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2. 07:00ㆍ음악/음악 이야기
바하 가문은 17세기 후반 200여 년에 걸쳐 뛰어난 음악가들을 50명 이상이나 배출시켰습니다. 중부 독일 튀링겐에 있는 빵집 주인이며, 치터(Zither, 현악기의 1종) 애호가로 알려진 파이트 바하(1619년 사망)가 바하 가문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이트의 장남 요하네스(1580?∼1626)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의 증조부이며, 유명한 거리의 악사였습니다. 요하네스의 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는 모두 작곡가였으며 작품도 여러 편 남아있습니다. 요한 세바스티안의 조부는 요하네스의 차남인 크리스토프(1613∼1661)로,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남 게오르그 크리스토프는 바하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교회합창단장인 칸토르의 지위에 올랐으며, 쌍둥이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1695)는 거리의 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지우스의 막내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대(大) 바하,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입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는 중부 독일 루터파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하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삼촌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10살 때 부모를 잃고, 큰형의 집에서 얹혀 살면서 독일 오르간 음악의 전통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곧 큰형네 식구가 늘어나서 자립을 해야 했지요.
바하는 1700년 봄, 북부 독일의 뤼네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루터파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때 바하는 교회의 합창단원으로서 북부 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음악과 친숙해졌습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하는 이듬해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면서 연주경험을 쌓았고, 3개월 후 중부 독일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습니다.
오르간 주자는 바하가 오랫동안 희망했던 자리였습니다. 그는 교회에 있는 성능 좋은 오르간을 만지면서 열심히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낮에는 성가대를 훈련시키고 교회의 말썽장이 학생들을 관리하면서도, 밤에는 과거와 당시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하고 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사실 그의 지위는 별로 높은 편이 아니어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을 때는 하인 제복을 입고 귀족의 시중을 들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유명한 D단조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등이 이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1707년 6월, 바하는 같은 중부 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 브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전과 같이 열심히 작곡하면서 교회 칸타타에도 손을 댔고,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13년 동안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지요.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결혼한 이듬해 바하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습니다.
약 10년 간의 바이마르시절에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그리고 <코랄전주곡> 같은 오르간 작품이며, 이 시기를 '오르간 곡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바하는 교회칸타타를 거의 한 달에 한 곡씩 발표했습니다.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하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기도 했지요.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1717년 말, 그때까지 바하는 궁정의 집안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고, 희망하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바이마르 궁정악단에 싫증을 느낀 바하는 괴텐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괴텐 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하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바하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했습니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기악곡,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은 이 시기에 작곡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밝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하의 사회적·가정적 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17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하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바하는 그녀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곡집>(<프랑스 모음곡>도 포함)을,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 <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된 것입니다.
1723년 바하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 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됩니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 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를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 <마태수난곡> 등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gt;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습니다.
이 라이프치히 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많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 협주곡도 작곡했습니다.
또한 만년에는 대위법 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 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습니다. 그러나 <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습니다.
결국 눈이 먼 바하는 7월 28일 오후, 복용해 온 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별세, 성 요한 교회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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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바스티안 바하(대 바하)에게는 20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하(1710∼1784),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하(1714∼1788),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하(1735∼1782) 3명은 음악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에마누엘과 크리스티안은 전자가 '함부르크의 바하' '베를린의 바하', 후자가 '밀라노의 바하' '런던의 바하'로 일컬어질 정도로 전 유럽에서 활약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대 바하와 헨델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 음악에서 하이든, 모차르트의 고전파로 음악사를 크게 전환시킨 공로로도 유명합니다.
바하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 음악의 집대성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헬벨의 오르간 음악 작법을 습득했습니다.
또한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 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 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 프랑스식 서곡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온갖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하의 개성 속에 융화되어 긴장도 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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