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11. 12:04ㆍ미술/ 러시아 회화 &
"나는 러시아와 그 역사에 매혹되었고, 이곳에서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모습은
화폭에 담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1874) - 일리아 레핀이 친구에게 보낸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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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 Repin, Ilya Yefimovich 1844.8.5~19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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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인들이 존경하는 19세기의 예술가인 리얼리즘 화가 '레핀', 추구예프 출생. 핀란드에서 사망.
수리코프와 나란히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미술에 쌍벽을 이루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학교에서 치스차코프에게 사사하는 한편 선배화가 크람스코이의 훈도를 받았다. 졸업 후 2년 만에 최초의 걸작 《볼가의 예선인부(曳船人夫)들》(1883)을 완성하였고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렘브란트를 포함한 서구의 고전을 연구(1872∼78)하고 귀국하여, 18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에 걸쳐 《보제장(補祭長)》 《무소르크스키상像)》《쿠르스크현(縣)의 십자가 행렬》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자포로제의 카자흐인들》등 극적인 긴장과 구성의 중량감에 찬역작을 발표했다.
인상파의 기법혁신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던 레핀에게는 표현형식상의 새로운 기술은 볼 수 없으나,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모티프의 선택 · 해석은 매우 독특하여, 나로드니키 혁명가의 묘사에 있어서도 인물의 내면적 모순을 미묘하게 파헤쳤다. 많은 작품에서 제정 러시아의 사회악에 대한 항의의 정신을 짙게 나타내었다. 말년에 아카데미로 되돌아가 학생지도에 전념하면서 대작(大作)을 발표했으나 지난날의 박력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주요 사건이나 초상화를 소재로 삼아 풍부한 감성으로 시대정신을 탁월하게 그린 당시로서는 소위 민중 화가였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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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학교 상경대학 국제무역통상학과 교수 권 융
ykwun@ks.ac.kr blog.naver.com/ykwun
I. 들어가면서
■ 이동파(순회파, 페레드비즈니키)란?
- 19세기 후반 러시아 주류미술에 반기를 든 사실주의 화가들의 그룹
- 미술작품은 소수의 궁정인사나 귀족들의 노리개가 아니라 당대사회와 고뇌를 주고받는 존재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미술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
- ‘이동파’라는 이름은, 그들이 수도에 머물지 않고 전국을 이동하며 전시를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임
- 무모한 반란이었으나 결국 러시아 미술계를 전복하고 주류의 자리를 차지함
■ 일리야 레핀(1844~1930)
- 러시아 회화 최고의 거장, 이동파의 핵심인물 가운데 하나
- 체제 비판적 걸작들을 남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자
■ 왜 이동파인가?
- 이동파를 알게 되면, 그들의 뛰어난 그림 뿐 아니라 러시아의 가장 어려웠으나 가장 빛나던 시기를 이해할 수 있음
러시아 미술은 아직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샤갈, 칸딘스키 등 유명 화가들이 러시아인이란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당시의 러시아 미술과는 별로 관련 없이 유럽의 미술사에서 언급될 뿐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 화단이 배출한 소위 ‘이동파’ 화가들의 사실적 작품들을 본다면 누구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페로프, 크람스코이, 레핀, 수리코프, 세로프 등, 거장이란 수사에 손색이 없는 러시아 작가들의 그림은 미술에 큰 조예가 없는 사람들도 경탄하게 만든다.
러시아 화가들의 뛰어난 그림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러시아 혹은 소련이라는 나라에 대한 그간의 이념적 거리감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그림이 미학적으로 훌륭할지 모르나 미술사적인 의미는 크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이를테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거나, 새로운 유파를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표현 방법 상 새로운 것은 없으되 그들의 그림은 참 ‘잘 그렸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주로 역사성이다. 그들의 그림에 담긴 것은 단순한 역사의 한 장면일 뿐 아니라, 인간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 고뇌이다. 인류역사상 처음 인간의 머리로 세상을 바꾸어 보려하였고,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이념의 나라 러시아. 19세기 러시아 회화에는 러시아의 고뇌와 열정과 슬픔이 녹아있다. 그래서 충분히 감동적이다.
II. 19세기 러시아 사회
■ 19세기 이전의 러시아 역사
○ 키예프 루시(류릭 왕조 : 862~1598) : 몽골의 지배(‘타타르의 멍에’ : 1240~1480)
○ 로마노프 왕조(1613~1917)
-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의 서구화 개혁(‘帝政 러시아’ 시대의 개막)
- 예카테리나 여제(재위 1762~96)의 영광
■ 혁명으로 달려가는 19세기 러시아 약사
○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25)와 혁명의 여명
- 나폴레옹의 침공(1812)
- ‘1812년의 아이들’, 실패했으나 아름다운 ‘데카브리스트 혁명(1825.12.14)’
○ ‘유럽의 헌병’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
- 종이호랑이로 드러난 러시아, 크리미아 전쟁(1853~6) 패전의 수모
○ 한 많은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81)
- 불완전한 농노해방(1861)
- ‘인텔리겐차’의 등장, 인민주의와 평화적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1873~5)’
- 좌절과 테러, ‘스파스 나 크라비(피 위의 그리스도) 성당’
○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94)의 반동
- 맑시스트들의 득세
○ 어리석은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1894~1917)
- “차르는 더 이상 우리의 어버이가 아니다”, 1905년 12월 ‘피의 일요일’ 사건
-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 격동과 혼란 속에서 꽃핀 러시아 예술
예술이 반드시 고통의 산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걸작은 사회적 모순과 작가의 고뇌 속에서 탄생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세기의 러시아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잉태하는 자궁과 같은 존재였다. 혹독한 전제정치와 농노제의 유산에 질식하면서도 민족의식과 사회개혁 의지에 충만했던 러시아인들은 예술· 과학· 사상에서 당대 최고수준의 성과를 내게 된다.
이 시대에 나타난 예술가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만 대강 짚어보더라도, 1820-30년대에는 국민시인 푸쉬킨과 소설가 고골, 1840년대에는 문호 투르게네프, 거장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1860년대에는 음악가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1880년대 이후에는 작가 체호프와 고리키 등 손꼽아야할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들은 격동에 휩싸인 조국의 현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는 걸작들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세기말 러시아 예술의 귀중한 파트롱 역할을 했던 두 사람, 사바 마몬토프와 파벨 트레챠코프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III. 이동파 화가들
■ 1864년, 무모한 반란의 시작
궁정적이고 귀족적이던 주류 미술에 반기를 들고 1864년 왕립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를 자퇴한 일단의 젊은 화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모임으로부터, 1871년에는 크람스코이와 페로프를 주축으로 한 ‘이동전 동지회’가 창설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여기에 레핀, 수리코프 등이 가세함으로써, 러시아 예술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이동파’ 드림팀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동전은 1871년부터 1923년 까지 약 50년간 48회 개최되었다.
‘이동파’라는 이름은 그들이 수도에 머물지 않고 전국을 이동하며 전시를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들의 이상은 ‘미술을 인민에게’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즉, 미술작품은 소수의 궁정인사나 귀족들의 노리개가 아니라 당대사회와 고뇌를 주고받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미술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표현의 기법보다 주제와 메시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슬로건이 그 즈음 러시아 청년 대학생들이 벌인 ‘브나로드(인민 속으로)운동’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그냥 머릿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이를 보급하고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였다. 당대 러시아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이었던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인민들과 교감하였던 것이다.
■ 이동파 화가들
○ ‘장르화’의 대가 Vasily Perov (1833~82)
- 시베리아 지방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의 미술학교 졸업, 2년 간 파리에 체류
- 크람스코이를 주축으로 한 14인의 반란자 그룹에 선배화가로서 합류하여 함께 활동함
- 러시아 ‘장르화(풍속화)’의 대표 작가, 다음 세대 사실주의 화가들의 출발점 역할
- 대표작 : <장례 행렬(1865)>, <트로이카(1866)>, <관문 옆의 선술집(1868)>, <익사한 여자(1867)>,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
* 장르화 : ‘당대 사람들의 실생활을 그린 장르화야 말로 가장 사실주의적인 것이다.’
‘장르화’란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우리나라의 ‘풍속화’쯤으로 보면 된다. 서양화단에서는 17세기 무렵부터 회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역사화’와 그 외의 모든 그림을 칭하는 ‘장르화’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그 장르화에서 다시 인물화와 정물화, 풍경화 등이 쪼개져 나갔으며, 이도저도 아닌 것들만 여전히 ‘장르화’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주로 당대 사람들의 일상과 풍속을 담은 회화들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근래에 가장 사랑받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진주귀걸이 소녀>의 얀 베르메르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그가 자주 그린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엌 풍경들. 그로부터 우리는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살아가던 모습의 진솔한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장르화의 가치는 미학적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정신’이나 ‘가치’가 담기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백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이 없는 가치란 자칫 구호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가 단원과 혜원의 풍속도를 사랑하는 것은 우선 그 그림들이 미학적으로도 볼만하지만, 그 속에서 조선 후기 민초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고, 생활에 발을 딛지 않은 고고한 문인화에서 벗어나 낮은 데로 임한 화가의 정신을 높이 사기 때문이 아닐까. 러시아 장르화의 뿌리를 찾자면 농노화가 미하일 시바노프의 <결혼계약의 축하(1777)>, 그리고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의 농촌그림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단순한 묘사를 넘어 장르화의 묘미인 ‘풍자’와 ‘해학’이 가미됨으로써 비로소 맛깔스런 그림들이 탄생한 것은 파벨 페도도프에 이르러서이다. 민초들의 삶이란 대개 고통스런 것이고, 풍자와 해학은 이를 웃음으로 버무려 이겨내고자 하는 묘약이다. 우리의 풍속도 군데군데에 풍자와 해학들이 숨어있듯이, 페도도프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장르화들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겨져있다. |
○ 인물화의 대가,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1837~87)
- 러시아 오스트로고쥬스크 시의회 서기의 아들로 태어난 전형적 잡계급 인텔리겐차.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1864년의 반란을 주도한 이동파 제1세대의 리더.
- ‘반란자’들과 '페테르부르크 예술가조직'을 결성하여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으며, 1870년 비평가 스타소프와의 전격적인 합의로 '러시아 이동전시협회'를 창립함. 여기에는 레핀, 수리코프, 레비탄 등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화가들이 속속 참여하였고, 깊은 민중 의식과 높은 예술성으로 아카데미 파를 압도함.
- 시대에 대한 의무와 정의감에 넘치는, 고뇌하고 사색하는 인물들을 주로 그린 인물화의 대가 (얼굴, 눈에 특히 주목)
- 대표작 : <자화상(1867)>, <황야의 그리스도(1872)>, <톨스토이의 초상(1873)>, <미지의 여인(1883)>, <위로할 수 없는 슬픔(1884)> 등
○ 거장, 일리아 레핀(Ilya Repin (1844~1930)
- 추구예프에서 출생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함. 졸업 후 2년 만에 최초의 걸작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1873)>를 완성하였고, 미술아카데미의 유학생으로서 유럽일대를 순방한 후 파리에 머뭄. 르네상스 미술이나 파리의 인상파 그림은 그에게 불만스러웠음.
- 사바 마몬토프와 함께 귀국하여, 그의 ‘아브람체보 서클’에 합류함. 이동파의 경향과는 다른 <신병의 전송(1879)>,
<황녀 소피아(1879)> 등을 그림.
- 아브람체보 서클과 결별 한 후 사회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그림. 당시 러시아 주요 신분과 계급들을 망라한 군중 초상화 <쿠르스크 현의 성행렬(1883)>, 급진주의와 자유사상을 담은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서의 파리 코뮨 참가자들의 추도 집회(1883>, ‘나로드니키’의 공상에 대한 반박인 <선동가의 체포(1878~92)>,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3)>
- 1880년대 들어 다시 역사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많은 걸작 인물화들을 남김. <투르크 왕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제 카자흐(1878~91)>, <스타소프의 초상(1882)>, <톨스토이의 초상(1887)>, <무소르그스키의 초상(1881)> <트레차코프의 초상(1883)>
- 1880년대 중엽 이후 혁명의 좌절을 겪으며, 혁명과 폭력이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회의에 빠짐.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1881~5)>.
- 그 후 투쟁적 자세는 옅어지고 종교화와 순수예술에 흥미를 느낌. 톨스토이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영입되며, 스타소프는 이에 대해 격분함.
<무죄의 죄인을 처형으로부터 구한 니콜라이 밀리키스키(1896)>, <결투(1896)>. 19세기말 20세기 초 러시아 회화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 1917년 2월 혁명을 환영함. 1918년 핀란드에 머물고 있을 때 러시아와의 국경이 봉쇄되면서, 끝내 귀국하지 않음. 1926년 귀국요청을 거절함. 1930년 핀란드에서 사망.
○ 역사화의 대가,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1848~1916)
-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카자흐 가정에서 태어남.
- 농노해방 이후의 정신세계를 잘 표현함. 농노제도와 귀족국가, 교회,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증오와 옛 러시아 사회의 민주주의 정신에 대한 소박한 공상과 회고주의를 엿볼 수 있음. 민중의 높은 도덕심, 애국정신, 영웅주의를 담아, 비록 패배하여도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림.
- <스트렐치 처형의 아침(1881)>, <베료조프 촌의 멘시코프(1887)>, <대귀족 모로조바(1887>
IV. 위대한 파트롱(Patron, 후원자)
■ 파벨 트체치아코프(Pavel Tretyakov (1832-1898) 와 국립 트레차코프 갤러리
러시아 사회는 19세기 이후 비로소 오랜 격리에서 벗어나 유럽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 미술도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거기에는 새로운 신분의 파트롱들의 기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 사람, 거상 트레차코프와 철도왕 마몬토프는 19세기말 러시아 예술의 부흥에 결정적 자양분을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일리야 레핀의 걸작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부호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차코프(1832-1898)는 이동파 작가들에게 있어 거의 구세주였다. 그는 대단한 사업가였을 뿐 아니라 회화에 대해 높은 식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제도권에 맞서느라 경제적으로 곤란한 형편에 있었던 이동파 화가들의 그림을 비롯하여, 당시 곤궁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2,000점이 넘는 그림과 약간의 조각들이 전시된 트레차코프의 집은 러시아 작품들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갤러리였다. 이 갤러리가 1892년 모스크바 시에 기증됨으로써, 지금의 <‘국립 트레차코프 갤러리’>가 탄생한 것이다.
혁명 후 국가가 부자들로부터 몰수한 그림들까지 여기에 보태어져, 이 미술관은 더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게 된다. 지금은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신관을 추가로 열어 주로 20세기 이후의 현대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트레차코프의 행적과 그에 대한 평가들을 살펴보면, 그는 놀라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림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집착으로 그는 1856년 24살의 나이에 이미 수집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30년 넘게 지속된 수집활동으로 엄청난 자금을 지출한다.
왜 그랬을까. 화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그가 수많은 곤궁한 화가들을 도왔지만 그것은 교만이나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모아놓은 작품의 규모를 볼 때 그의 수집열이 거의 강박적이 아니었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맹렬한 수집이 단순한 열정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30세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림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한 국립미술관을 하나 남기고 싶다.”
트레차코프는 모스크바의 상인이었던 선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재산을 고상한 취미생활에 탕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증식시킨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그 돈을 벌게 해준 이 사회에 유용한 시설의 남김으로써 환원하고 싶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런 트레차코프에 대해 당대의 사람들이 매혹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흠잡을 데 없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동파 초기의 리더였던 인물화의 대가 크람스코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가 어떤 악마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그 형제들은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가정에서 주로 실제 생활에 필요한 사항들을 배웠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히 문학, 그림, 연극, 음악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많은 화가, 작가, 음악가들과 교분을 가졌으며, 그들의 조언을 기꺼이 경청하였다. 그러나 모든 결론은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랐다. 그는 한번 내린 결정을 바꾸는 법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이 참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벨 트레챠차프가 이처럼 필생의 사업으로 모아놓은 작품들은, 오늘날 트레차코프 갤러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러시아 예술 전체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 (1841-1918)와 아브람체보의 동화
파벨 트레차코프와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19세기 말 러시아 예술을 길러낸 또 한사람의 중요한 파트롱은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1841-1918)이다. 대단한 부자였고 예술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평생 커다란 후원을 아끼지 않은 점에서, 마몬토프는 트레차코프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매우 드라마틱한 삶을 살고 간 마몬토프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몬토프는 당대 러시아인들로부터 르네상스를 꽃 피운 피렌체의 메디치 가에 비견하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러시아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의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한 굴지의 기업가였으며, 회화나 미술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막대한 지원을 제공한 후원자였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예술가였다.
당시 러시아 예술가들은 그를 후원자가 아닌 동료예술가로 대하였다. 그럴만한 것이, 마몬토프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성악을 배웠으며, 조각, 무대연출, 희곡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 관심을 갖고 수련하였다. 그의 예술이 과연 프로급이었는지, 그저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정도였지만 그의 재산과 호의가 사람들의 평가를 관대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드라마 같은 그의 삶에 있어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아마도 ‘아브람체보’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는 모스크바 근교의 평화로운 전원 아브람체보에 영지를 마련하고 예술가들에게 개방하였다. 아브람체보 마을에는 회화와 조각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따로 또 같이 작업을 하였다. 그곳을 거쳐 갔거나 관련 있는 화가만 하더라도 레핀, 폴레노프, 바스네초프, 수리코프, 코로빈, 레비탄, 세로프, 브루벨 등 19세기말 러시아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모두 꼽아야할 지경이다.
모스크바 교외선 열차를 타고 아브람체보 역에서 내리면 잠시 걱정스러워진다. 그야말로 소비에트 스타일로 드라이한 시골역에는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함께 내린 사람들은 어느새 숲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 그냥 보따리를 한두 개씩 든 동네사람들이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간 쪽을 따라 숲길을 걸어본다. 무성한 여름풀과 자작나무의 냄새가 싱그럽다. 그러다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난다. 갈라진 길의 크기가 비슷해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한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말을 걸고 길을 물어보려 하자, 말 안 해도 잘 안다는 듯, 무제이(박물관) 찾는 거지? 저쪽이야 - 라고 시원시원하게 가르쳐주었다.
- 정주영 또는 박태준처럼 철을 다루는 기업가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한다. 겨울에 그들은 도시의 저택에서 독서모임을 갖고 드로잉 수업을 하기도 하며 연극도 공연한다. 여름에는 아브람체보나 그 근교로 가서 함께 생활하며, 숲을 산책하고 작품 활동을 한다. 때로는 patron 자신이 노래를 직접 부르고, 연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어느 날 누군가가 이곳에 교회당을 하나 짓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자 모두가 환호한다. 모두 당대의 내로라하는 거장들이다. 어떤 이는 옛 러시아의 전통적 교회 건축양식을 발굴해 내고, 어떤 이는 교회당 안에 성화를 그려 넣고, 어떤 이는 타일을 만들어 붙이고, 저마다 힘을 보태어 마침내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에 어울리는 교회당이 탄생한다. 그리고 완공 후 첫 행사로, 그들 중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을 치른다. -
이것은 한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 몽상을 한번쯤 해본 사람은 있을 것이지만, 그 실천은 쉽지 않다. 단순히 파트롱의 돈과 예술에 대한 동경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파트롱 자신의 작가적 능력과 열정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쨌건 그들은 그렇게 하였고, 참 행복했을 것이다.
여름과 겨울을 함께 하며 예술에의 열정을 나누던 이들이 하나의 예술적 유파를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른바 ‘마몬토프 써클’ 또는 ‘아브람체보 파’가 그것이다. 마몬토프가 인수했던 영지는 원래 한 세대 앞 슬라보필리의 수장 악사코프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슬라브주의’는 마몬토프 써클의 키워드였다. 마몬토프는 악사코프의 영지를 인수하면서 그의 슬라브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맹세한다. 지금도 아브람체보에는 악사코프의 방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마몬토프의 “아브람체보 파”는 트레차코프가 사랑한 “이동파”와는 좀 다른 카테고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양자가 대립된 개념이거나 전적으로 별도의 그룹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웬만한 예술가들은 아브람체보를 거쳐 갔고, 또 웬만한 화가는 트레차코프의 후원을 받았다. 따라서 양쪽 모두에 관련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동파의 주축이었던 일리야 레핀만 하더라도 1874년 로마에서 돌아오던 마몬토프 부처와 파리에서 합류하여 아브람체보에서 함께 지낸 마몬토프 써클의 초기 멤버였다.
아브람체보 파가 이동파와 또 하나 다른 점은, 이동파처럼 독자적 전시회를 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동파 전시회에 개별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지만, 마몬토프 써클은 여름은 아브람체보에서 그리고 겨울은 모스크바에서 함께 생활하며, 주로 러시아 예술전통의 부활과 새로운 러시아 문화 창조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세기말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아브람체보라는 마음의 고향을 선물하였던 마몬토프의 말년은 불행한 것이었다. 문화적 지원 뿐 아니라 철도부설을 통해 마몬토프는 러시아 산업혁명의 주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러시아 정부는 대규모 산업화 계획에 대한 지원을 그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궁정의 보수귀족들은 이처럼 급변하는 세상과 천박한 ‘상인’이 승승장구하여 세상의 주역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1899년 그들은 결국 마몬토프에게 공금횡령 등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체포한다. 재판이 열리고 결국 무죄로 석방되기는 하였지만, 그는 쓰라린 파산을 받아들여야 했다. 60세의 마몬토프는 이후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아브람체보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18년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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