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詩 (15편)

2010. 5. 23. 09:02詩.

 

 

 

 

 




만족
                  


세상에 만족이 있느냐? 인생에게 만족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만족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거리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속력은

사람의 걸음과 비례가 된다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

만족은 愚者(우자)나 聖者(성자)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며 약자의 기대뿐이다

만족은 언제든지 인생과 竪的平行(수적 평행)이다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만족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아지랑이 같은 꿈과 금실 같은 환상이

님계신 꽃동산에

들릴 때에 아아 !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길이 막혀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건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바칩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 못 오시는 당신을 기루어요.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리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의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한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시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는 잊고자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으까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나의 길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옮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였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나의 노래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妄想)으로 토막쳐 놓는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쥡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천국(天國)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래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르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광영(光榮)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音譜)를 그립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

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

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아니더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에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기룹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테여요.

맨 처음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비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비는 해를 가리고 하늘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비는 번개와 무지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

비오는 날 가만히 가서 당신의 침묵을

가져온대도,

당신의 주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오신다면,

나는 연잎으로 웃옷을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연잎 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 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사랑의 불 

 


산천초목(山川草木)에 붙는 불은

수인씨(燧人氏)가 내셨습니다

청춘의 음악에 무도(舞蹈)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자매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물아 모란봉의 키스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綾羅島)를 감돌아 흐르는 실연자(失戀者)인

대동강아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알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 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의 님 기루운 사랑을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이따금  이따금 목이 메어

소리를 이루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속에서

애태우는 불꽃이 거꾸로 타들어 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닿아서 합류(合流)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첫방울로 나의 가슴의 불을 끄고

그 다음 방울을 그대네의 가슴에 뿌려 주리라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 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여름밤이 길어요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더니

개똥 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城) 너머로 가서 악마의

웃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깨어서 일천(一千) 토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는 여름밤이 길어요

 

 

 

 

 

 

 




잠 없는 꿈




나는 어느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디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겠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님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대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겠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리 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 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꿈은 그러면 너의 님을 너의 가슴에

안겨주마 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베어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韓龍雲(한용운)
호는 萬海(만해)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8세때 동학에 가담했으며 3.1운동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사람
23세에 입산하여 중이 되었음
1919년 옥중에서 쓴 조선 독립서는 후세에 남긴 겨레의 대문장으로 평가함
저서는 < 1909년 불교 유신론><불교 대전><십현담주해>가 있으며
시집<1926년 님의 침묵> 장편소설<1935년 흑풍>과 <1936년 후회>

번역 서로는 <삼국지>가 있다
1980년대 발표되지 않은 시 17편과 시조 30편 중편소설 <죽음>이 발견되어
한용운 님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알 수 없어요 는 산문시로 신비적 종교적 명상적이며

소재는 자연 일 수도 있고 조국 일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 음미해 보아야 한다. 

 

 

 



(여명 문학회/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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