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 진시황릉 발굴

2010. 3. 23. 07:45중국

 

 

 

 

마오쩌둥은 58년 공산당 간부 회의에서  

"진시황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는 460명의 학자를 처형했다. 우리는 4만6000명을 처형했다." 

문화혁명기의 홍위병들은 고전의 봉건주의를, 서구의 것은 자본주의를, 소련의 것은 수정주의를 부추긴다면서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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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

 

여기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는『마오』에서 전혀 위대하지 않다.

그러기는커녕,『마오』는 마오의 추악한 욕망과 광기로 '더럽혀져' 있는 책이다.

어릴 때 자기를 때린 아버지를 두고 "제트기(고문의 일종-인용자)를 태워야 했을" 인간이라 이죽거리고

"성적 질투심"에 불타 며느리로부터 아들을 떼어내 한국전쟁으로 내몰아 죽게 마든 '패륜아',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이 부려먹으려는 욕심에서 그리고 자기보다 더 빨리 죽게 할 심산으로

'2인자' 저우언라이의 방광암 수술까지 막으려 했던 '냉혈한',

문화혁명을 작당해 "30년간이나 자신의 가장 가까우 동료였던" 류사오치를 군중들의 발길질 아래 내동댕이 친 뒤

부하들을 동원해 사진을 찍고 그것도 모자라 자녀들을 불러 폭행장면을 지켜보게 한 '인간말종'이 바로  마오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마오는 권력 장악을 위해 부하를 시켜 동료 공산당원뿐 아니라 그 부인들의 "음부를 불이 붙은 심지로 지지고

젖꽂지를 조그만 칼로 도려"내는 등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한 뒤 죽이는 야차 같은 인물이다.

대장정 기간 동안 홍군 병사들이 "무릎과 살이 벌겋게 벗겨져"며 메고 가는 가마 위에 누워 독서를 즐기는가 하면,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당 중앙이나 모스크바에 굴종적인 제스처를 보이다가도

권력을 위해서는 부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비열한 인간이 마오다.

그래서 학살의 방식이나 죽어나간 숫자나 나치의 유대인 학사이나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 '저리 가라'다.

전시는 그만두고라도, "전시도 아닌 평화시에 7,0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희생된" 시대갸 바로 '마오시대'였음을

저자들은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마오는 1976년에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의 가까운 동료들은 거의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사망하고 없었다."

  

흥미롭게도  저자들은 마오쩌둥에게서 사상이나 신념보다는 현실의 어떤 물리적 지점을 앞세우고 있다. 

즉 마오는 어떤 '장소'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는데, 때맞춰 이념이나 사상이 그를 찾아온 것뿐이라는 논리다.

말하자면 마오의 공산주의는 내부의 신념에서 피어난 게 아니라 외부에서 입혀졌다는 것.

실상 마오의 공산주의는 그의 현실적 욕망이 걸친 외투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 점에서 마오는 어쩌면 사상 같은 '휘발성 기체'따윈 그리 신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그는 현실이라는 '고체',  현실의 중력이 고이고 그것을 내려받는 교차점을 탐색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인 것 같다.

 

마오의 자기중심주의를 감안하면, 마오가 "확장되는 조직에 편입된" 존재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오의 이후의 삶이 온통 '중심'을 향한 무자비하고도 끊임없는 탐색으로 점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장정은 일단 대일항전이라는 세계사적 명분을 향한 일사분란한 행군이 아니다.

그것은 마오, 장제스, 모스크바 3자의 욕망으로 꼬인 길일 뿐이다.

 

한편 장제스는 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홍군을 완전히 토벌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그가 홍군에게 서북 쪽을 열어 준 것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방향이 하필 서북 쪽인 것은 홍군을 쓰촨성으로 몰아넣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곳은 인구 5,000만 명의 큰 성인데다 물산이 풍부하여 그가 탐내던 성이었지만,

독자적 군대도 갖고 있어 그가 차지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만약 홍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으면 성의 군벌들이 겁을 먹고 자신의 군대를 성 안으로 들일 거라는 게

장제스의 계산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쓰촨성을 수중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마오』는 '자기중심주의/권력에의 집착/고도의 이미지 전략'이라는 3각구도를 통해 마오의 광기를 해명하는 책이다.  

- 이중텐, 중국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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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西安)에 가면 <화청지華淸池>라고 있습니다.

양귀비가 목욕하던 데라는데, 가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거기다 아방궁을 크게 짓고 있더군요.

몇일 전에 다녀온 친구에게서 들었습니다.

중국이 '관광산업이야말로 알짜배기 돈이 되는 사업'이란 것을 알아챘습니다.

관광에 눈 뜬 시기가 우리나라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요 근래에 지자체들이 나서서 축제니 뭐니 하며 일 벌리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애들은 규모에서 껨이 안됩니다.

긴 안목에서 보면 아주 잘못하는 일인데, 어쨌든 간에 무지막지하게 벌리고 있습니다.

하남성 정주 황하유역에 가보면 <염황이제像>이라고 해서, 큰바위 얼굴처럼 만들어 놓은게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식입니다. 유치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진시황릉 발굴작업을, 하고는 있다더군요.

십여년 전에 제가 갔을때는 저기가 진시황 무덤이란 말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 전봇대도 꽂혀 있고, 허술한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그냥 사과를 재배하던 평범한 과수원이었습니다.

지금은 계단도 만들고 망루도 만들고 했는가 보더군요.

당시에 일본에서 제안을 했답니다. 자기네가 발굴작업을 대신 해주겠다고요.

발굴비용을 5조원 정도로 잡는데, 그 부담도 일본이 안기로 하고 말이지요.

그러고나서 관광수입을 반으로 나누자고 했답니다.

아마도 강택민 시절이었을텐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답니다.

훗날 자신들의 손으로 하겠다는 거지요. 자기네 조상 무덤을 왜 남의 손에 맡기냐는 겁니다.

일본이 당시에 큰소리 치긴 했어도 과연 감당할 능력이 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기관 장치를 매설해 놨을 거라는 점에 대해서 학자간에 이견이 없답니다.

병마용갱 근처에 '명13황릉(明13皇陵)'이 있는데, 거기도 들어가보면 잠금장치를 교묘하게 해놨습니다.

그거 발굴하는데도 애먹었답니다.

그런데 진시황릉은 그보다도 최소한 천 배는 복잡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한마디 더 해보면,

얘기 들으셨을 겁니다. <아바타> 영화의 배경이 중국 장가계(張家界)라고요. 

그 장가계의 산세가 참 특이합니다. 영화랑 비슷합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지요.

독일 사람이 개발했답니다. 개발 후 50년간 수입을 챙기는 조건으로요.

지금은 물론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만 본전은 커녕 10배 100 빼먹고 갔답니다.

중국애들이 엄청 억울해했지요. 그러면서 눈 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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