를 표현하였기 때문에 풍속화의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

 

 

이 그림은 배경없이 9분면(分面)의 사녀를 立像으로 그렸으며,

오른쪽 상단에 "辛丑四月士能爲煙波觀主人작"의 간기(干記)와 관지(款識)가 있은데,

같은 해 김홍도는 正祖의 御眞을 모사(模寫)하기도 하는 등 한창 성가를 드날릴 때이었다.

이미 神仙이나 초상 등 인물화에 있어서는 틀 잡힌 격조를 이루었고 무르익은 상태이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잠화사녀(簪花仕女)를 그렸으며,

조용하고 차분한 여인의 표현을 의식하였음인지 필선(筆線)이 비교적 고르며 묵색도 옅은 편이다.

세련된 용필(用筆)은 주춤하거나 망설인 기색을 보이지 않은 유려한 백묘(白描)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화면에서 튀지 않은 담청(淡靑)과 담갈색(淡褐色)의 가채(加彩)가 도드라지며,

김홍도가 추구하던 美人의 정형을 알려 주고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부분은 세필로 그린 이목구비이다.

머리올의 표현과 얼굴의 처리에 있어 부분적으로 보이는 紅調는 시선을 모은다.

단원의 그림에서 쉽게 보일 수 있는 낯익은 얼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서 표정을 감춘 듯한 얼굴은 미인에 앞서 신선그림의 표현에서 연유된듯

표정을 읽기 힘들고 신비스러움마져 느끼게 한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이 그림의 우측 상단에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는 글과  좌측 하단의 사능(士能 ..김홍도의 號)이라는 글로 보아,

소나무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그렸고, 소나무 밑의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합작품이다.

그러나 표암화송의 "표암"과 "화송"의 글씨체가 확연히 다른 것으로 보아 합작품이 아니고,

누군가 그림값을 높이기 위하여 원래의 글자를 지우고 "표암"이라는 글씨를 넣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시대의 그림에는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 많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사람들과 호랑이의 관계가 다른 민족보다 깊다는 것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호랑이를 좋아 한다는 뜻이 된다.

실상 중국이나 일본에는 호랑이 그림이 있지만, 호랑이 같지 않은 호랑이 그림들 뿐이다.

 

하여튼 우리의 호랑이 그림은 그 생태를 확실히 알고 그린 듯 사실적이다.

우리는 호랑의의 늠름한 風度와 넓은 도량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인간을 해치기도 하는 맹수로서

또 한편으로는 우상화된 두려운 神으로서 호랑이를 섬기며 살아온 민족이다. 

 

절의 산신당에 가 보면 으레 잘 생긴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山神 그림을 모셔 놓았다.

말하자면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의 모습은 한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또 존엄하게 생각하였던

도량 넓은 호랑이의 化神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호랑이를 섬기는 마음이나 호랑이를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엇갈려서 일어나는 우리의 생활정서 속에서 풍기는

美의 요소 중에는 적지않게 호랑이의 숨결이 스며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초인적인 사실성 ... 이라는 극찬을 받고 있는 이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를 바라보면

그 극사실에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스승이 그린 소나무 아래 극사실(極事實)의 재능 이상의 수양의 경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세밀한 붓질은

살아있는 털과 그 밑에 근육과 뼈의 움직임까지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 용맹하고 강단있는 그러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자태는 우리 한국민족의 기상과 민족성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땅 위에 밟고 선 네 개의 발에서는 정확한 비율로 균형감있게 묘사되어

육중한 체중을 이고선 날카로운 발톱 또한 돋보인다.

땅과 더불어 무게감있는 肢,體의 조화로운 디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정중앙에 정확히 위치한 허리의 솟음에서는 골수부터 허리뼈까지 이어져 말할 수 없는 실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황행하게 생기있게 응수하는 눈동자를 보며는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뛰쳐 나올 것만 같다.

속도감과 안정감을 가지고 좌우의 여백과 주변의 공기까지 가르는 꼬리의 유연함 또한 이 그림의 백미이다.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소나무의 절개와 강직함 아래 조선 호랑이의 용맹을 더하니

이보다 한국의 미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늘푸른 소나무 아래 지킬 것은 변함없이 지키며, 현실을 똑바로 볼 것이며,

뜬 구름이나 허공에 결코 발 딛지 않고 땅 위에 굳건히 설 것,

어떤 일이든 강하고 담대히 두려워 말라는 의미를 2010년의 우리에게 생생히 말 해주고 있다.

그림에서 얻는 지혜는 너무나 천금같은 것...

 

 

 

 

 

 

 

 

        계류유압도(溪流遊鴨圖)

  

 

 

 

 

山谷 간에 청청하게 흐르는 맑은 여울목에서 시시덕거리며 노니는 일곱마리의 젊은 오리들과

시월원하고도 잔잔한 물살을 보고 있노라면 풀빛 새로운 4월의 차가운 시냇물 감촉이 언뜻 몸에 느껴지는 듯도 싶다.

물 건너 저쪽 낮은 둔덕 위에 잘 생긴 나무 한 그루, 이쪽 둔덕에는 촉촉이 잡초가 푸른 곳에 인공의 자취가 없으니

이 오리떼는 들오리임이 틀림없다.

 

 

먹색의 농담을 가려서 묘사한 물 건너 바위 둔덕의 주름이나

한 그루 나무의 먼 가지와 가까운 가지의 원근감을 표현한 먹빛도 매우 원숙하고, 

한 가지는 늘어지고 한 가지는 펑처짐한 그의 수지법(樹枝法 .. 나무에 물이 올라오는 모습을 묘사하는 기법)은

과연 단원답다.

 

    

  

 

 

 

           山水, 風俗畵

 

 

 

단원은 근래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그린 풍경화처럼 우리 山川의 구성진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은 드물다.

겸재 정선(겸재 정선)도 우리의 산천을 그린 그림이 많지만 

한국적인 자연의 미묘한 서정을 홍건하게 표현하는 점으로는 단원의 산수화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평가이다.  

"한국의 미"라고 부를 수 있고 또 "한국의 멋"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미묘한 단원 그림의 흥겨움은

어찌보면 대범하고 어찌 보면 거친 것 같으며, 때로는 싱거운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싱거움은 마치 맑고 담담한 샘물 맛처럼 못 잊을 한국미의 한 토막이 된다고 생각된다. 

 

 

 

 

 

                                                               

 

 

 

단원의 풍속화 중에는 순수한 풍속의 묘사만을 다룬 그림과

그의 독특한 수지법(樹枝法)으로 표현한 산수화 속에 민생의 멋과 구수함을 아룰러 엮어 넣은

서정적인 풍속화 부류가 있다.

위의 그림도 한 사례인데, 원래 동양화의 개념으로 본다면 山水人物畵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서정적인 풍속화 작품 중에는 정이 어린 조국의 山河와 겨례에 쏟는 단원의 절절한 사랑이 깃들인

원숙한 그림들이 적지 않다. 

 

순수한 풍속화도, 산수화도 아니라서 인물의 표현에 매우 활달한 회화적인 솜씨를 주저없이 썼고,

또 근경과 원경이 모두 독립된 산수화로서의 격조를 지니고 있으므로

언뜻 보면 풍속화로 표현한 민생의 기미와 해학의 아름다움이 감취지기 쉽다.

그러나 이 그림 전체의 멋과 가락은 바로 단원 김홍도가 이룬 소위 山水風俗畵로서의 뜻이 새삼 깊어지는 작품이다.

 

                                    

 

 

 

                                            

 

        무이귀정(武夷歸楨)

  

 

 

 

 

무이산(武夷山)은 지금 대만의 대안(對岸)에 해당하는 복건성에 있는 길이 120里의 名山이다.

36봉과 37암 그리고 그 사이를 흘러 내리는 건계(建溪)가 어우러지면, 선경을 빚어내어

한무제(漢武帝)때부터 무이군(武夷君)이라는 神仙이 살았다 하고,

가깝게는 宋代의 신선 옥섬(玉蟾) 갈장경(葛長庚)이 이 산 속에 숨어 살았다고도 하는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빼어난 경치로 인하여 수많은 탐승객이 이곳을찾아 절경을 읊었으나,

중국 십철(十哲) 중의 한 사람이자 주자(朱子) 성리학의 개조로 추앙받는 주희(朱熹)가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만큼 무이산구곡(武夷山九曲)을 유명하게 한 것은 없다. 

 

계곡이 36峰 37岩을 감아 흘러내리며 빚어낸 아홉굽이는 화가들에 의해 즐겨 그려지게 되었는데,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중국보다 더욱 성리학적인 학문체계를 발전시켰던 조선에서도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중요한 소재로소 일찍부터 그려졌었다.

김홍도의 이 그림이 九曲 중에서 어디를 그렸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기암준봉과 그 사이를 굽이쳐 내려오는 탕탕한 계류를 타고 치닫는 선유(船遊)는 실로 호방장쾌하여,

굳이 어디를 담았는지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뜸집배 안에 상반신을 드러낸 채 절경을 승람하는 인물로 그려진, 朱熹이 단아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뱃사공들의 행색은 분명 조선사람의 그것이어서 당시 풍미하던 조선의 중화(中華)사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주상관매도(上觀梅圖)

  

 

 

 

 

"늙은 나이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다"라는 두보의 詩를 두고 그린 그림이다.

화면은 대부분 여백이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림 아래쪽의 작은 배 한 척과 매화가 피어있는 산등성이뿐이다.

산등성이 위와 아래로 자욱히 안게가 피어 올라있다.

 

모두 禪的인 화경에 무르익은 노인, 단원의 수법이다.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단원이 80세까지 살았다면 얼마나 더한 위대한 걸작을 남겼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정조는 불시에 김홍도를 불렀는데, 때마침 김홍도가 당대 최고의 서예가들과 단풍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거꾸로 궁중의 술과 안주를 보내어 다시 가서 놀게 하였다고 한다. 

 

주상관매도는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이 감돈다.

마치 여유롭고 유장한 평시조 가락이 허공 중에 여운을 날리며 떠도는 듯하다.

화폭은 커다란데 그려진 경물은 1/5도 채 안된다.

뿌옇게 떠오르는 끝없는 빈 공간, 그 한중간에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친다. 

 

화면 아래 구석에는 이쪽 산자락의 크트머리가 드리웠는데,

그 뒤로 잠시 멈춘 조작배 안에는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두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쳐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보인다.

여백이 넓다보니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을 할 수 없다.

허공 중에 아스라히 떠오른 언덕 그것은 어떠한 신기루와도 같다. 

 

그림 한복판의 언덕은 짙은 먹선으로 초점이 잡혀 있으나

오른편은 왼편으로 뻗어 나가는 필선은 점점 붓질이 약해지고 말라가면서 뿌연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꽃나무도 마찬가지이다. 가운데 가지 하나가 쨍하고 짙게 보이지만, 그 좌우로 가면서는 역시 흐릿해지는 것이다.

나무 아래 언덕의 주름에도 감홍도의 순간의 흥취가 배어있다.

척하고 첫 붓을 댔다가 그대로 끌면서 아래로 비스듬히 쳐 내려갔다.

景물과 餘白이 서로에게 안기고 스며드는 이 작품의 시적인 공간감각은 김홍도 노년의 산수화에 엿보이는 특징이다. 

 

언덕의 풍경은 실제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

언덕과 꽃나무는 우리가 바라본 것도, 맞은 편에 앉은 뱃사공이 바라본 것도 아니다.

바로 그림 속의 주인공, 주황빛 도포를 걸친 노인의 늙은 눈에 얼비친 광경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림 속 노인이 바라보는 풍경이 그대로 화폭 위로 떠오른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우리의 옛그림이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저 언덕 위를 치켜다 보고있다. 그러니 아래쪽은 저절로 뿌예질 수 밖에 없다. 

 

작가 김홍도는 완전히 저 노인과 한마음이다.

그러므로 화가의 시선 또한 작품의 하변 바닥까지 내려와서

노인이 타고있는 배를 아래쪽에서 올려다 본 것처럼 그리고 있다.

김홍도는 화제(화제)를 "老年花似霧中看"이라고 썼다.

즉, 늙은 나이에 보이는 꽃은 안개 속을 보는듯 하네..라는 글의 주인공의 쓸쓸한 심정을 묘사한 것임을 고려하여

그 글씨 역시 전체적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써서 그 연장선이 뱃전의 노인 쪽을 향하게 하고있다.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 

  

 

 

 

 

 

절로도해도(切蘆渡海圖) .. 지본담채(紙本淡彩)의 그림으로 크기는 105.5 x 58.3cm의 크기이다.

달마(達摩)가 몇가닥의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다. 

처음에 달마가 건넌 것은 강이었지만, 화가의 상상력으로 어느새 江은 바다가 되었다.

소재도 소재이지만, 늙은 소나무 가지를 구부린 듯한 선묘들은 단원의 말년의 선적 유유자적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단원 말년의 붓질은 이렇게 유유자적이었다.  

천년묵은 소나무를 마음껏 구부리고 화폭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거친 붓질인 듯 하면서도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격과 품위와 뜻이 함축되어 있다.

김명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도시적인 달마의 얼굴이 아닌 조선 사람의 얼굴이다.

단원이 그 속으로 들어 간 것일까?

 

 

 

 

 

 

 

         과로도기도  

   

 

  

唐나라의 신선(神仙), 장과(張果)가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면서 무슨 책을 열심히 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신선도이다.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은 이 그림 상단에 붙인 평어(評語)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과(果)라는 늙은이 종이 다나귀를 거꾸로 타고 손에는 한권의 책을 들었는데, 눈빛이 글줄 사이로 곧게 쏟아진다.

강세황은 이 그림을  두고 " 이 그림은 士能에게 가장 득의작(得意作)이라 할 수 있으니

중화에서 그것을 구한다 해도 쉽게 얻을 수는 없으리라..라고 평하였다.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 "

 

 

 

 

 

따사로운 봄날, 점잖은 선비가 말구종 아이를 앞세우고 길을 나섰다.

오른손은 고삐를 쥐고 오니손에는 쥘부채를 반쯤 펴 가볍게 들엇으며, 종아리엔 가뿐하게 행전을 쳤고,

두 발은 발막신을 신어 슬쩍 등자에 걸쳤다.

알맞게 마른 먹선으로 가늘게 그른 옷의 윤곽선은 이 양반의 옷매무새를 더없이 깔끔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말 꾸밈은 수수해서 번거로운 방울 하나 달지않고, 등자 뒤 다래조차 그저 민패일뿐,

다래 오른편에 드림 한 줄이 길게 늘어져 풍류가 넘치다. 

 

사위는 고즈넉해서 보이는 것은 오직 한 줄기 좁은 길과 길가에 선 버드나무,

 그리고 이름모를 잡풀무더기뿐이다.

왠지 날이 따뜻하게 느껴지는것은 아마도 버드나무 잔가지가 굽이쳐 능청스런 곡선을 그었기 때문이리라.

늦봄이면 바드나무의 잔가지는 축축 늘어지게 마련이어서 이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은 느긋하고도 여유로워다.

봄빛을 담은 버들가지에는 연두빛 새 이파리가 움돋는다.

  

이렇게 화면 전체에 가득 번진 봄빛으로 미루어 화가는 봄기운에 푹 젖었다.

 눈에 띄는 것은 붓 닿는대로 툭툭 친 버들 이파리이다.

버들 이파리에 떠도는 봄빛은 말에서도 느껴진다.

머리 굴레며 가슴걸이, 뒷다리 위로 맨 끈이며, 길게 그린 드림 모두 톡톡 찍은 점으로 그려진 까닭이다.

버들잎과 어울리는 이 작은 점들은 말대래 오른편 말의 앞발 가에도 보여,

선비의 마음과 버들잎의 마음이 한가지 봄빛에 물들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선비의 뒷쪽 배경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 뿌옇고 막막한 그림 바탕이 있을 분이다.

텅 빈 여백! 이 여백 속에는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

강이 있고 그 강 건너 맞은편 기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화면에는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다.

꾀꼬리가 안개와 봄비를 이끌어 봄 강에 고운 깁을 짜서 걸었기 때문이다.

선비는 지금 실비를 맞고 있는 것이다.

 

다만 꾀꼬리 노랫가락에 마냥 도취된 탓에 사랑스런 아내가 갈무리해 준 도포는 커녕 속옷까지 젖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선비의 뒷배경이 통째로 생략되어 있는 것..

이 그림으 ㅣ가장 큰 특징이다.

인물 뒤로 텅 비워둔 아득하고 망망한 여백..놀랍고 충격적이다. 

 

이 큰 여백이 자칫 그림을 너무 횅댕그렁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지워낸 부정의 여백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긍정의 여백이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이 며백을 통하여 선비가 꾀꼬리에게 온 정신을 빼앗겨서 전혀 주위를 의식하지 못 하는 순간,

그 일순간의 아득한 심사를 말하려 한 것이 아닐까? 

 

사릿ㄹ 이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왜 선비 뒤에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가?"라는 읨누조차 갖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그만큼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선비와 말구종 아이의 시선이 못 박힌듯 꾀꼬리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보는 우리까지 덩달아 다른 곳을 둘러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술은 궁극의 경지에서 단순해진다. 그리고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다.

화가는 그리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더 그리고 싶은욕구를 어느 순간 차갑게 끊을 수 있다는 것,

아니 무엇을 그리지 않아도 좋은 그림이 되는지를 절ㄹ ㅗ안다는 것이리라.

 

 

 

 

 

 

 

선비가 타고 있는 말... 

앞다리는 주춤하고 나란히 섰고, 뒷다리는 아직 어정쩡하니 아마도 주인이 막 고삐를 당긴 모양이다.

무엇인가? 선비는 순간 고개를 들어 오른쪽 나무 위를 치켜보고, 구종 아이도 주인을 따라 나란히 시선을 옮긴다.

고요한 봄날의 정적 속에 "뻐꾹 뻐꾹" 환하게 퍼지는 소리가 지척간 버드나무 위에서 들려 온다.  

 

온 몸에 황금빛을 두른 노란 꾀꼬리 한 쌍이다.

선비는 말 위에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어여쁜 꾀꼬리가 노래하는 갖은 소리굴림을 듣는다.

참 맑고 반가운 음성이요,생각 밖의 곱고 앙증맞은 자태가 아닌가.

선비의 입에는 절로 제시(題詩) 한 수가 터져 나온다. 

  

               佳人花底簧干舌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韻土樽前柑一雙  운치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 밀갑 한쌍을 올려 놓았나

               歷亂金畯楊柳涯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여! 수양버들 물가를 오고 가더니

               若咽和雨織春江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가다가 봄강에 고운 깁을 짜고 있구나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김홍도가 잔가지를 그린 수법이다.

선비의 코 앞까지 드리워진 실가지 이파리들을 보라.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오고 있는 것처럼, 가지도 없이 나부끼는 이파리로만 열을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옛그림에서 이르는 바, 필단의연(筆斷意連)의 경지이니,

붓선은 끊겼으되 쏙뜻이 절로 이어진다.

그린 사람의 가슴 속에 이미 봄볕이 가득한데 구태여 가지까지 일일이 그려 넣을 필요가 있으랴!

없는 저 가지를 챙겨보는 것이야 그림 보는 자의 몫이리라...

 

 

 

 

 

                                               

                                                 

 

버드나무에 앉아있는 한 쌍의 꾀꼬리를 확대해 본다.

꾀꼬리 부부는 너무 천진난만하게 그려져 있어 꾀꼬리인지 병아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사람이 늙으면 동심이 된다더니, 이것은 단원이 환갑 전후에 그린 그림이 분명하다.

그림 전체에서 보이는 꾀꼬리는 형체만 짐작할 정도로작은 크기... 

 

그런데 뻐꾸기 부분만을 확대한 그림에서 버꾸기의 형태가 더욱 뚜렷해진다.

적은 크기의 사진을 확대하면 형태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그림의 뻐꾸기는 확대했을 때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 옛 그림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가 크기가 아무리 작더라도 그 묘사는 아주 세밀하기 때문에

더욱 뚜렷해 진다는 것이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보인다 함은 아마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 있으므로 가능하리라.

이 그림에서 큰 것을 머금은 작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시선(視線)이다.

저 선비의 기품있게 돌린 고개에서 매혹된 영혼이 보인다.

 

그런데 그 매혹의 대상은 대단한 그 무엇도 아닌 일상에서 마주친 꾀꼬리 한 쌍일 뿐이다.

선비는 참으로 풍류를 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이 그림이 주제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감상자의 시선이다.

선비는 그림의 아래편에 있다.

꾀꼬리를 바라 보느라 고개를 치켜든 그는 새소리에 몰입된 까닭에 그림 보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꾀꼬리에 넋을 앗겨 멍하니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 뿐 ..

그러나 감상자는 화폭의 중간에 눈높이를 두고 주인공을 살피느라 절로 시선을 내리깔게 된다.

바로 이때 선비의 올려다 보는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이 마주친다.

 

感情移入이 이 순간적으로 똑 떨어지게 이루어지며, 보는 이도 자연스레 선비의 詩情에 젖어드는 것이다.

이 그림의 초점은 품위있는 가는 선으로 그려진 선비에게만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을 흩뜨릴 수 있는 다른 요소는 모두 한 단계 눅여져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체가 하나로 자연스럽게 묶어지는 감각은 약간의 도취상태,

바로 술기운을 알맞게 빌었을 때 무리없이 흘러 나온다.

이 모두는 아마도 인위, 즉 표면의식보다는 자연,

곧 진정한 내면의 감각을 더 높이 샀던 옛 분들 마음자리의 반영이리라...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마치 위대한 음악의 중간에 침묵의 몇 초를 기다리는 순간과 같은 마음졸임이 있는 까닭이다.

침묵으 ㅣ위대함은 앞뒤의 음향이 만들어 낸다. 그림 속 여백의 의미심장함은 주위의 형상이 조성한다.

사진의 화살표에서 알 수 있듯이 좁은 길에 오른편 위에서 왼편 아래로 흐르는, 삼중으로 겹쳐진 사선,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비스듬한 버드나무 가지와 그 것을 치켜보는 선비와 말구종 아이의 시선,

끝으로 왼편 위에 있는 題詩가 멀리서 아래 빗금들이 조성한 공간감을 되받아 아련하게 메아리친다. 

 

 

 

 

 

 

제시(題詩)를 보면 이따금씩 크고 짙게 쓴 글씨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행을 건너 뛰며 사선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題詩 자체가 강약의 운율을 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아래쪽 비스듬한 구도 線과 절묘한 조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소나무 아래에서 생황을 불다"

 

 

 

 

 

김홍도의 인물화는 전혀 배경을 그리지 않고 인물만을 크게 부각시켜,

그들의 표정 및 동작이나 자세만으로 화면 구성을 꾀한 것과

배경 속에 점경(點景)으로 인물을 담는 두 가지로 크게 나뉘어진다. 

이 그림처럼 (老松)만을 화면의 중앙에 수직으로 포치시킨 이 그림은

장식성이 전혀 배제된 소탈함과 번거롭지 않은 담담한 운치를 보여 주고있다. 

 

이 그림은 神仙보다 오히려 노송이 큰 비중을 화면에서 점하고 있는데,

솔잎은 성글고 늙은 줄기의 거친 표현은 신선과 함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듯하다.

차분한 자세로 생황(笙簧)을 부는 신선은 사뭇 유연한 정취이며,

의습선은 가늘고 고른 필선으로 율동감있는 송린(松鱗 .. 소나무 껍질)과는 대조적이다

 

 

 

 

 

        노량주교도섭도    

  

 

 

 

  배다리(舟橋)의 역사 

 

배다리는 말 그대로 여러 척의 배를 이어서 그 위에 평지를 만들어 강을 건너던 다리,

그래서 이를 주교(舟橋) 또는 부교(浮橋)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하폭이 넓은 강에는 다리를 설치한 예가 없다. 나루터를 두고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던 것이다.

이는 다리 설치 기술과도 관련이 있지만, 외침이 잦았던 시절에는 다리 설치가 오하려 이적행위가 될 수도 있었으므로

다리 설치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강에 다리를 놓는 예외가 있었다. 바로 주교(舟橋)가 그것이다.

주교는 일찍부터 활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정종 1년(1045)에 임진강에 가설되었는데,

"선교(船橋)가 없어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지는 일이 많으므로 부교(浮橋)를 만든 뒤로

사람과 말이 평지처럼 밟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그 후 이성계가 요동성을 공격할 때와 위화도 회군 때 부교를 가설하기도 하였으며,

燕山君은 청계산에 사냥을 가기 위하여 민선(民船) 800척을 동원,한강에 다리를 가설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렇듯 배다리 설치 기술은 발전되어 正祖에 이르러 그의 효행을 위한 길에 주교를 설치하였고,

이것을 김홍도 등 화원들이 그림으로 그려 그 생생한 모습을 불 수 있는 것이다.

 

정약용이 설계, 정조가 설치, 김홍도가 그렸다.

 

 

  

 

       평안감사 부임 축하잔치

 

김홍도가 그렸다는 "평안감사 향연도(平安監司 饗宴圖)는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등 3幅으로 이루어진 (길이 약 6m) 그림이다.

신임 평안감사가 날을 받아 평양에 부임하면 평안도 모든 고을의 수령들이 감영으로 모여 들었고,

평양은 신임 감사의 환영잔치로 들떠 있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에 커다란 병폐가 세가지 있으니,

이는 충청도 양반과 전라도 아전(衙前) 그리고 평안도 기생(妓生)"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평안도 기생은 물론 평양의 기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필이면 평양 기생이 최고 집권자에 의해 나라의 병폐로까지 지적을 당하였을까?

이미 조선 초기에 평양는 첫째가는 색향(色鄕)으로 이름이 높았다.

예전에 개성(開城)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아 송도(松都)라 불렀고,

평양은 흐드러진 유흥을 상징하는 버들이 많아 유경(柳京)이라 불렀는데,

그 때문인지 개성에는 절개를 지키는 과부가 많았고, 평양에는 풍류가 넘치는 기생이 많았다고 한다.

 

                                                     

 

 

  

 

평양에는 명기도 많아서 서울로 선발되어 올라가는 기생을 주로 공급하는 곳이었다.

그러면 평양의 기생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18세기에는 80명 정도로 줄어 들었지만, 16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200여명이 있었다고 하니

가히 팔도의 색향이라 할 만하다.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날에는 곱게 꾸민 기녀들 200여명이 모두 나와 길가에 죽 늘어서서 영접을 하니

마치 꿈 속에서 도원경을 지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평양은 대동강의 경치가 일품이고 아름다운 여인, 맛있는 술이 많아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생겨 날 정도이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기생들은 대개 인물이 곱고 재주가 있는 천민 소녀를 골라 기녀의 양성소인 교방에서 교육시켰다.

기생들은 공식적으로 1년에 백미 한 섬을 연봉으로 받았지만,

이보다 양반들의 연회에 불려 나가 봉사하고 받는 전두나 몸을 팔아 버는 해옷값(解衣債)가 주된 수입원이었다.

따라서 풍류를 즐기는 양반들 중에는 기생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였다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이윽고 어둠이 깃든 대동강 위에서 뱃놀이의 호장한 퍼레이드가 전개되면

모든 배들과 양쪽 강기슭에 늘어선 백성들이 켜드는 횃불이 불이랑을 이루어 늠실거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감사의 배를 하나의 구심력 삼아 모여

움직이는 한 떼의 배 안에는 술과 풍악에 취한 점잔 뺀 얼굴들이 신임 감사의 눈치를 살피는 듯만 싶어 보인다.

원님덕에 나팔 분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 監司 둘레의 뭇 얼굴들,

그 중에서도 우쭐한 군졸, 사령, 통인 등속의 내로라 하는 얼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 사람들이 감사 덕분에 으스대는 족속들이구나 싶어진다.  

 

 

 

 

 

  

촌부들이 가벼운 걸음으로 강가에 모여들고 있으며

강 건너편 평양성벽 위에 늘어선 횃불의 이랑과 이쪽 강변에 늘어선 횃불이 서로 호응하는 가운데

수십 척의 놀잇배가 강심을 내려가는 웅장한 퍼레이드 장면이다.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

 

 

  

 

부벽루(浮碧樓)에서의 처용무(處容舞)잔치를 그린 그림이다.

모란봉 언덕까지 줄이 올라서서 이 잔치 구경을 하고 있는 村夫,村婦를 그리고 강 건너에는 산줄기들이 그려져 있다.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대동강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연광정(練光亭)에서 벌어지는 사자춤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화면 역시 강 건너 산줄기들이 미법평원산수(米法平原山水)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잔치 언저리의 주변, 거리의 民家와 점포 백성들의 생활이 가장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논란

  

평양성과 대동강의 실경을 그린 조선시대의 병풍그림은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 적지 않지만,

이만한 대폭에 이만한 솜씨를 보인 작품은 없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과연 단원 김홍도가 맞는지는 좀 더 기다려야 되겠지만,

어쨋든 우리 풍속도 중에서는 최대급의 작품임에 틀림없고,

또 이 작가가 대가급의 화원 출신이었다는 것은 그의 부감법과 투시법 등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서 평양에 갔었는지의 문제도 확인할 수 없지만,

부벽루 근처의 영명사 석탑이라든가, 강 언덕 바위의 石刻文字 같은 것을 밝혀 그린 것,

능라도 풍경의 참다운 맛 등으로 보아 적어도 평양에서 몸소 이러한 잔치행사를 겪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버벗이 김홍도의 필치대로 단원(檀園)이라는 낙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이름에 걸린 의문은 그 평원산수법과 수지법 그리고 너무나 단조로운 民家들의 표현에서 오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기노세계련도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라고도 한다.

개성 송악산(松岳山) 기슭에 있는 고려 왕궁 옛터인 만월대에서 열린 잔치를 기념한 일종의 기록화이다.  

발문(跋文)에 의하면 장준택(張俊宅) 등 칠순 노인 64명이 그들 자손의 주선으로 평소의 숙원을 풀어

만월대에 모여서 큰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당시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작품이다.

화면은 송악산 서쪽만 배경으로 되어 있고, 잔치는 고려 왕궁의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 폐허 위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한 인물은 250명이 넘고, 저마다 다른 자세와 동작이 치밀한 관찰을 거쳐,

그 사실적인 묘사에 정력을 기울인 자취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담와평생도   

 

 

 

 

 

 

 

 

 

               주교도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김홍도는 正祖 재위 동안 줄곧 아주 중요한 국책사업에만 참여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세자 능의 이전이었고, 거기에 관한 많은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이 환여행렬도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면서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지극하게 보여주는 사업의 일환으로,

사도세자 능에 대한 참배와 환갑잔치를 그린 그림이다.

 

 

 

 

 

 

 

그동안의 기록화가 상당히 까다로운 격식 하에 제작되어서 매우 경직된 화면을 보여 주었던 것에 비하여

이 그림은 매우 율동적인 행렬장면을 보여준다.

 행렬장면은 변화무쌍하고 장렬하다.

아마도 밑그림은 김홍도가 그리고 김득신 등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투입되어 그린 그림인 듯하다.

단원이 51세 되던 해의 작업으로 그의 인생에 둘도 없는 영광되고 거대한 작업이었다.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대장간

 

 

 

 

  

 

                                      고기잡이

 

 

 

 

당시의 어촌의 고기잡이 모습이 잘 살아있다. 울타리처럼 쳐져있는 것이 울짱이라 하는데,

울짱은 주로 떡갈나무나 소나무를 이용하여 물이 얕은 바다나 산발치가 바다로 들어간 섬의 모래벌 가에 빙둘러 세운다.

 

울짱의 귀퉁이에는 물살에 따라 물고기가 들어가기는 해도 나오지 못하는 임통을 설치하고,

조수물이 들어오면 물고기가  임통에 갇히게 되고,

그 물고기를 가지러 어부들이 배를 나눠 타고 임통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떠서 배에 저장한다고 한다. 

그림에서 보면 울짱에서 물고기를 건져 건네는 사람도 보이고,

중간이 배에는 아마도 물고기를 그 자리에서 조리하는 듯이 보이는 솥단지가 보이고 있다.

 

 

 

 

 

                                         기와 잇기

 

 

 

대패질하는 목수, 수평을 맞추는 사람, 흙을 개어 올려주는 사람, 기와를 던지는 사람, 기와를 받는 사람 등

분업이 잘 이루어진 기와를 이는 현장이 그대로 묘사되었다.

작업 현장 옆에는 아마도 주인인 듯 보이는 양반이 일을 잘 하고있나 감시하듯이 긴작대를 들고 지켜 보고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양반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이 저마다 자기 일에 열중이다.

김홍도의 노동현장 그림이 좋은 이유는 노동의 즐거움이 그들의 표정에, 근육과 각종 몸동작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길쌈  

 

 

 

 

이 그림에는 길쌈의 도구들이 자세히 나타나 있어 당시 백성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베매기를 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하단에는 배짜기를 하는 여인과 이를 지켜보는 할머니, 등에 업힌 아이, 서 있는 아이가 보인다. 

익살스러운 김홍도의 필치가 엿보이는 것은

마치 뒤에 서 있는 할머니가 베짜는 여인의 시어머니인 듯, 손자에게 시켜 며느리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는 듯하다.

손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엄마! 함니가 좀더 빨리 하래?" 눈치도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담배 썰기

 

 

 

이 그림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방 안에서 담배를 썰고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도 두 부류가 나카나는데...

왼쪽 상단이 작두질하는 사람과 오른쪽 아래의 담뱃잎을 정리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아마 아랫 사람)이고,

오른쪽 상단의 작두질을 구경하는 사람과 왼쪽 하단이 책을 일고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일을 시킨 주인네들인 것 같다. 

일하는 두 사람은 웃옷을 벚어젖히고 무더위를 이기며 일을 하고 있고,

주인은 부채질하면서 책을 읽고 있다.

작두질을 구경하는 젊은 청년은 아마 주인의 아들인 것 같다.

김홍도의 그림에는 이렇게 노사(勞社)가 함께 등장하는 그림이 적지 않은데 ,

분위기는 아주 평화롭고 밝은 점이 대단하다.

즐겁게 일하는 노동자와 그들을 착취하지 않는 社主의 모습이랄까?  

 

 

 

 

                                                           돗자리 짜기

 

 

 

  안에는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편과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있는 아내,

그리고 그 뒤편에서 책을펴놓고 글자를 막대기로 짚어가며 글을 읽고 있는 아들..

모두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있는 평범하고 푸근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부부 행상

 

 

 

부부로 보이는 행상 가족의 모습이다.

당시 행상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물품을 파는 상인을 말하는데

아무래도 돌아다니는 장사를 하다보니 행색이 남루하다.

낡은벙거지에 나무통 지게를 진 남자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업은 여인은

서로 행상을 떠나기 위해 헤어지려고 하고 있는 듯하다.

 

뭔가 아쉬움과 염려의 눈길로 아내에게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있는 남편과

몸조심하라고 여러번 말하는 여인의 정이 느껴진다.

아이를 업고 저고리를 입은 엄마는 아이를 긴 행려에서 조금이나마 보호하려는 모정을 보이고 있고,

질끈 행전을 묶은 바지차림과 치마를 걷어올려 허리춤에 끈을 묶은 모습에서

노곤한 행려의 길을 떠나는 모습이 역력하다.

 

 

 

 

 

                                       논갈이

 

 

 

봄이 되었다. 논을 갈아 한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소들의 육중하고 힘 있는 움직임에 굳었던 논바닥이 부슬부슬 일어나 흙들이 부드러워 진다. 

웃옷을 벚어던지고, 팔뚝에 힘이 들어가서 근육이 생생히 보이고 거기에 땀방울이 맺힌다.

쨍그렁 쨍쨍.. 쟁기 부딪히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느낌, 경쾌하고 약동하는 농촌풍경이다.

 

 

 

 

 

                                         벼타작

 

 

 

쉴 새없이 일하는 농부들의 숨가쁜 움직임이 그대로 묘사된 그림이다.

힘은 들지만 일년동안 애쓴 보람의 수확을 하는 이 순간 농부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완연하다.

한 짐 타작할 벼를 지게에 지고 오는 사내의 웃음 띈 얼굴,

벼를 힘껏 들어 올려 탁탁치느라 얼글에 힘이 들어간 남자의 표정,

 

바닥에 떨어진 알곡들을 쓸어 모으는 사람, 타작벼를 묶는 사람 모두 재미있다.

뒤에는 주인쯤되보이는 양반이 돗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긴 곰방대를 물고 거드름을 피고있다.

돋자리 옆에 놓인 술병과 잔, 벗어놓은 고무신까지 김홍도의 세심한 관찰이 그대로 보인다.

 

 

 

 

                                         빨래 터

 

 

  

이 그림은 잘 알려진 김홍도의 작품인데,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편편한 돌판을 빨래판 삼아 방방이를 두들기며 동네사람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두 여인.

흐르는 물에 훨훨 빨래를 흔들어 헹구며 짜내는 여인, 감은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여인과 그 옆에서 보채는 아기,

 

 

 

 

  

그리고 바위 뒤에서 몰래 숨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여인들을 엿보고 있는 한량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특히 이렇게 여인을 엿보는 장면처럼 春意가 담긴 작품은 혜원 신윤복이 즐겨 그리는 버릇으로,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시각이다.

 

 

 

 

 

 

                                                              우물가

 

 

 

우물가란 그 마을의 모든 소문과 스캔들의 근원지이고 전달지이다.

어쩌구 저쩌구.. 하는 여인들의 입방아에서부터 물 길어올리는 여인에게 슬쩍 접근하여 수작을 거는 남정네까지

마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도마 위에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서 더위와 갈증에 지친 남정네가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갓을 벗어 걸치고 가슴털을 드러내며

여인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여인은 수줍은 듯이 얼굴을 돌리고 물을 건네고,

이 우악스러운 사내는 왈칵왈칵 물을 흘리면서 거침없이 마셔댄다.

물을 한동이 머리에 이고 바가지를 손에 들고 치마를 걷어붙인 채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편자 박기

  

 

 

 

이 그림은 말에게 편자를 박는 그림으로 당시 이렇게 말편자를 박았던 모양이다.

네 다리를 묶어서 긴 막대에 고정시키고 말이 하늘을 보도록 눕혀서, 칼로 발굽의 바닥을 깎아낸 뒤 못을 박는다.

말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는 듯 하다.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둔 채 발굽을 갈고 그 뒤에 편자를 박았다는 데,

조선시대에는 왜 굳이 말을 이렇게 눕혀서 괴롭게 하며 편자를 박았던 것일까?

말의 편자와 대갈은 말을 쉬지않고 부리기 위한 인간 자신의 이익에서 나온 것으로

말에게는 큰 고통을 주는 일이라고 이익(李翼)은 이를 반대하는 글을 썼었다.

 

 

 

 

     

 

 

                                     규장각도   奎章閣圖 

   

 

 

 

正祖가 先王인 英祖의 어제(御製)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6년에 건립한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 전경을 그린

관아도(官衙圖)이다.

규장각을 주제로 삼아 그린 관아도이기 때문에 화면 중앙에 규장각을 실제보다 크게 묘사한 다음,

그 전후좌우에 보속건물과 주변 경치를 에워싸듯 묘사함으로써

중아의 주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감상미가 풍부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풍모를 갖추었다. 

 

화면에 간지(干支)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제작시기는 미상이다.

그러나 규장각이 1776년7월20일에 준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봉모당(奉謨堂)이 그림에 없고,

아직 개조되기 전의 열무정(閱武亭)으로 묘사한 점으로 미루어 규장각이 완공되는 1776년 전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규장각의 구성

 

중앙에 위치한 대형 팔작지붕의 이층 다락집이 규장각의 정당(正堂)이다.

상루하헌(上樓下軒)의 이층에서 일층이 규장각이며,

왼쪽의 장방형 일자집은 정조가 규장각에 행차할 때에 신료들을 접견하는 서향각(書香閣)이다.  

서향각 뒷쪽의 정자는 숙종이 세운 희우정(喜雨亭)이다.

본디 터가 가파른 언덕이기 떄문에 많은 석단(石壇)을 쌓았고,

영조의 어제를 봉안한 성역이기 때문에 주변을 벽돌담으로 둘러 차단하되,

남쪽에는 취병(翠屛)을 가설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龍珠寺, 후불탱화

   

 

 

 

正祖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陵을 화성으로 遷葬하고,

근처의 용주사(龍珠寺)를 그 원찰로 삼았다.

그리고 대웅전에 후불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김홍도를 청나라 사신 일행에 별도의 직책까지 마련하여 보냈다.

당시 淸나라는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던 시절... 

정조는 최고의 후불탱화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하여 김홍도를 미리 淸나라에 보내

西洋畵法을 익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1790년 용주사 일체의 조형예술에 대한 총책임을 맡기게 된다.

이렇게 그려진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平面의 이미지만 보이던 기존의 佛畵와는 달리

明暗과 遠近을 표현한 훈염기법(暈染技法)이 가미되어 입체감이 풍부하다.

 

 

 

이 용주사 후불탱화를 진행하면서 김홍도 자신이 불교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이로써 정보의 신임을 다시 확인받게 된 김홍도는 1795년 中人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정6품 벼슬인 연풍현감에 제수되었다.

 

 

 

 

 

                                    

 

某 블로그(출처 잃어버림)에서 베껴다가 편집을 다시 했습니다.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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