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2010. 9. 11. 14:23미술/ 러시아 회화 &

 

 

 

 

대문호 톨스토이는 그 명성에 걸맞게 살아생전 수다한 초상화로 그려졌다.

톨스토이와 30여 년간 교분을 나눈 '미술계의 톨스토이' 레핀이 특히 많은 숫자의 톨스토이 초상을 남겼는데,

<맨발의 톨스토이>는 그 가운데서도 이 문호의 정신세게가 아주 잘 표현된 걸작으로 꼽힌다.

이즈음 쓴 편지에서 레핀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한 눈썹을 가진 이 위대한 작가의 부드러운 두 눈은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낮추어도, 아무리 초라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하더라도,

이 거장은 눈썹을 치켜올리면 온 올림포스 산이 부르르 떠는 제우스 같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Lev Nikolayevich Tolstoy shoeless.맨발의 톨스토이 Oil on canvas. 207 × 73 cm.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맨발의 톨스토이>에서 우리는 그 '겸허한 제우스'를 만나볼 수 있다.

짙은 눈썹 속에 자리한 잿빛 눈동자는 지혜와 통찰의 빛을 발한다.

존재와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듯한 투명한 시선이다.

덥수룩한 수염은 삶의 연륜에 더해 창조자로서 그의 경륜을 나타낸다.

하얀 겉옷과 검은 바지는 단순하고 검박한 삶을 추구했던 그의 소신을 드러내고,

맨발은 자연과 하나 되어 정직하고 순수한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레핀은 톨스토이의 외모가 지닌 강하고 굵은선에 매료됐지만,

그의 정신이 드러내는 독특한 빛, 특히 도덕적인 권위에 더욱 매료됐다.

이 작품은 그런 감화의 여운을 탁월한 붓질로 묘사한 그림이다.

 

 

 

 

  

Ivan Kramskoy. Portrait of Leo Tolstoy. 1873.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톨스토이 초상화와 관련해서는 크람스코이가 그린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레핀의 작품보다 좀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더 날카로우며 다부진 풍모가 먼저 다가오는 그림이다.

지성미는 큰 차이 없지만,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인상이다.

같은 모델을 놓고서도 화가의 주관과 개성, 세계관에 따라 그 특징이 어떻게 달리 표현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빈곤과 유형(流刑) 등 갖가지 어려움을 겪느라 소설 쓰는 것 자체가 당장의 생존수단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출신이나 삶의 궤적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인상과 분위기를 띨 수밖에 없었다.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에 그 차이가 잘 나타나 있다. 

 

 

 

 

                   바실리 페로프,  도스토에브스키의 초상.  1872 캔버스 유채 99X80.5 트레차코프 미술관

 

 

 

그림 속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웬지 고독하고 슬프다. 깊은 상념에 잠겨 뭔가를 골똘히 쳐다본다.

두개골의 윤곽이 또렷이 느껴질 정도로 마른 얼굴인 까닭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깍지 긴 손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하는 의지와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반영한다.

어두운 배경과 그 속에서 부각되는 문인의 밝은 상체가 강렬한 바로크적 명암 대비를 연출해

신산했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화가 페로프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의 아픔에 주목하고 이를 풍속화 장르에 실어 표현하기를

즐긴 이였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름의 공감대를 이룬 페로프는 어쩌면 이 문호를 그리는 데

가장 적합한 화가였다고 할 수 있다.

 

 

 

 

 

 키프렌스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초상. 1827 캔버스 유채.트랜차코프 미술관

 

 

 

푸시킨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오레스트 키프렌스키가 그린<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초상>이다.

비낀 시선으로 약간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에서 시인이 지닌 남다른 사유의 정신과 깊은 통찰력이 느껴진다.

(난 동의 못하고)

물론 그의 동경 어린 눈빛은 푸시킨 개인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낭만주의적 기질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농노 출신의 키프렌스키는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자유의 가치를 드높인 푸시킨 문학에

깊이 감동했음이 틀림없다. 자유를 향한 두 사람의 열정이 이 그림을 통해 아름답게 만나고 있다.

그림의 형식 자체는 단순하고 신고전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묘사된 시인의 표정도 그렇고,

화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 감흥이 짙게 깔려 있다.

이 엄격성과 낭만의 조화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위대한 긍정적 사고가

자연스럽게 공명한다. 

 

이 작품의 완성도에 감탄한 푸시킨은,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 거울이 나를 압도하는구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푸시킨의 외할아버지는 이디오피아게의 흑인 귀족이었다고 한다.

고수머리,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에서 그의 혈통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니미

 

   

 

 

글. 이주헌

삼성카드《 S 메거진 8월호》「추위를 예술로 녹여낸 러시아 예술가의 초상」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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