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펌)

2010. 9. 13. 12:14미술/ 러시아 회화 &

 

 

 

 

Sergai Pavlovich Diagilev,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1872-1929)  

 

 

 

 

 

 

1. 소년기에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디아길레프는 1872년 3월 19일 노브고로드에 있는 군대 막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그를 낳은 후 산고(産苦)로 세상을 떠났다.

노브고로드에서 복무하던 아버지가 기병대 사령관으로 전속되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디아길레프 집안은 러시아의 소귀족에 속하는 계급으로 2년뒤 아버지는 같은 계급의 헬레나 파니에바라는 여인과 재혼하였다.
계모와 디아길레프의 관계는 친부모 이상이었으며 일찌감치 아들의 자질을 꿰뚫어 본 파니에바 부인은 그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여인으로 디아길레프의 강한 의지력, 불굴의 고집과 온갖 교양의 기반은 그녀의 교육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또한 파니에바 부인은 인품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디아길레프의 집은 소귀족들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모여든 친구들은 높은 교양과 음악에 대한 식견이 대단해 함께 오페라와 음악회에 가곤 했는데

당시 별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열광이 굉장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디아길레프가 차이코프스키 음악에 심취하고 훗날 발레뤼스를 이끌어가는 큰 밑바탕이 된 셈이다.

 

그러나 디아길레프가 열살이 된 해에 아버지의 부채로 그의 일가는 부유한 조부가 살고 있는 빼름이란 시골로 이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 사교계의 중심인 할아버지의 집에 있는 엄청난 장서과 그림책과 거대한 저택, 신중한 지도로

소년 디아길레프는 여전히 문화적-예술적으로 우수한 환경에서 그의 잠재력을 갈고닦을 수 있었다.
또한 이곳 시골에서 자연에 대한 심원한 사랑과 명상의 태도, 러시아적인 뿌리깊은 사랑을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주었던 것이다.

 

18세가 되자 디아길레프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여기서 그는 사촌 디마 필로조포프의 소개로 장차 그와 함께 작업하게 될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알렉산더 브노와를 지도자로 한 당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젊은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알렉산더 브노와는 화가이면서도 연극이나 기타 예술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으며

윌터 누벨은 음악에 대해 비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후에 디아길레프에게 음악상의 많은 조언을 베풀게된다.
이들과 합세한지 얼마 안 되어 디아길레프는 사촌 디마와 더불어 최초의 해외 여행을 하게 되었으며

베를린, 파리, 로마, 베니스 등을 돌며 모든 지식을 흡수했고 그의 취미는 현저히 세련되었으며

서구 문화에 대한 기본적 이해력을 터득했다.

 

 

 

2. 천직을 발견하다

 

디아길레프는 23세때 이미 자신의 천직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었다.
러시아 미술전에서 전람회를 개최한 결과로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마에세나스' 라는 평을 얻었듯이

그 자신이 재능있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지휘할 수 있는 흥행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1895년에 계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신념은 다음과 같았다.

 

"...(중략).. 마지막으로 제겐 진정한 재능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참다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습니다.
- 즉 마에세나스(문화예술의 보호자란 뜻으로 로마의 시인 호라스와 버질의 후원자 이름에서 유래)가 되는 것.

저는 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 돈만 빼고 -- 하지만 돈은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그는 일단 마음 먹은 신념을 평생에 걸쳐 흔들림 없이 지켜냈고 세계 예술계에 막대한 유산을 전해주었다.

 

 

 

3. 전람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다

 

21세인 1893년에 한 두번째 해외여행에서 그는 영국, 독일 화가들과 접촉했는데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귀국해서

영-독 수채화전을 개최하였다. 

전람회는 대인기였고 그 결과 중대한 사회적, 재정적 뒷받침을 얻게 되고 체니세바 공주나 사바 마몬토프같은

모스크바 거물급 후원자와 우정을 맺기에 이른다.

이어 1898년에 제 2차 미술전(핀란드-러시아 미술전), 1901년에 제 3차 미술전을 개최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블라디미르 대공와 위대한 화가 레핀도 그에게 조력하였다.

이에 디아길레프는 좀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자 볼콘스키 왕자의 추천으로 황실 극장의 하위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브노아, 박스트, 디마 등 멤버들을 대거 끌어들였으나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스캔들을 일으키고 사직한다.
당시 황실 발레단은 감식력과 대담함이 부족했으나 막대한 정부 보조로 성공적인 공연을 이끌고 있었기에 이에 대항하여
디아길레프는 최초의 독립적인 사설 발레단을 창단하게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10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4. 발레뤼스를 창설하다


황실 발레단에서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해외로 눈은 돌릴때의 나이 34세.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의 성상과 근대 회화를 총망라한 러시아 미술전을 파리에서 개최했는데

이때 문화사절 자격으로 러시아 정부를 대표했으며 프랑스로부터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미술전의 성공으로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마에세나스'로 불리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07년에는 살리아핀의 노래를 파리에 수출하여 저음 가수로 각광 받게 하였다.

또한 리아도프,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스크리아빈, 림스키 코르사코프, 글라주노프 등의 음악을 파리에 소개하고

1908년에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전막을 파리 무대에 올렸다.

이때의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미시아 셀, 폴리냐크 공주, 그루펠르 공작 부인 같은 귀족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탄탄한 기반을 쌓은 디아길레프는 37세인 1909년에 발레의 근대사를 가져온 '발레뤼스'를 탄생시킨다.
같은해 5월 19일에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의 발레 륏스 데뷔는 세계 무용사에 기록될 역사적 저녁이었으며,

발레 륏스 신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리하여 디아길레프의 필생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의 흥행사로서의 천재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진정한 장르를

발레에서 찾은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창설한 발레단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나는 이미 러시아의 그림과 음악, 오페라를 소개했다. 오페라와 발레는 한발짝 차이다.

발레야말로 그 자체로서 모든 예술행위를 전부 포괄하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앞으로 그가 지휘하는 작품들을 창작해 나갈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절의 동료 알렉산더 브누아, 레옹 박스트는 물론

20세기의 중요한 음악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황실 발레단의 스타로 활약했던 파블로바와 니진스키,

까르사비나, 인습을 타파하려했던 안무가 미하일 포킨 등등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발레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5. 디아길레프적 인간관

 -  냉혹, 동성애적 경향 , 속물근성 .. 그럼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을 가진 흥행사


어떤 의미로 디아길레프에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회상을 통한 디아길레프는 '메마른 인간'이었으며 인간적 감정을 가지지 않은 냉혹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 자신도 " 나는 누구에게도 흥미가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나의 일이다." 라고 했다. 

어떤 인간도 그에겐 하나의 객체, 그의 일에 사용되는 재료에 불과했다.

 

러시아의 작곡가 나보코브와 발레 뤼스에서 활동했던 무용수 리디아 소콜로바도 고백한 바 있듯이

"그의 발레를 위해선 누구나 그의 목적에 봉사하는 하나의 대상, 주제 아니면 객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 그와 함께 작업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의견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여성에 관심이 없었으며 동성애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의 재능이었으며 그가 애착하고 보호해준 것도 그들의

천재성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재능이 더이상 자신의 일에 소용없거나 방해가 될 때는 서슴없이 버렸다.

그에겐 동정심이라곤 전혀 없었다. 혹은 새로 발견한 천재를 위해 이전의 것은 희생된다.

그러면 그는 디아길레프의 새 애인이 되는 것이었다.
디아길레프는 여성 무용수가  상의 없이 혹은 동의를 구하지 않고 멋대로 결혼하는 경우 발레단에서 해고해버렸으며,

니진스키를 사랑해서 애인으로 삼았고 안무가인 포킨과 충돌할 정도로 니진스키를 위했다.

 

 

 

 

디아길레프(좌), 니진스키(가운데)

 

 

훗날 포킨이 발레 뤼스를 떠나자 안무가의 자리를 니진스키에게 주었으나 니진스키가 로몰라와 결혼하자

발레 뤼스에서 해고하여 무용계에서 추방했다.

이에 새로운 니진스키의 자리는 레오니드 마신느, 세르주 리파르 등이 채웠고 이들도 디아길레프의 곁을 떠났다.

이러한 패턴은 그의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독재자였고 일을 위해서 동료를 배신하는 것이나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는 것도 사양치 않았다.

브노아를 비롯해 박스트, 포킨, 스트라빈스키 등 수많은 동료들과 자주 싸웠고 냉혹하게 그들에게서 등돌렸다가도

필요해지면 주저치 않고 달려가 그들과 화해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발레 뤼스의 수많은 스타들이 몇번이나 그를 떠났다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필요 이상으로 공손하면서도 동료나 낮은 신분의 사람에겐 거만하고 냉혹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의 많은 천재들과 탁월한 예술가들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후원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숭배한 것을 보면
디아길레프는 어딘가 사람을 끄는 마력을 가진 카리스마적 존재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 좋은 작품이라도 제대로 빛을 발휘할 수 없으리나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6. 디아길레프가 남긴  유산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인한 대혼란과 유럽 왕실의 몰락, 전쟁 등으로 황폐화된 유럽 예술의 특수한 시기를

창조하였다.  러시아의 그림과 음악 그리고 무용을 20세기의 서구에 소개했을 뿐 아니라 제 1차 세계대전이나 러시아 혁명

등으로 동요하는 20세기의 휘몰아치는 층분의 수년간을 통해 가장 높은 예술적 재능에 빛나는 인재들을 서방에다 계속

공급했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누구에게도 흥미를 일으킬 수 없다. 흥미 있는 것은 나의 생애가 아니라 나의 과업이다."


니진스키, 스트라빈스키, 박스트, 드뷔시, 포킨, 피카소, 콕토, 라벨, 마신느, 브라크, 사티, 브노아, 쉬트라우스, 발란쉰,
마티스 등 그와 교류했던 예술가들의 조우는 세계 예술사에도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었던 것이다.

1970년의 발레 연감은 발레 뤼스에서 사용한 테마나 음악 중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부분은 별도로 하고,

전세계에 걸쳐 아직도 정규적으로 상연되고 있는 그의 발레는 30여개를 헤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후에도 그의 휘하에서 자란 댄서, 안무가, 작곡가들이 계속해서 활동해왔으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무엇보다도 그의 영구적인 기념비가 되는 것은 고전적 및 실용적 무용을 살아있는 예술형식으로 확립해 놓은 것으로

그것은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인간의 경험과 정서를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국제적인 하나의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인 것이다.

물론 디아길레프만이 러시아의 춤을 서구에 소개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러시아 황실 발레단의 프리마였던 안나 파블로바(발레 뤼스에서도 활동함) 가 세계 순회 공연을 통해

발레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리디아 키야시트가 디아길레프의 첫 시즌 전에 런던에서 러시아 발레를 공연하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파블로바의 명성을 추억할 수 있을 뿐이며 디아길레프는 그가 구축해 놓은 훈련과 유파(流派), 체제를

남겼다.  

 

찬란하던 발레 뤼스는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해체되었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움직임은 계속

되었다.
루빈스타인은 레옹 박스트, 니진스카(니진스키의 동생), 브노아와와 더불어 독자적인 발레단을 조직했고

그녀의 미는 다눈치오, 메테를링크, 지드, 발레리 등에게 영감을 주어 일련의 연극적인 스펙터클을 창조하게 만들었다.
또한 디아길레프와 결별한 포킨의 스웨덴 방문에 자극 받아 조직된 발레 수에도와는 발레 시인이라 할 콕토와 클로델,

켄드라스 등에 의해 문학적이면서도 해학적이고 사회적 코멘트의 요소가 깉은 개성있는 일련의 작품을 생산해 내었다.

특히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는 디아길레프 사후 1931년 르네 블렁과 바질에 의해 창설되어 오리지널 발레뤼스에서

활동했던 그레고리예프, 코크노, 포킨, 마신느, 발란신, 니진스카가 제휴했고 다닐로바, 마르코바, 베라 페트로바 등이

프리마로 활약했다.
곧이어 투마노바나, 리아부친스카, 바로노바, 유스케비치 같은 신예들을 배출하며 발레 뤼스의 레퍼토리를 충실히 재창조

하였다.


또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세르주 리파르, 로열 발레단 창립자 니네트 드 발루아,

뉴욕씨티 발레단의 창립자 조지 발란신, 샹젤리제 발레단, 마르세유 발레단을 이끈 롤랑 프티, 로잔 발레단의 모리스 베자르,

로열 발레단의 케네스 맥밀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존 크랑코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디아길레프 휘하에서 활동했거나 혹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에서 영향받은 사실임은 명백하다.

발레 뤼스 해산 후 뿔뿔이 세계에 흩어진 디아길레프의 발레 후손들은 그의 세계를 점차 각자의 학교, 발레단에서 전파했던

것이다.

안무가뿐 아니라 쁘띠,  마신느, 리친 휘하에서 활동했던 르네(지지) 잔메르, 자닌느 사라, 장 바비예, 로버트 헬프만,

알리시아 마르코바, 안톤 돌린, 마고트 폰테인 등 유수의 무용가들은 러시아 출신의 교사들로부터 지도받았다.
누레예프는 발레 뤼스에서 활동하다 러시아 장교와 결혼하여 추방당한 우델초바에게서 발레를 배웠고 니진스키를 동경

했으며 그의 작품들을 춘 영상물을 남기기도 했다.

現 로열 발레단 프린시펄인 이반 푸트로프가 니진스키를 존경한다고 했듯이 그 이전에도 지금도 바슬라브 니진스키는

하나의 전설의 대상이 되었다.
 
1929년 8월 19일 베니스에서 57세의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20여년간 그가 발레 뤼스에 열정을 쏟은 창조적 에너지는

미래의 세계에  막대한 유산으로 남아 지금도 살아숨쉬고 있는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smess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