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허유(허련)

2010. 11. 1. 15:33미술/한국화 옛그림

 

 

 

 

 

 

 

 

 

 

 

 

 

 

 

소치 허련 묵산수 42*106

 

 

 

 

 

草屋山水圖

 

 

 

 

 

 

草閣山水圖

 

 

 

 

 

淸江流水圖 

 

 

 

 

 


완당 김정희 초상

 

 

 

 

 


산수도

 

 

 

 

 


초옥산수도



 

 

 

 

 

 

 

 

 

 

 

 

 


남화(南畵)의 대가(大家)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9년(순조 8년) 진도에서 태어난 소치는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본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이름은 연(鍊)이라 불렀는데 뒤에 유(維)로 바꿨다.

소치는 동학란이 일어나기 이태전인 1893년(고종 30) 여든여덟의 나이로 장서(長逝)하기까지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고, 이하응(흥선대원군), 권돈인, 문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한

숱한 권문세가 및 그의 스승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 초의대사(草衣大師) 등과 어울리면서

주유천하했던 이조 말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대가이다.

흔히 소치를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부르거니와

일찍이 추사는 소치를 일러『압수이동(押水以東)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말했다.

 

서원은 철폐화고 쇄국양이의 고집을 부렸던 석파(石坡=대원군 이하응)는

스스로 시, 서, 화의 한 경지를 이룩하고서도 70살에 이른 노치(老痴)를 만나는 자리에서

'소치는 서화의 대방가'라 추기면서「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 其奧如蘭)」라고

싯귀를 단 묵란을 쳐 소치에게 주었는가 하면

당대 제일가는 시인이었던 유산(酉山) 정학연(다산 정약용의 아들)은

'속계(俗界)를 초월한 자품(資稟)이 있는 뒤에야 그림의 삼매(三昧)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세계에 이른 것은 소치 한사람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소치는 28살 되던 해(헌종 1년) 두륜산의 <초의선사> 밑에 들어가 그림 수업을 시작한다.

추사가 소치의 예술 세계를 이룩해 준 스승이라면 초의는 화엄의 길을 잡아주고 인생의 눈을 트여준

스승이라고나 할까?

사복사(司僕寺)의 말을 타고 장안을 활보하였고 말년(79살)에는 명예직이기는 하나 통정대부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얽매지 않는 꾸밈없고 담백한 인생을 구사했던 것은 초의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다.

소치는 그의 자서에서『소시절에 내가 초의 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孤苦)하고 담적(談寂)하게 살아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술회했던 것이다.

 

초의는 대종사(大宗師)이면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났고 글과 그림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는데

특히 그의 저서 가운데 동다송(東茶頌)은 오늘날 우리 다도(茶道)의 뿌리를 찾게 한 역작(力作)으로 평가된다.

대흥사의 일지암에 기거하면서 초의의 지도를 받던 소치는 고산의 유택인 녹우당에서 빌려온 공제(恭齊)와

락서(駱西: 공제의 아들)의 화첩을 보고 대단한 감명을 받게 되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침식을 잃을 정도로 이들 그림을 모사하는데 혼신을 쏟아 부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빗기내(斜川里) 궁벽한 산골의 촌뜨기 소치에게는 개안의 깨우침을 주었으리라.

그러기에 그의 초기 작품들은 공제가 락서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으며

이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중국 화원체의 화풍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다.

벽진(碧津: 벽파진의 옛이름)을 건너기 수차례, 햇수로 5년여를 소치는 초의의 그늘에서 보내게 된다.

초의는 소치가 모사한 그림들을 추사에게 보냈는데 소치의 그림을 본 추사는『시골에 썩히기 아까우니

당장 한양으로 보내라』고 할만큼 한눈에 소치의 화재를 인정했던 것이다.

 

소치의 작품세계를 말하자면 추사의 작품을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리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잠시 추사의 작품세계와 당시의 화단을 둘러 본다면,

추사의 화풍이란 감각적 채색 위주의 북종화와는 달리 작품의 내재적 정신적 깊이를 중시하는데

흔히 말하는 서(書), 권(卷), 기(氣)라는 문기를 생명으로 하였다.

추사가 처음 소치에게 이르기를 『자네는 그림에서 서격(書格)을 터득했다고 보는가.

우리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제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는 결핍되었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운이란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고 높은 정신세계에 이르는 관조의 상태,

말하자면 문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추사가 지향하는 바는 이를테면 대상의 형상화가 아닌 정신세계의 형상화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화면에서 필선(筆線)이나 조형(造形) 등의 수식(修飾)은 가능한한 절약되고 단순해지면서

추상적(抽象的), 십학적(拾學的) 중화미가 추구되는 것이다.

추사말년에 이르러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려지게 되는데

이조 5백년 회화사의 최대 걸작으로 치는 세한도(歲寒圖)를 보면

황망한 들판에 서너 그루의 고목과 덜렁 집 한채를 그려넣고 나머지를 여백으로 가득채움으로써

모든 군더더기를 떨쳐 버린 무한의 정신세계, 나아가 선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소치가 공제의 산수를 묘사하던 수습단계에서 방황자구벽계청장도(倣黃子久碧溪靑장圖),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서울대 소장)를 그렸던 초기 추사 문하의 방작들도 뛰어났으나

서서히 추사에 물들어 그렸던 묵란, 묵목단, 묵송 특히 괴석도 등에서 수절한 재기가 들어나며

적거(謫居)한 추사를 찾아 다니며 그렸던 작품「세한도」도 추사 유배 당시 그린 그림에서 마침내 절약되고

간결한 필선의 그림등 문인화의 맛이 물씬 나는 수작들이 나왔다.

당대의 문인들이나 사대부들 간에 추사의 이런 화풍이나 서체가「완당바람」이라 일컬을만큼 유행을 본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취향에 들어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추사가 등장하기까지의 화단은 강렬한 개성으로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보인 단원(檀園) 김홍도

내지 현제(玄齊) 심사정(沈師正), 현물감이 충만한 진경산수를 그렸던 겸제(謙濟) 정선(鄭繕) 등

영, 정조조에 사실적 중화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서서히 퇴락해 가던 시절이다.

 

소치는 추사의 집에 머물면서 중국남화의 대가들의 그림을 묘사했는데

주로 묘사한 것은 황대치(黃大痴), 왕잠(王岑), 예운림(倪雲林) 등의 작품이다.

특히 황대치의 오진(吳鎭), 왕몽 등과 함께 원말 4대가 중의 한 분인데

이들에 의해 남종문인화의 바탕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형조참판의 막중한 자리에 있던 추사는 소치의 소을 맞잡아 난을 치는 법을 가르치는 등

파격한 정성을 쏟았는데 소치라는 호도 이때 추사가 지어준 것으로 황공망의 호인 대치를 본뜬 것이다.

추사는 소치가 묘사한 그림을 자랑삼아 방문하는 사람마다 나누어 주었기로

소치의 그림 솜씨는 두어달새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훗일 어전에 나아가는 영광을 입는 실마리가 된다.

소치가 추사 밑에서 수업한지 5개월여에 추사는 외척들의 권력다툼 등살에 제주도에 유배되는 비운을 맞는다.

추사는 유배되는 길에 대흥사의 초의를 처음 만나게 되고 대웅전의 현판횡액을 써 줌으로써

그의 족적을 남기게 되는데 두 거인들의 무쌍과 회한은 별나게 착잡했으리라.

 

이듬해(소치의 나이 34세) 2월에 소치는 노련한 사공도 물길을 꺼리는 험한 바다를 건너

제주도 귀양처로 추사를 찾게 되는데

소치는 뒤에 그의 저서에서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고 술회하고 있다.

험한 바다보다 상거한 추사를 찾은 관계로 나중 더 험한 지경(권력다툼의 와중)에 휩쓸릴런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넌 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이나 예술에의 집념만이었을까?

소치는 헌종 9년, 13년 등 모두 세 번에 걸쳐 바다를 건너 위리(圍籬: 탱자울타리) 안의 추사와 더불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는 등 소일하다 추사의 소개로 당시 해남진 우수사(右水使)였던

신관호(申觀浩)를 알게되고 신관호가 환조(還朝)할 때 같이 올라와

추사와 더불어 당대의 명필이며 영상(領上)이던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물게 된다.

소치가 헌종이 훈련대장을 시켜 내린 당선이나 선첩에 그림을 그려 바치길 수차례

헌종은 마침내 소치의 그림끝에 전례없는 영광을 내렸고 권상공은 이 화첩을 '소치목록'이라 제첩하여 헌납했다.

권상공은 이 해 관직을 뜨자 소치를 동소문 밖 그의 산장으로 데려다 소치로 하여금 시를 선창케 하고도

스스로 화답하는 등 소치를 지극히 아꼈는데

언젠가는 당선(唐扇)에 『그대가 소치로써 이름을 일시에 떨치니 사람들은 자구(子久: 황대치의 자)를

곧 그대의 스승으로 알고 있네』라는 시를 써 주었고

나중 추사는 이 당선(중국에서 나는 부채) 뒤에 화답하는 시를 써 보냄으로써 소치를 감읍(感泣)케 했다.

 

소치가 40세 되던 해 다시 상경하여 신관호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려 헌종께 바쳤는데

헌종은 소치를 궁으로 들게 했다.

상민이 상감을 알현한다는 법도가 없었기로 소치는 곧 훈련원의 무과초시(武科初試)를 거쳐

상감이 친히 납신 춘당대(春塘台)의 회시(會試)에 응시, 참방(參榜: 合格)하게 된다.

사장(射場)에서 소치는 침을 발라 화살에 새겨진 이름을 지워 버리고 활잡은 손을 거꾸로 쥔채

살을 날리는가하면 전독(箭篤)도 허리에차지 않고 편전(片箭)을 쏘았기로

선전관은 당장 소치를 압송하여 훈련대장에게 발고했는데

훈련대장은『그 사람은 심문하지 말라. 그렇게 쏘도록 하였노라』고 두둔했다.

이를테면 뒷전으로 등과한 셈인데

어떻든 헌종은 따로 3백질(三百秩)의 재화를 내려 객지에서 겨울을 나게 하였고

이듬해 정월 비로소 헌종을 배알했다.

 

헌종은 소치를 반갑게 맞아들인 뒤 좌우에 대립(待立)한 별관들에게 먹을 갈 게 한 뒤

친히 양털붓 한 자루를 내어주면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소치는 당선(唐扇)에 매화를 치고『향기는 꽃술에도 없고 꽃받침에도 없으니 뼈속에 사무치는 이 향기 받치오니

님이 감상하소서』라 화제를 달았다.

헌종은 소치와 무릎을 맞댈 듯 앉은채 소동파의 진품 책첩 끝에 고목과 괴석을 그리게 하는가 하면

황대치의 두루마리 산수를 마주잡아 펴 감상하기도 했다.

또 유배된 추사의 지내는 모양이랄지, 고승 초의에 대한 이야기랄지, 진도 민속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물어본 뒤 어필(御筆)로 제독(題篤)하고 어장(御障)을 누른 시법입문(詩法入門) 4권(남농 소장)을

하사했다.

 

소치는 그후 네차례나 입궐하여 고화를 품평하고 수많은 화첩에 그림을 그려 바쳤으나

이 해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소치는 과천(果川)의 추사 광주(廣州)의 권돈인, 정학연 등을 찾아다니며 표표(漂漂)히 떠돌다

49세 되던 해(철종 9년) 진도로 내려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세운 뒤 칩거(蟄居)한다.

운림산방은 예운림(倪雲林)의 호를 따 지은 것이라고도 하나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울러진

빗기내의 깊은 산골은 아침 저녁으로 연무(煙霧)가 운림을 이루었을 터이고 연화부(蓮花賦)를 지었던

소치의 시상으로도 운림이란 당호가 걸맞었을 법하다.

 

소치는 나이 70세 되던해(고종 15년) 운현궁의 석파(石坡)를 만남으로써

그의 40여년에 걸친 화필교우의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석파나 소치나 서로 얼마나 만나기를 염원했는지는 다음 대화로 짐작할 만하다.

석파: 『소치가 이승에서 나를 알지 못하면 소치가 못되지요』

소치: 『이승에서 원하던 것은 이제 다 하였습니다.』 

소치는 「카리스마」적 권력에 집착했던 석파가 아닌, 난을 치는데는 따를 이가 없었던 문인화의 거봉으로써

석파를 면전했을 것이다.

소치는 중화사적으로 볼 때 서울지방에서 조소림 안심전의 영향으로 북종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비하여

전남지방에서 남화의 골격과 명맥을 이어준 것을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의 아들 미산 허영에 이은 의제 허백련,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 손(孫) 임전(林田) 허문(許文) 4대에 이르기

까지 그의 화풍의 뿌리를 둔 수많은 가지들은 소치의 운림산방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아

오늘날 전남은 물론 서울 등 각지에서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화단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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