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4. 14:30ㆍ詩.
사랑방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렛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시와사람> 2002. 봄
함순례
1966년 충북 보은 출생.
1993년《시와사회》신인상으로 등단.
뜨거운 발
어스름 할머니민박 외진 방에 든다
방파제에서 그물 깁던 오십줄의 사내
지금쯤 어느 속정 깊은 여인네와
바짓가랑이 갯내 털어내고 있을까
저마다 제 등껍질 챙겨가고 난 뒤
어항의 물비늘만 혼자 반짝인다
이곳까지 따라붙은 그리움의 물살들
밤새 창턱에 매달려 아우성친다
사랑이 저런 것일까 벼랑 차고 바윗살 핥아
제 살 불려가는 시린 슬픔일까
몸이 자랄 때마다
맨발로 차가운 바다를 헤매야 하는 소라게야
울지 말아라 쓸쓸해하지 말아라
게잠으로 누워 옆걸음 치며 돌아가야 할
누더기 등껍질 촘촘 기워간다
물 밀려간 자리 흰 거품 걷어내며
기어 나오는,
소라게의 발이 뜨겁다
꼴림에 대하여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여름밤을 끌고 간다
한 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기운 쌓이는 들녘에 점점 붉은 등불 켜진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빈 하늘에 기러기를 날려보내는 일
마음속 냉기 당당하게 풀면서
한 발 내딛는 것
개구리 울음소리 저릿저릿 메마른 마음 훑고 간다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마흔을 기다렸다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 있다
알 수 없지만
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 생각한다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고등어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는 않는다
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들이
호흡을 가다듬는 저녁 다섯 시
점점 켜지는 불빛들 바라보며 묘하게 마음 편안하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방점을 찍는다그 옆에 사랑은 세숫비누 같아서
닳고 닳아지면 뭉치고 뭉쳐
빨래비누로 쓰는 것이다,라고 적어놓는다
저 구름을 인생이라 치면
죽지 않고 반을 건너왔으니
열길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겠다,고 쓴다
마흔, 잘 오셨다
숲
오래된 편지를 읽습니다. 당신에게로 갔다가 우리 속에 놓여진 편지.
당신을 만나 즐겁다, 쓰여있군요. 행복해요, 라고도요.
가까이 있으면 자랄 수 없다는 듯 간격을 두고 발끝 세운 나무들처럼큰 바람이 일렁일 때나 사르락 손 내미는 이파리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곁눈질로 골똘했지요. 이따금 새들에게 눈 맞추는건 헛김나는 일이어서 나는 그만
아득해져 혼자 말갛게 익어가는 산감이 되었더랬지요.
그런데 묘목을 심은 첫 자리 뱀처럼 얽혀 있는 우리의 뿌리를 만납니다.나의 밑둥 썩은 감꼭지 핥고 있는 이가 바람이려니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벌거숭이 산길에 가위눌리는 일도 끝이지 싶네,내게로 온, 오늘 문득 층층이 허물 벗은 골짜기 따라 우거진 숲을 읽습니다
뺨
내 친구 윤태자, 언젠가 그녀의 뺨을 갈겼다.내 궁색한 자취방에서 한 일 년 식객노릇을 했는데 새벽별만 바라보아도 배터지게 슬펐던 그 시절,
우리는 불어터진 라면발처럼 톡톡 끊어지기도 하고 가지런히 단추를 채우기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서슬 푸른 적의를 키우기도 했다.
내가 직장으로 야간대학으로 돌아치는 동안에도 밤고양이처럼 웅크려 있기 일쑤였던 태자가
경찰시험에 붙은 날, 그날 밤 나는 태자의 뺨을 철썩, 올려붙였다.
“가시나! 민중의 지팡이 노릇 똑바로 햇!"
그때는 임수경이 평양축전에 참가한 즈음이었는데,
그녀와 외양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조차 아예 짬새 똥파리쯤으로나 여긴 경찰이 아니꼬와 괜한 화풀이 한 것이다.
그 밤의 손꽃,
결혼하고 하나 둘 새끼 낳고 이제 헐렁한 나이, 모처럼 한 방에 눕는다.태자가 말한다. 수많은 민원인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 뺨 얼얼하다고……
내 친구 윤태자! 누가 뭐래도 늠름한 민중의 지팡이다
어느새 고단히 잠든 태자의 뺨을 쓸어본다. 내 뺨, 온통 얼얼하다.
함순례기
그러니까, 술래라 부른 적 있다.
기일게 수울래 부르면 달빛 강변에서 강강수울래 춤추는 듯,
좀 짧게 부르면 술래야술래야 머리카락 보일라 숨은 동무들 찾느라 해거름 길어졌다.
해례야 달례야 부르는 벗들도 있다.
벗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겠는데 온몸 붉어지는 호명이다.
함수라고도, 수레라고도, 순네라고도, 첩첩산골 가시내가 되었다.
미소가 둥글어졌다.
글냄새 물씬 나는 필명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태앗적 이름으로 돌아와 있다.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에 서 있다.
충북 보은군 회북면 용촌리 백삼십육번지
일천구백육십육년 일월 스무여드레 그 하늘에 다시 예를 갖춰야겠다.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 열어봐야겠다.
순례야 순례야 삼보일배, 다시 돌아와야 하는 그 길엔 철없는 가시나무들이 촘촘했다
- 시와반시, 2006 여름호
신도 여인숙
남들 다 내 같지 않제
걱실걱실한 뱃사람들 상대하기가 좀 에려운 기라
고만 둬뿔라 몇 번을 맘 묵어도
쪼매 두고 보제 했던기 이날이라카이
지금사 일 놔뿔기도 궁시럽고마
뱃사람들 월 세방으로 나 돌리뿐 기라
그라도 한 밤만 재와주소, 및칠 굶었는데 밥 좀 주소, 하믄 맴이 아퍼가
재와주고 믹인 사람, 빛도 없는 밤에 디리닥쳐가 날마새마 홀랑 도망간 넘들 쌨다
우째다가 방세 줄라꼬 다시 온 넘은 한 분도 못 봐가
속이도 속아주고 함시로 사람이 독해지제
아 이것? 예전 꽁치잡이배 그물에 쓰던 기라
열쇠가 하 쪼매니께 안경집만한 여어 다 잡아매놓으이 십상 좋다
주무이 뿔룩해징께 아참 하고 놓고 가는 기라,
여는 낯 씻는 데고 저 끝짝이 볼일 보는 데라
영화배우도 여그 많이들 왔제
요샌 시인이라는 작자들도 더러 찾아오더만, 근디 시인이 대체 뭐하는 사람잉가?
시악시는 알어?
-시집『뜨거운 발』(애지,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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