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사

2010. 9. 21. 12:51음악/음악 이야기

 

 

 

 

제 1 장 고대 세계

 

 

 

1. 초기음악

 

가장 초기의 음악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 등 동방지역에서 나온 것 같다.

수메르인들의 유적에서는 하프와 리라의 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이집트에서는 플롯, 심벌,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진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근동 지역과 극동 지역의 초기 문명사회에서 음악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마법을 걸기 위하여 사원에서 연주되었고

또, 전쟁을 위한 예식과 종교의식 기간에도 연주되었다. 중국에서 음악은 시의 한 부분으로 생각되었다.

고대 기원의 또 다른 형태인 히브리음악들은 기독교가 정착되기 수천 년부터 히브리인들이 불러왔던 노래와 시편들이다.

 

 

 

2. 고대 그리스 음악

 

그리스인들은 음악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음악이라는 단어는 뮤즈(Muse)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모우자(Mousa)에서 유래하였다.

그리스인들의 노래는 시골의 축제 때에 불려졌다.

이들 노래들은 일정한 리듬이 있었고 곡식을 타작하는 동안 불리어진 것 같다.

그리스인들은 '리라‘라는 그들 나라의 악기를 가졌다.

소아시아에서는 또 다른 민족 악기인 ‘아울로스’라는 오보에와 비슷한 모양의 악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음악은 진지한 예술로 받아들여졌고 견고한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음악의 이론은 기원전 4세기경에 형식화되었다.

그리스 음악은 단선(monophonic) 혹은 하나의 성부로 된 음악이었고 전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 로마음악

 

로마에서 연주되던 음악은 대부분 그리스에서 넘어온 것들이었으며 음악은 점점 더 대규모화 되어져 갔다.

로마인들은 음악을 단지 오락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하였고 예술의 고결한 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노예들을 훈련시켜서 연주가들과 직업적인 연예인들이 되게 하였다.

 

 

 

4. 비잔틴 음악

 

그리스인들이 아울로스와 리라를 발전시킨 반면에 비잔틴인들은 궁정음악에서 중요했던 오르간만을 갖고 있었다.

비잔틴 음악은 모든 동방권의 음악처럼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유니즌(unison)으로 연주되었다.

오르간은 교회음악이 아닌 광범위한 세속음악의 악기로 간주되었다.

오르간은 서방세계에 소개된 후에야 교회의 악기가 되었다.

 

 

 

 

 

 

제 2 장 중세와 르네상스

  

 

 

1. 그레고리 성가와 초기 기보법

 

우리가 아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모든 음악은 교회나 전례음악이었다.

초기 시편들은 독창자에 의해서 노래 불려졌고 때때로 회중들은 알렐루야나 후렴부를 제창으로 부르며 끝맺음하였다.

4세기에 회중들은 두 개의 합창으로 나뉘어 차례로 번갈아서 전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교창(交唱:antipony)이라고 한다.

하나의 합창단은 성인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합창단은 여성들과 한 옥타브 높게 부르는 어린아이들로 구성되었다.

교회음악의 위대한 개혁자는 ‘대왕’이라고 불렸던 그레고리 교황 1세(Gregory1540-604)이다.

그레고리 교황은 오늘날까지도 그레고리 성가라고 불리는 종교음악의 표준 모음집을 집대성한 공로자로 인정받아 왔다

9세기경엔 가사 위에 작은 선, 점들로 표시하는 최초의 기보법인 네우마기보법이 등장 하였고

10세기경엔 악보 상에 최초의 보표를 그려 넣은 디아스테마기보법이 생겨나 현대 기보법에 밑거름을 제시하였다.

12세기가 끝날 무렵에 4선보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기발한 발명은 중세의 위대한 음악이론가인 귀도다레쪼(980?-1050)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2. 투르베르, 투르바두르, 미네징거, 마이스터징거

 

음악은 800년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샤르마뉴에 의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유명한 가수들을 불러왔고 그의 제국에 많은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11세기 말경에 프랑스의 남쪽 프로방스 지역을 중심으로 투르바두르(troubadour)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고향에 머물고 있는 귀족들이거나 이 성 저 성을 떠도는 가수들이었다.

그들은 영웅적인 기사들에 관한 노래와 아름다운 시를 만들었다.

투르베르(Trouvere)는 북쪽 지역의 투르바두르이다.

독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운동이 12세기에 시작되었다.

이들 예술가들은 ‘미네징거’(minnesinger) 라 불렸고 그들은 궁정의 사랑을 노래하였다.

미네쟁거의 전통은 중산 계급의 구성원들인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에 의해서 15-16세기를 이어간다.

그들은 작곡도 했고 가창 학교도 갖고 있었다.

 

 

 

3. 다성부의 출현(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 / 약1150-1300)

 

대략 1000년경 전에 사람들은 2성부로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2성부를 노래하는 것을 오르가눔(organum)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다성부 음악의 시작이었다.

12세기 파리의 레오냉(Leonin)과 다음 세대의 패로탱(Perotin)은 이러한 오르가눔을 작곡한 최초의 전문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작품에서 선율적인 중추가 된 것은 항상 그레고리 성가였다.

이러한 다성부 음악의 시작을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 구예술)라고 부른다.

그레고리 성가는 예부터 현재까지 교회선법으로 노래되었다.

이러한 선법은 궁극적으로 고대 그리스 음악에서 나왔고 현재에도 그리스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조성 체계는 서서히 발전하면서 바로크 초엽에 와서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지만,

수세기 동안 모든 음악은 선법 체계로 작곡되었다.

 

 

 

4. 아르스 노바(ARS NOVA / 신예술 / 약1300-1400)

 

다성부 음악이 출현하면서 정량기보법의 체계는 서서히 발전하였고 프랑코와 드 비트리에 의해서 처음으로 체계화되었다.

아르스 노바는 이 시대의 최의 작곡가인 기욤드 마쇼(1300-1377)의 작품들에서 주로 명백히 유지된다.

그는 당김음과 셋잇단음표를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마쇼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의 ‘노틀담미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이 쓴 최초의 완전한 구성의 미사였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는 화가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란디니(1325-1397)였다.

어린 시절부터 눈이 안 보여서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는 뛰어난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였다.

그 당시에 그려진 회화들에서 우리들은 많은 악기들이 이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올, 하프, 잘터리, 류트, 허디거디, 트럼펫, 드럼, 차임, 심벌, 백파이프, 리드, 호른, 플륫, 등이

선호되었던 악기는 비올이지만 오르간 역시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다성부 음악은 4도와 5도의 음정으로 시작했고 이것이 음향적으로 가장 완벽한 음정이었기 때문에

교회도 오랫동안 이 양식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인기 있는 다성부 음악은 우리 귀에조차 딱딱한 4도와 5도보다 더 감미롭게 들리는 3도와 6도의 음정을

선호하였다.

 

 

 

5.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6. 종교개혁 국가들의 음악

 

 

종교개혁의 국가들인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영국에서, 16세기는 가톨릭 미사의 종교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종교음악의 시작을 가져왔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음악을 ‘분노, 불경함 그리고 다른 악덕들을 사라지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선물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음악의 이러한 정의는 대단한 포용력이 있었다.

루터는 예배자들이 신교도들의 교회 예배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이것이 신교도 코랄(chorale)의 기원이었다. -코랄은 교회의 예배자들이 부르는 단순하고 힘 있는 노래이다.-

그러나 개혁자들 모두가 음악을 찬성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제네바의 칼빈은 시편을 유니즌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했지만,

스위스 쮜리히의 즈빙글리는 교회에서 음악을 금지시켰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 운동은 아침과 저녁의 한때에 기도자들이 영어로 노래하는 서비스(Service)와,

영국국교의 모테트와 동일하고 독일 코랄과 유사한 앤섬(Anthem)을 만들었다.

 

 

 

7. 옛 악기들과 새 악기들

 

16세기경에 있었던 일부 악기들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연주에 사용되고 있다.

독일의 밴드 단원들은 트럼펫, 트럼본, 코르넷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악기들은 클라비코드와 합시코드, 특히 오르간과 같은 건반이 딸린 악기들이었다.

합시코드는 이탈리아어로는 클라비쳄발로라 불렀다.

활로 연주되는 악기들 가운데서는 비욜(viol)이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비욜은 우리의 더블베이스와 친숙한 서양 배 모양을 갖고 있으나 크기는 다양하다.

이 악기들은 무릎 위나 사이에서 지탱된다. <※여기에서 비욜라 다 감바(viola da gamba)라는 표현이 나왔다.>

비욜족은 사람들의 성부 계열처럼 소프라노, 알토, 테노르, 베이스 비욜로 구성되었다.

16세기는 바이올린의 출현으로 특징 지워진다.

바이올린은 아마도 악기들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악기일 것이다.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35생)를 현대 바이올린의 창조자로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바이올린은 1480에서 1550년 사이의 옛날 비욜 악기에서 점차 발전되었다는 설(設)이 맞을 것 같다.

니콜로(Niccolo)는 아마티가(家)에서 가장 유명하다. 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최상의 바이올린 몇 개를 남겼고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제작자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의 스승이 되었다.

아무도 그들 이후에는 보다 나은 바이올린을 만들지 못하였다.

바이올린은 세상에서 개량될 수 없는 몇 개 안 되는 악기중의 하나이다.

또 다른 인기 있는 악기는 류트(lute)인데 몸체는 만돌린 모양을 닮았다.

류트는 르네상스시대에 대단히 사랑받는 악기였다.

르네상스 기간 동안에 사용된 악기의 기보법 체계는 ‘타블래츄어(tablature)'라고 불렀다.

타블래츄어는 눌러야 할 줄, 지공, 오르간 건반을 문자, 숫자 그리고 다른 부호들로 지시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기보법처럼 실제의 음들을 가리키지는 못했다.

 

 

 

 

 

제 3장 바로크 시대(1600-1750)

 

 

 

1.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탄생

 

이 시기는 가장 위대한 음악 시대로 남아 있는 고전음악 시대의 앞에 있어서 음악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크 시대의 초엽에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가 탄생하였고 이 시대의 말경에는 소나타와 심포니가 탄생하였다.

이 시대의 에 작곡된 음악은 ‘조성’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초기 바로크의 위대한 음악가인 몬테베르디(1567-1643)는 그의 음악 속에서 인물들을 연출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를 오페라의 창시자라고 하며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1597년 문학과 예술인의 모임인 카메라타의 회원 시인 오타비오 리누치니와

작곡가 야코포 페리의 창작품(Dafne)으로 태어났다.

이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예술로 천재 몬테베르디를 위한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오페라는 처음 궁정 극장에서 연주되다가 1637년 베니스에서 처음 공공 오페라 연주장이 개관되었고

후에는 베니스 지역 모든 교회들도 그들의 오페라 연주장을 갖게 되었으며 누구나 돈이 있으면 입장권을 살 수 있었다.

베니스인들은 실제로 오페라 광들이었다.

몬테베르디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 카발리, 그리고 그와 동시대 인물인 마르크 안토니오 체스티(1623-1669))가 뒤를 이었다.

무대의 규모가 큰 정가극(opera seria)은 진지하지만 반드시 비극적이지는 않고,

할리우드 영화처럼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한다.

무대의 진짜 영웅들은 카스트라토이다.

그들은 맑은 소프라노나 알토 소리를 내는 거세한 젊은 남자 가수들로 남성의 힘 있는 폐활량과 후두를 갖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트라델라(1642-1682)와 알렉산드로 스칼라티(1660-1725)는 오페라, 칸타타, 오라토리오를 작곡 하였다.

오라토리오는 무대 장치를 사용하지 않아서 청중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칸타타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함께 한다. 오라토리오는 대화체 형태로 된 성서적 내용의 음악적인 이야기였다.

스칼라티의 이탈리아 서곡은 3악장(알레그로, 아다지오, 알레그로)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 작품은 고전 교향곡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초기 바로크 시대에는 오르간과 합시코드, 이 두 개의 악기들을 위한 많은 음악들이 작곡되었다.

위대한 작곡가로는 즉흥연주로 유명한 지로라모 프레스코발디(1583-1644)가 있었다.

 

 

 

2. 소나타의 탄생

 

바로크 시대에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탄생뿐만 아니라 기악 음악도 시작 되었다.

다양한 음악 형식들-소나타, 조곡(suite / 몇 개의 춤곡으로 구성), 콘체르토 그로소(두 개나 그 이상의 독주 악기들로 된

한 그룹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등이 나타났다.

소나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아르칸젤로 코렐리(1653-1713)가 있었다.

코렐리는 또한 최초의 진정한 거장이었고 바이올린을 중요한 독주 악기로 확립시킨 소위 바이올린 연주의 고전악파의 창립자이며

그의 테크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이올린 교수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

18세기 전 시기까지는 ‘바소 콘티누오’ 혹은 ‘통주저음’이라고도 불리우는 숫자저음은 거의 모든 합주음악의 기초였다.

 

 

 

3.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연주의 발전은 곧 콘체르토 그로소를 능가하는 독주 협주곡의 발전을 가져왔다.

륄리와 토렐리(1650)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연주되는 바이올린을 위한 독주 협주곡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협주곡은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의 형식을 갖췄고

하이든과 다른 작곡가들이 주로 미뉴엣이나 스케르쪼인 4악장을 덧붙일 때까지 교향곡에서도 같은 형식이 지속되었다.

안토니오 비발디(1680-1740)는 협주곡에서 독주 부분을 확대했고 바이올린을 합주에서 주된 악기로 취급하였다.

바흐는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해서 비발디의 많은 협주곡들을 오르간과 합시코드로 편곡하였다.

 

 

 

4. 17세기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바로크 음악

 

 

프랑스의 바로크

 

이탈리아 사람들은 무대에서 격렬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끊이지 않는 감미로움’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을 좋아 하였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다.

아베 피에르 패랭(1628)은 프랑스 최초의 희극을 작곡 하였고

장 뱁티스트 륄리(1632)는 프랑스 음악극을 창시하고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독일의 바로크

 

 한스 레오 하슬러(1564-1612)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최초의 독일 작곡가였다.

 미카엘 프라에토리우스(1571-1621)는 신교도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바로크음악의 실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음악 이론과 악기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논문을 썼다.

그러나 당시의 가장 위대한 독일 작곡가는 하인리히 쉬츠(1585-1672)였다.

그는 베니스에서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에게 배웠고 독일로 돌아가 독일 바로크 초기 음악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주로 교회음악을 썼다.

쉬츠의 가까운 동료들로 요한 헤르만 샤인(1586-1630과 사무엘 샤이트(1587-1654)가 있었다.

 

※독일 초기바로크의 3S: 쉬츠, 샤인. 샤이트

 이 세기 동안 독일에는 많은 작곡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중 프로버거파헬벨은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고 하프시코드를 위한 아름다운 조곡들을 작곡하였다.

또 툰더, 로젠밀러, 베크만과 같은 북독일 작곡가들은 오르간 작품과 신교도 교회음악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마도 그들 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일 것이다.

그의 오르간 음악과 칸타타는 유명해서 바흐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뤼벡크까지 가는 긴 여행을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살아 넘치는 상상력과 바흐도 틀림없이 감동했을 심오함이 나타난다.

독일 리트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나, 미국의 노래와는 달랐다.

전형적인 독일 리트는 자연의 사랑과 낭만주의를 반영하여 주었고 이 형식을 쓴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아담 크리거(1634-1666)였다. 리트는 독일 작곡가들, 특별히 19세기 작곡가들이 좋아하는 예술 형식이 되었다.

 

 

영국의 바로크

 

 헨리 퍼셀(1659-1695 / 36세)은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오랜 시간 동안 영국 음악의 마지막 거장으로 남았다.

그는 모차르트(35세)보다 조금 더 살았지만 작품량은 대단히 많다.

퍼셀은 직업적인 교회음악 작곡가였지만 무대에 매료되어 연극을 위한 많은 부수음악을 작곡하였다.

바흐는 퍼셀의 몇 개의 작품들, 이들 가운데 토카타 같은 작품을 모방할 정도로 퍼셀의 뛰어난 작곡법에 감동받았다.

퍼셀은 몬테베르디와 쉬츠에 비교되어지며 그가 지내온 세기의 위대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퍼셀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5. 바로크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작곡가들

 

 도메니코 스칼라티(1685) 알레산드로 스칼라티의 아들.

바흐, 헨델과 같은 해 태어남.

하프시코드의 대가로서 대담한화성과 전조를 사용한 하프시코드 소나타에서 명성을 얻음.

 프랑스와 쿠프랭(1688-1733) ‘대왕’이라고 불리며 로코코 예술의 가장 위대한 클라브생 연주자이며 작곡가.

쿠프랭은 감정, 풍경, 분위기를 음악적으로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음악에서의 ‘최초의 인상주의자’라고 부른다.

 장-필립 라모(1683-1764) 륄리 이후, 가장 위대한 프랑스 음악가.

 ‘소리의 색채감’을 발전시킨 뛰어난 장인이었으며 색채감 있는 소리는 후일 드뷔시와 라벨에 의해서 완성을 보게 된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

여러 세대의 음악 애호가, 학자, 비평가를 감동시킨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바흐는 음악의 끝이다. 더 이상 그에게서 나올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단지 그에게 이끌려 갈 뿐이다.”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바흐는 음악의 건축가 이다.

그러나 바흐의 음악 구조는 차거나 생명이 없지 않고 따뜻함과 정감으로 채워져 있다.

음악적으로 말하면, 그는 수학을 시에 결합시켰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등 소수의 작곡가들만이 바흐를 이해하였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초연된 지 100년 후인1829년에 지휘하였고 연주는 대단한 감동을 주어

 1850년에 바흐학회를 창립하게 하는 운동을 출발시켰다.

바흐는 가장 위대한 대위법의 작곡가이다.

수많은 기악곡과 종교음악인 코랄을 400개나 썼고 요한수난곡, 마태수난곡, B단조미사, 그리고 200개 이상의 칸타타를 썼다.

 

 죠지 프리데릭 헨델(1685-1759) 바흐와 같은 해, 같은 독일 태생이나 영국에 정착하여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 보급에

힘썼으며 궁정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페라, 앤섬, 수난곡, 그리고 많은 성악과 기악 실내음악 협주곡과 관현악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오라토리오에서 걸작(‘메시아’ 등)을 남겼다.

 

 

 

 

 

제 4장 고전주의음악(1750-1830)

 

 

1. 18세기 악파

 

프랑스에서 초기 18세기는 오페라 코미크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오페라 코미크는 노래와 대화체가 있는 음악 작품으로 정의되며 프랑스에서 시작한 오페라 코미크는 영국으로 퍼져 나갔다.

기악 음악도 새로운 발전 단계를 가져오고 있었다.

많은 작곡가들은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후에는 독주용의 하프시코드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작품을 내어놓았다.

처음엔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 음악을 작곡하던 엠마누엘 바흐는 후엔 당시로 보면 새로운 혁신적 악기인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하였다.

소나타 형식은 대부분의 기악 음악의 주된 원리가 되었다.

소나타 형식은 초기 교향곡을 유행하게 만들었고 초기 교향곡은 고전주의 소나타, 현악4중주, 교향곡의 음악 구조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교향곡의 전반적인 발전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소위 비엔나 악파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떠올린다.

오랫동안 오스트리아는 마치 그리스인들이 일찍이 연극을 전한 것처럼, 작곡가들을 세상에 배출하였다.

오스트리아 밖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악파는 만하임에서 발견된다.

이 악파의 대표적 인물은 요한 슈타미츠로 베토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작곡가로 간주된다.

그는 당시의 오케스트라를 최상의 오케스트라로 훈련시켰고 표준적인 관례가 된 많은 기법들을 도입하였다.

이후로 마침내 고전시대의 문이 열린다.

 

 

 

2.고전시대의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1714-1787)

 

오페라 개혁자. 글룩은 서정극을 개혁해서 참된 음악극을 만들었다.

글룩이 없었다면,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도 우리가 아는 그들이 아니었을는지 모른다.

글룩은 시와 음악의 통일성을 이해한 최초의 작곡가였다.

 

 

 프란츠 요셉 하이든(1732-1809)

 

우리 모두가 하이든의 음악을 들었다.

과거 30년 동안에 실로 ‘하이든의 르네상스’라고 부를 만큼 많은 하이든의 음악이 재발견되었다.

요셉 하이든은 천재들의 시대의 문을 연 천재이다.

하이든은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였는데 두 개의 중요한 분야 즉, 현악4중주와 교향곡에서

하이든은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출발하였고 이 형식들을 완성 단계로 발전시켰다.

하이든은 77세까지 사는 동안 거의 매일 작곡했으며 놀랄 정도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104개의 교향곡, 84개의 현악 4중주, 52개의 피아노 소나타, 다양한 악기를 위한 20개 이상의 협주곡 등.

하이든은 민속 선율과 그의 모국의 대중 선율을 사랑하였다.

그는 헝가리의 집시음악과 그들의 싱코페이션 리듬을 자주 들었으며

실내악과 교향곡의 미뉴에트와 빠른 악장에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라브 선율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하이든은 지적이면서도 정적으로 작곡 하였다.

하이든은 깊은 신앙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모든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낙천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고

그의 음악은 즐거움의 여운을 주면서 내적으론 긴장감이 있지만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해결된다.

그의 음악에는 깊은 우수의 순간이 있지만 결코 베토벤의 음악처럼 전면에 흐르는 우수는 아니다.

하이든은 다른 사람에게 풍겨주는 향기를 갖고 있다.

고도의 숙련과 음악적 역량에도 자만하지 않고 하이든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겸허한 자세를 언제나 지켰다.

하이든의 두 편의 위대한 오페라- ‘천지창조’, ‘사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모차르트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괴로움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작곡가이다.

그는 하이든처럼 행복한 낙천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모차르트는 그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작곡가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의 영혼을 표현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이미 여덟 살 때에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등을 뛰어나게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작곡에 대해서도 완벽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벨칸도 혹은 ‘아름다운 창법’의 나라, 이탈이아에서 모차르트는 모든 악기들 중에서 가장 표현력 있는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에 매료되었고 그 이후로 노래는 항상 모차르트의 음악적 상상력을 지배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극적 본능이 목소리의 경이의 세계인 오페라로 그를 인도했다.

모차르트는 또한 하이든에게서 악기들도 사람들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인간의 감정은 악기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모차르트는 단순한, 심지어는 평범한 프레이즈나 선율을 사용하여 생명력으로 가득 찬 완전한 형태의 걸작으로 변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마치 어제 작곡된 것처럼 시간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다.

모차르트의 독주곡, 실내악, 바이올린 협주곡 혹은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혹은 오페라 등 어떤 음악을 듣더라도 상관없이

어디에 가든 우리는 모차르트를 만날 것이고, 모차르트는 우리의 가슴에 와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아름다운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

 

베토벤은 질풍노도시대(구세대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혁신과 구습에 대항하는 개인주의의 혁신을 상징)에 어울리는

주도적인 혁신적 작곡가였다. 그는 구습에 항거하였다.

베토벤은 좀처럼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창작하는 동안 항상 괴로워하며 스스로 어려움을 만들었다.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쉽게 영감이 떠올라서 한 작품을 곧바로 쓰고 그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잉크는 연주가들의 악보에서 여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계속 변화시키고 수정하였다.

베토벤의 공책을 보면 마지막 판이 완성되기 전에 그가 수 년 동안 하나의 주제를 스케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베토벤은 순수한 고전주의의 기법으로 작고하여 단순하지만 장대한 구조를 건축하였다.

베토벤은 시간을 초월하는 예술과 인생의 규칙 이외에 또 다른 규칙이란 없다. 베토벤은 관습에 억매이지 않았다.

마지막 몇 년 사이에 베토벤은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다.

베토벤은 엄청난 의지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곡하였다.

이 기간에 베토벤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들, 제9번 교향곡, 장엄미사, 그리고 절대음악이라고 불리는 5개의 위대한 마지막

 4중주들 등, 그의 위대한 걸작들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들을 그의 귀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작품들이 정확히 어떤 소리가 날지 알고 있었다.

베토벤은 9개의 교향곡, 32개의 피아노 소나타와 17개의 4중주와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장엄미사 등

많은 성악곡 등을 작곡하였다.

 

 

 슈베르트(1797-1828)

 

슈베르트 가곡의 몇 곡은 불멸의 노래가 되었다. 그의 선율은 매우 대중적이다.

슈베르트 가곡은 다른 작곡가들의 가곡과는 다르다. 그의 가곡은 신적인 영감이 있다.

그의 가곡은 인간이 노래하는 한 살아 있을 것이다.

베토벤과 교향곡과의 관계는 슈베르트와 가곡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열정적으로 경애하였지만 베토벤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초인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발자취를 따라갔고 베토벤의 천재성을 다른 ‘낭만적인’방법으로 표현 하였다.

슈베르트는 풍부한 매력과 영감이 있는 선율을 갖고 있었고 색채감과 화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낭만주의자라고 불리지만

슈베르트는 고전음악 형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낭만주의의 고전주의자, 혹은 고전주의의 낭만주의자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슈베르트의 가곡에서는 누구도 가사가 어디서 끝나고 음악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시와 음악은 경이로울 정도로 예술적인 통일성을 이루며 짜여 있다.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반주 없이 노래해도 마찬가지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순수한 기쁨의 노래이다.

작품: 연가곡 ‘겨울 나그네’, ‘물레방아간의 아가씨’, 불멸의 가곡 ‘마왕’, ‘미완성 교향곡’, ‘교향곡C장조’ 등.

 

 

 

 

3.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오페라

 

 

 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

모차르트와 베토벤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달성하였다.

베버는 독일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베버는 자연의 원동력이 물과 숲, 마법사와 요정의 선과 악의 ‘오리리안테’, ‘오베론’. 등

 

죠아키노 로시니(1792-1868)

로시니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무색케 할 정도로 이 시대에 있어서 또한 유명하였다.

그의 작품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비교되는 오페라 부파의 걸작이다.

그 외 작품: 오페라 ‘신데렐라’, ‘월리엄 텔’.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

71편의 오페라와 많은 종교음악 기악음악을 작곡하였다.

도니제티는 우아한 양식을 가졌고 성악을 감정 표현의 주된 악기로 만드는 벨칸토 기법을 발전시켰다.

작품: 오페라 ‘돈 파스콸레“

 

 빈첸조 벨리니(1801-1835)

벨칸토 오페라의 진정한 대표자.

마리아 칼라스와 같은 최상의 연주자들 때문에 벨리니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뛰어난 걸작이 되었다.

만일 벨리니가 좀 더 살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의 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지아코모 마이어베어(1791-7864)

대단히 재능이 있는 음악가이자 뛰어난 흥행사였던 마이어베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시도하기로 다짐하고

화려한 의상, 악마, 환영(幻影), 그리고 대포의 폭음을 보여주는 그랜드 오페라를 창안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랜드 오페라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바그너, 베르디, 조금 후의 드뷔시는 이런 종류의 장대한 작품이 주는 공허함에 대항하는 작업을 하였다.

 

 

 

 

 

 

제 5장 낭만주의음악(1830-1890)

 

 

 

그랜드 오페라가 파리에서 청중을 매료시키는 동안, 이웃 독일에서는 낭만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낭만주의는 문학 분야에서 기원된 것으로,

음악에서는 멘델스존, 슈만, 쇼팽, 리스트, 그리고 프랑스인이지만 베를리오즈 등에 의해서 주도된다.

낭만주의자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기피하였다.

그들은 시적인 성격, 감상적인 분위기, 일관된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음악을 좋아하였다.

 

 

 

낭만주의 작곡가들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리(1809-1847)

 

유명한 유태계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의 손자이자 베를린에서 활동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다.

멘델스존 가는 여러 세대 동안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멘델스존이 세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투명하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서곡으로 만들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멘델스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멘델스존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을 재발견하고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지휘하였다.

5개의 교향곡, 무언가,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 아름다운 곡을 남겼다.

 

 

 로베르트 슈만(1810-1856)

 

모든 낭만 작곡가들처럼, 슈만도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였다.

슈만은 괴테, 장 폴, 바이론을 좋아했고, 피아노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시를 썼다.

그는 재능이 많은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몽상가였고 당대의 뛰어난 여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비크와 결혼하였다.

슈만은 결혼 후 수많은 훌륭한 곡을 작곡하였지만 우울증과 정신착란증으로 인해 수용소에 격리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슈만은 오늘날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들은 그가 어두움과 밤, 복잡한 리듬, 격정적인 클라이맥스를 사랑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프레데릭 쇼팽(1810-1849)

 

프랑스 태생의 아버지와 폴란드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두 나라는 각기 그들 나라의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지역의 음악가들은 이 낭만적인 천재의 아름다운 음악에 매료된다.

쇼팽은 피아노의 어린 신동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파리에 정착한 쇼팽은 뛰어난 연주자로서 명성을 높이면서 귀족 사회의 우상이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프랑스 여인이었던 시인 죠르즈 상드와의 로맨스는 책과 영화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쇼팽은 고전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작곡가였다.

그의 예술은 피아노를 지향하였고, 이를 위하여 사람들이 즉시 쇼팽의 작품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자신만의 화성체계를 가진

대단히 개성적인 양식을 창안하였다.

쇼팽의 전주곡(prelude), 야상곡(nocturn), 연습곡(etude), 환상곡(fantasy)을 들어보면,

촛불이 켜 있는 우아한 살롱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이나 젊은 연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쇼팽은 우아하고 향수를 느끼게 하는 부드러운 작품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혁명 정신을 일깨우는 격정적인 음악도 작곡하였다.

(쇼팽의 연습곡 ‘혁명’은 2차대전시 폴란드에서 비밀리에 연주되는 일종의 국가가 되었고

반대로 독일에서는 쇼팽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도 처벌하였다.)

쇼팽의 음악은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 같은 저명한 폴란드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면 마술이 되어버린다.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쇼팽과 피아노의 관계는 전시대를 통틀어 바이올린의 가장 유명한 거장인 파가니니와 그의 악기와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업적에 대하여 전 세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여전히 감탄한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작품에서는 악마적인 저음과 마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불행히도 그의 작품들은 너무나 어려워서, 단지 거장들만이 작곡가의 의도대로 연주할 수 있다.

파가니니는 이전의 어떤 연주가들보다 바이올린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예외적으로 뛰어난 귀를 가지고 있었고, 조율되지 않은 현들로 완전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는 신동으로 음악을 시작해서 대단히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나,

36세에 그는 화려한 연주자 생활을 포기하고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수백 곡이 넘는 그의 피아노 작품에서 리스트는 피아노의 기법을 혁신하였다.

리스트의 작품들에서 피아노는 풍부한 톤 칼라와 대단한 힘으로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향을 내기 시작하였다.

모든 낭만주의자들처럼 리스트는 ‘즉흥적인 창작’을 하는 낭만적 이상에 근접한 예술적 기교와 즉흥성의 효과를 확신하였다.

교향시 작곡.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

 

베를리오즈의 위대함은 우리 시대에 확고히 구축되었다.

베를리오즈와 동시대의 작곡가들은 그와 의견이 일치할 수 없었다.

베를리오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비전통적인 양식을 사용하였다.

그는 기괴하고 충격적인 주제를 선호하였고 이러한 주제를 강렬하고 감동적인 음악으로 옮겼다.

베를리오즈는 표현의 대가이다.

그는 부드러운 속삭임에서 야수 같은 고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거칠거나 영웅적인, 또는 전율을 일으키는 주제들을 선택하여 만든 그의 교향곡들을

 ‘기악 드라마’ 혹은 ‘목소리 없는 드라마’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가 현대의 관현악 기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바그너보다 많은 찬사와 비방을, 숭배와 모욕을 받은 작곡가는 없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바그너주의자에게 있어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반 바그너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그는 예술에 있어서의 모든 나쁜 것, 과장된 감정과 기념비적인 권태를 대표한다.

아마도 바그너는 부분적일지라도 이 모든 것에 해당될 것이다.

바그너는 특별한 삶을 살았던 비범한 예술가였다.

바그너의 가장 위대한 음악적 공헌은 ‘총체예술, 또는 ’음악극‘으로 알려지는 새로운 양식의 창안이다.

총체예술은 시와 음악, 드라마와 장면, 빛과 소리, 노래와 연기가 통일체를 이루며 혼합되는 것을 말한다.

대표 오페라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 마이스터징거, 탄호이저 등

 

 

 쥬세페 베르디(1813-1901)

 

베르디는 91세의 나이로 생을 거의 마감할 때까지 우리에게 명작의 오페라를 선물하였다.

(나부코, 아이다, 리골레토, 라트라비아타, 일트로바토레, 오텔로 등)

베르디는 바그너처럼 청중들을 압도하려고 하지 않고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모든 감정이 표현된 음악에 젖어들도록 하였다.

그래서 베르디의 음악을 모든 사람들은 쉽게 이해한다.

대표작 중 하나인 ‘아이다’는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위하여 위촉받아 쓴 작품이고

그의 나이 73세 쓴 ‘오텔로’는 젊은이의 가슴을 가진 지혜로운 노인의 걸작으로, 완벽한 오페라이기도 하다.

80세에 작곡한 세익스피어의 희곡 ‘팔스타프’는 가장 뛰어나 음악 희극의 보고에 속한다.

팔스타프의 제 1악장은 아마도 베르디가 쓴 가장 훌륭한 음악일 것이다.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죠르즈 비제(1938-1875)

비제의 대표작 ‘카르멘’은 베리스모(극적인 사실)양식으로 작곡 하였고, 이것은 오페라의 완전한 악파를 만들어 내었다.

카르멘은 오늘날 몇 개 안되는 완벽한 오페라들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찰스 구노(1818-1893)

대표작 ‘파우스트’.

 

질레 마쓰네(1842-1915)

대표작 ‘마농’.

 

까미유 생상(1835-1921) 대표작 ‘삼손과 데릴라’.

 

 

 

또 다른 낭만주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1822-1890 / 벨기에)

오르가니스트로 시작하여 후에 아름다운 오라토리오, 실내악, 교향시, 그리고 유명한 D단조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프랑크는 대위법 음악의 대가이며 항상 신을 찬양하는 깊은 신앙인이었다.

 

자크스 오펜바흐(1819-1880 / 프랑스)

프랑스 오페레타를 써서 인기 있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의 오페레타는 주로 거만하고 잘난체하는 부자와 권력가들을 조롱하는 내용들이다.

대표작: 'Tales of Hoffmann'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자이다.

그의 영혼에는 우수가 그리고 그의 삶에는 항상 갈망이 있었다.

베토벤은 그의 우상이었고 대위법의 옛 작곡가들을 사랑하였다.

1876년과 1885년 사이에 작곡된 브람스의 네 개의 교향곡은 세계 도처에서 연주되고 있다.

브람스는 다른 작곡가들을 칭찬하는 관대한 작곡가였다.

한스 폰 뵐로우는 바흐,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를 ‘위대한 3B'라고 불렀다.

 

 

안톤 부르크너(1824-1896)

 

그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작곡가이며 4B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르크너와 동시대인들은 음악이 길고, 힘 있으며 기념비적인 그의 교향곡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를 현대의 베토벤이라고 생각한다.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에서는 베토벤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신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곡하기를 원하였다.

부르크너는 9개의 교향곡과 위대한 미사곡들을 작곡하였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

 

흔히 부르크너와 비교된다.

말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뛰어난 지휘자들 중의 한 사람이자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영광 속으로 재창조한

완벽한 양식의 예술가이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창작 기법인 관현악 편성법의 대가이다.

작곡가들이 그들의 스코어를 보다 면밀하게 주석을 달기 시작한 때는 불과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증폭되는 19세기 말경이다.

하이든이나 베토벤은 연주자들에게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고 말로 설명을 하곤 하였다.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음색을 원해서 자신이 바라는 효과를 악보에 적기 시작한 사람은 바그너이다.

구스타프 말러의 스코어는 모든 스코어들 중에서 가장 정확한 표시를 갖고 있다.

가장 유명 교향곡: ‘대지의 노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

멘델스존과 브람스의 영향 아래서 창작을 시작하였고 후에는 바그너의 영향을 거부하는 저항이 있었으며,

그의 진정한 이상이었던 빛나고 명료한 모차르트의 양식으로 작곡 하였다.

 

지아코모 푸치니(1858-1924)

전에 없는 인기를 누렸던 푸치니는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냉대 받았지만,

음악과 노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랑받았다.

푸치니는 아름다운 오페라를 작곡하는 비법을 알았다.

그의 작품들은 선율의 독창성, 기묘한 화성, 아름다운 관현악 편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같은 민족인 베르디처럼, 푸치니는 훌륭한 아리아들을 작곡하였고 화음과 음정으로 경이로움을 만들어 내었다.

대표작: 라보엠 나비부인, 토스카, 투란도트 등.

 

피에트로 마스카니니

대표작: 카발리아 루스티카나

 

 

 

 

 

 

제 6장 민족 음악

 

 

 

1. 인상주의 작곡가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잇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태동은 인상주의이다.

미술에서 인상주의 작가들은 빠른 순간 동안에 하나의 주제를 본 것처럼 그것을 다룬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인상을 그의 캔버스에 옮긴다.

문학과 음악에서도, 인상주의는 유사한 결과를 가져온다.

음악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인상주의 음악가들은 르느아르, 모네가 색과 빛을 사용한 것과 똑같이 음과 악상적인 뉘앙스를 사용한다.

고전주의자들의 ‘형식’ 대신에 인상주의에는 ‘분위기’가 있다.

트럼본은 약음기를 사용하고 목관악기는 낮은 음역을 연주하며 드럼은 약하게 소리 내고 바이올린은 섬세한 주제를 연주한다.

관현악 편성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화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희미하다.

인상주의는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발생한 일종의 프랑스 운동이다.

 

 

 

 클로드 드뷔시(1862-1918)

 

인상주의의 선두자적인 작곡가였다.

그는 화성 조직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고 이를 완성하였다.

드뷔시의 음악은 이미 우리의 감각으로는 완전히 현대적이다.

그의 음악은 민감하고 끊임없이 활동적이며, 시적으로 고무되어 있고, 항상 호기심을 자아낸다.

드뷔시의 음악은 매우 아름답다.

드뷔시는 우리가 사는 세기의 전환점에 나타난 유일하고 진정한 음악의 발명가였다.

드뷔시 이후의 모든 작곡가들은 그들이 인정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모리스 라벨(1875-1937)

 

드뷔시의 인상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풍요롭게 하였다.

그의 음악에서 보이는 인상주의적인 음색 때문에 드뷔시의 ‘모방자’라고 오랫동안 믿어져 온 것 같다.

오늘날 라벨은 자신의 화려한 양식을 발전시킨 재능 있는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고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다.

라벨은 명연주가들을 위한 뛰어난 음악을 작곡하였고

우리 시대에 이러한 작품들은 기교적으로 완벽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

라벨은 기교를 뛰어넘은 작곡가이다.

그는 최상의 관현악 효과를 창조한 훌륭한 음악가이다.

대표작: La Valse, Bolero 등.

 

 

 가브리엘 포레(1845-1924)

 

포레는 신비롭고 투명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프랑스인들은 그의 양식을 ‘soupless(신비로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음악은 슈만과 프랑크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가곡들은 우아하고 정교하다.

 

 폴 뒤카(1865-1935) 프랑스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로 불린다.

 플로 슈미트(1870-1959) 라벨의 동기동창, 포레에게 작곡을 배웠다.

 에릭 사티(1966-1925)

 앨버 러셀(1869-1937)

 

 

 

2. 러시아 작곡가들

 

러시아 작곡가들이 러시아의 민요를 개발하기 시작하던 19세기에 ‘국민주의’음악이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시작되었다.

 

미카엘 이바노비치 글린카(1804-1857)

독일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음악을 듣고 많은 러시아 음악가들은 그들도 다른 국가들처럼, r들도 지금 자신의 국민음악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알렉산더 다르고미르스키

 

안톤 루빈슈타인

 뛰어난 피아니스트, 멘델스존과 슈만의 모방자.

 

밀리 발라키레프(1837-1910)

독학의 작곡가, 글린카를 존경하였고 새로운 러시아의 양식으로 작곡 하였다.

 

세자르 큐이

 

알렉산더 보로딘

 

모디스트 무소르크스키:

그의 음악에는 러시아의 영혼이 있다.

 

니콜라스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881)

작품의 영감을 찾기 위하여 러시아의 역사와 민요를 이용하였다.

 

차이코프스키 (1840-1893)

 

가장 널리 알려진 작곡가이자 오늘날의 연주 홀과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들 중 한 명.

그는 철저한 러시아 작곡가이면서 또한 국제적인 작곡가이다.

그의 ‘비창’ 교향곡은 이전의 어떤 교향곡보다 지휘자와 청중들이 모두 좋아하는 가장 효과적인 교향곡이다.

차이코프스키를 ‘러시아의 베토벤’이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히 과장된 표현이다.

오직 하나만의 베토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훌륭하고 인기 있는 음악가이다.

그의 음악은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다.

 

 

러시아의 또 다른 재능 있는 작곡가들

 

글라주노

아렌스키

리아도바

라흐마니노프: 그의 협주곡과 교향곡이 널리 연주되고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

 

불멸의 러시아 작곡가로 추앙.

스트라빈스키는 초기에 인상주의에 몰입했던 것을 포기하고 대단히 개성적인 화성어법과 강한 리듬을 사용한

자신의 양식을 창조하였다.

스트라빈스키는 바흐와 비엔나의 초기 고전주의로 되돌아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작곡하던 시기 이후에는

베버른과 쇤베르크의 쾌활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는 이미 음악에서 그의 족적을 남겼으며, 후세인들은 그를 몬테베르디, 바그너 혹은 드뷔시와 같은 위대한 혁신가의 계열에

놓을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작곡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소연방 공화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살았다.

 

세루 프로코피에프(1891-1953)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였던 그는 기계 같은 리듬과 훌륭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뛰어난 작곡가이다.

 ‘피터와 늑대’는 아마도 이전에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하여 작곡된 음악 중에 가장 매력적인 작품일 것이다.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현대의 러시아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재능과 독창성이 뛰어났지만

당시의 러시아에서 작곡가들은 그들이 느끼는 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의 정책에 따라 작곡해야만 하였다.

소연방공화국에 살았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에 관하여 무지한 정치위원들의 생각에 맞추어야 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가 소연방공화국 밖에 살았다면 어떠한 곡을 썼을지 모른다.

 

 

3. 스메타나, 드볼작, 야나체크

 

베드리치 스메타나(1824-1884)

가장 유명한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일부 지역들)작곡가,

스메타나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의 초상화를 장려한 음악으로 그렸다.

그는 그의 조국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안토니 드볼작(1841-1904)

스메타나와 야나체크와 함께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 ‘신세계 교향곡’에서 드볼작은 인디언의 리듬을 사용하고 있으며

감동적인 “Going home"테마로 이민자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레오 야나체크(1854-1928)

가장 위대한 체코의 현대 작곡가.

그는 화성과 대위법에서 완전히 새롭고 무한한 현대적 개념을 창조한 진정한 혁신가이자 발명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4.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음악

 

윌리엄 길버트(1836-1911, 영국)

아루투르 슐리반(1842-1900, 영국)

에드워드 엘가(1857-1934, 영국)는 훌륭한 고전주의자며 영국에서 대단히 사랑받고 있다.

벤자민 브리튼(1913-1976, 영국)은 영국 오페라에 중요한 공헌.

에드워드 맥도엘(1861-1908, 미국)

호라티오 윌리엄 파커(1863-1919, 미국)

닐 가드(1817-1890, 덴마크) 덴마크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멘델스존과 슈만 풍으로 작곡.

에드바르드 그리그(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음악 영웅.

잔 시벨리우스(핀란드) 그로 인하여 핀란드는 음악세계에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스타니슬라브 모니우스츠코(폴란드)

칼 스치마노브스키(폴란드)

게오르게스 에네스코(1881-1955, 루마니아)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에르노 도나니(1887-1960, 헝가리)

코다이(1882-1967, 헝가리) 헝가리의 위대한 음악가, 관현악 작곡의 대가.

 

벨라 바르톡(1881-1945, 헝가리)

가장 위대한 헝가리 작곡가이자 전 세계적인 위대한 작곡가들 주의 한 사람.

바르톡은 추억과 헝가리의 민속 선율들로 가득한 언제나 개성적이고 현대적인 기법의 자신의 양식을 찾았다.

그의 많은 작품들, 민속가곡들은 세계 도처에서 연주되고 있다.

바르톡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그의 음악은 영원한 감동을 만들어 준다.

바르톡이 바흐와 베토벤과 함께 위대한 ‘B'에 합류될 날이 올 것이다.

 

오토리노 레스피기(1879-1937, 이탈리아) 색채감이 넘치고 인상주의적인 교향시를 작곡.

일데브란도 피제티(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

루이지 달라피콜라(이탈리아) 12음 기법으로 작곡.

이삭 알베니츠(1860-1909, 스페인) 스페인의 전통 반영한 작곡.

마누엘 데 팔랴(1876-1946, 스페인) 완벽함을 갖춘 아름답고 서정적인 양식으로 작곡.

 (1899-1978, 멕시코) 인디언의 음악을 창작 재료로 사용.

헤이토르 빌라로보스(1887-1959, 브라질) 옛 유럽 음악에 브라질의 선율을 조합한 대단히 개성적인 양식으로 작곡.

 

 

 

 

 

제 7장 현대 음악

 

 

 

1. 쇤베르크, 베르크, 베버른

 

 

아르놀드 쇤베르크(1847-1951)

 

어떤 조에 의존하지 않는 음악을 무조음악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악을 처음으로 작곡한 사람은 쇤베르크이고 이러한 음악을 ‘12음 음악’이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불협화음을 아주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불협화음 음악을 이해 할 날이 오리라 예측하였다.

 

안톤 폰 베버른(1883-1945)

쇤베르크의 제자로서 무조음악 기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알반 베르크(1885-1935)

쇤베르크의 또 다른 제자, 무조음악을 사용한 성공적인 현대 오페라 'Wozzeck'를 작곡.

 

무조음악 작곡가는 단지 음향 효과만을 만들기 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견고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음악은 현대음악일지라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

음악은 우리에게 흥분, 감동, 기쁨, 좌절과 같은 감정을 표현해 준다.

음악은 결코 지루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 음악은 무조음악 작곡가들, 심지어 베버른도 넘어섰다.

마치 어느 쪽이 위고 아래인지 모르게 하는 현대 회화에서처럼

어떤 작곡가는 일반의 청중들에게 거의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은 확실한 것들을 들을 수 있고 확실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작곡가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있어서 쇤베르크는 이미 ‘낡은 수법’의 작곡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2. 미국의 음악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민자들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와 훌륭한 연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미국의 음악은 대단히 풍요로워 질수 있었다.

미국에서 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은 옛 전통에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훌륭한 합성체를 만들어 내었다.

이 나라에서 마지막 20년 생애를 보냈던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와

우리 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타협할 줄 모르는 진실된 예술의 원칙을 보여주었다.

연주가들은 더 이상 악보에서 자유를 갖지 못했고, 변화를 만들지 못했으며 또한 자신의 해석대로 연주하지 못하였다.

작곡가는 확실한 보스(boss)이고 음악은 작곡가들이 쓴 대로 연주되어야만 한다.

미국은 미국에서 초연된 유럽의 작곡가들(스트라빈스키, 어네스트 블로흐, 힌데미트, 다리우스, 미요, 쇤베르크)를

 받아들이는 행운을 가진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얼마동안 유럽에서 공부하여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돌아온 미국 출신의 작곡가들의 아이디어와 혼합된다.

 

 

미국의 작곡가, 또는 미국으로 이주한 작곡가

 

월터 피스톤,

로이 해리스,

버질 톰슨,

번슈타인, 등

어떤 미국의 작곡가도 죠지거쉰의 음악에서처럼 국민의 영혼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Porgy and Bass'와 'An American in Paris and Rhapsody in Blue' 등 거쉰의 곡들은

지금도 새롭고 순수한 미국 음악으로 전 세계에서 열렬히 환영받고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solideo30/7Gwu/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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