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의 '영통동구도'.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1757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일푼의 '백수'였다. 예순이 되도록 벼슬 한 번 못해봤다. 하지만 높은 식견과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슈퍼맨'이었다. 영조의 특별 배려로 예순이 넘어서 종6품에 임명된다. 그때부터 평생 연마한 내공을 마음껏 발휘한다. 승승장구. 종2품 당상관까지 오른다. 남들은 평생 노력해도 오르기 힘든 자리다. 6년 만의 쾌거였다.
누구일까? 1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평론가 표암 강세황(1713~1791)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던 표암은 특히 서양 문물과 그림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그래서 동양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한다. '송도기행첩'은 물론 그곳에 실린 '영통동구도'는 동서양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산 중턱에 바위가 흩어져 있다. 서로 포개진 채, 모양도 제각각이다. 둥글거나 모나고 크거나 작다. 골짜기 사이로 난 오솔길에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와 시동이 있다. '영통동구도'는 구성이 단순하다. 하지만 호락호락한 그림은 아니다. 바위는 입체적인데, 산수는 평면적이다. 이 '이종교배'가 심상치 않다. 이유가 있다. 명암법과 원근법 같은 태서법(서양화법)을 도입한 탓이다. 동양화에 없던 입체감이 생긴다. 이처럼 표암은 새로운 미술 조류를 겁내지 않고 자기화했다. '송도기행첩'은 표암이 45세 되던 해(1757년) 7월에 개성을 여행한 뒤 보고 들은 견문을 담은 화첩이다. 당시 그는 평생 고생시킨 아내와 사별한 뒤였다. 슬픔을 달래고자 송도로 떠났고, 그곳에서 보고 느낀 소감을 16점의 그림으로 남긴다. 이들 그림은 진경산수화를 기반으로 원근투시법과 서양화풍의 채색기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이 화첩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영통동구도'다. 송도 북쪽, 영통동 계곡의 명물인 거대한 바위에 포커스를 맞췄다.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보고 받은 감동을 그림과 화제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두드러진 소재는 역시 크고 작은 바위들이다. 그런데 바위의 모양도 재미있지만 그리는 방식은 더 흥미롭다. 먼저 윤곽선으로 바위의 형태를 잡는다. 그리고 물기가 많은 먹이나 먹이 섞인 녹청색 물감으로 칠한다. 바위 위쪽은 녹색을 칠하고, 아래 쪽은 진한 수묵을 썼다. 이때 붓의 흔적이 남지 않게 해서 바위의 부피감과 무게감을 살렸다. 또 서로 포개진 바위도 전통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다. 뒤쪽의 바위를 진하게 칠해서 앞쪽 바위를 부각시켰다. 뿐만 아니다. 가까운 것은 크고 선명하게 먼 것은 작고 연하게 해서 원근감을 살렸다. 이런 기법은 동양화에서 사용하지 않는 서양화 기법이다.
바위를 보자. 바위만으로는 크기를 짐작할 수가 없다. 이때 눈에 띄는 소재가 있다. 산비탈로 난 오솔길에 작게 그려진 인물들이다. 인물과 대비되면서 바위의 크기를 짐작하게 만든다. 큰 것과 작은 것의 대비효과 덕분이다.
그림의 초점은 어디일까? 거대한 바위도 맞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눈길이 가는 곳은 인물들이다. 작지만 그 인물을 중심으로 감상이 이뤄진다. 표암도 인물에 초점을 맞추려 했는지 표현법을 달리했다. 당나귀와 선비, 그리고 동자는 가늘고 날렵한 선을 사용했다. 게다가 먹이 진한 탓에 크기에 비해 금방 눈에 띈다. 미묘한 선과 먹의 표정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림의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묵묵히 봐야만 정교한 표현의 묘미를 음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나귀를 탄 선비는 누구일까? 혹시 표암이 아닐까? 여행 중인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그럴 만한 증거가 있다. 같은 화첩에 실린 '태종대도'(열한 번째 그림)에도 그림을 그리는, 표암인 듯한 선비가 등장한다. 당나귀를 타고 하인을 데리고 여행 중인 표암으로 모습이 눈에 선하게 잡힌다.
표암은 그림을 그린 뒤 왼쪽 상단에 장문의 화제를 더한다. "영통동구에 놓여 있는 돌이 웅장하여 집채처럼 크다.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서 언뜻 보면 눈을 놀라게 한다. 속설에 전하기를 못 밑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꼭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웅장한 구경거리는 또한 보기 드문 것이다." 그림에 기행소감이나 화제를 더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또한 이 그림은 조선의 진경산수가 서양화법을 만나서 어떻게 업그레이드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는 표암의 진취적인 예술관과 왕성한 실험정신의 한 결실이었다.
㈜아트북스 대표 정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