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0. 12:00ㆍ중국
"제 얘기는 아래에다 붙이겠습니다."
현대 중국화가 /왕관청(汪觀淸) /풍교야박(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 (월낙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달은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 내리고
강촌교와 풍교의 고깃배 불빛을 마주해 시름 속에 조는데
고소성 밖 한산사(寒山寺)에서
한밤에 울리는 종소리는 나그네 배까지 들려오누나
- 장계(張繼), 『풍교야박(楓橋夜泊)』
※ 소주(蘇州) 교외 풍강(楓江)의 작은 다리 풍교(楓橋)에 배를 대며 밤 풍경을 읊은 시다.
과거에 떨어져 속절없이 귀향길에 오른 장계가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지었다 한다.
청(淸)나라 때 강희(康熙) 황제가 이 시를 기억하고 있다가 훗날 이곳을 들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한산사(寒山寺) 앞을 흐르는 운하인 풍강에는 두 개의 아치형 다리가 있다.
절 앞에 있는 다리가 강촌교(江村橋)이고, 절 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다리가 풍교(楓橋)이다.
지금의 강촌교(江村橋)는 1706년 강희제(康熙帝) 때 중건한 것이라 한다.
※ 강풍(江楓): 강가의 단풍나무라는 주장과, 강교(江橋/강촌교)과 풍교(楓橋)라는 주석이 엇갈리고 있다.
여기서는 후자를 택했다.
※ 고소성(姑蘇城)은 소주성(蘇州城)의 옛 이름.
소주 한산사(寒山寺)는 당대의 이승(異僧)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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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晴耕雨讀 /글쓴이 : 逍遼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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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만든 지가 얼마 안되는 모양입니다. 저는 본 기억이 없네요.
북경 상해가 변했듯이 소주 항주도 십 몇년 사이에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이 한산사(寒山寺) 입구에는 너절한 노점상들이 죽 늘어앉아 있었는데,
탁본을 뜬 글씨를 파는 장사꾼이었죠.
국내외 관광객들을 붙잡아 세우고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장삿꾼들이 서로 팔겠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작품(?) 한 장당 오천원을 부르다가 나중에 떠날 시간 되면
다섯장에 오천원까지도 내려간답니다..^&^;
입장료를 내고 한산사 경내에 들어가서도 글씨를 파는 데가 있습니다.
거기서 파는 건 가짜 아니죠.
정식으로 여기 있는 비석들에다 기술자가 탁본을 직접 뜬 것입니다.
비석 앞에서 미리 탁본을 신청했던 관광객들에게 탁본 뜨는 것을 실연해 보여줍니다.
젊은 친구가 물구나무 서서도 찍고,, 온갖 쇼를 다 합니다.
그리고 그 진본에는 빨간 인주로 낙관(?)을 찍어준답니다.
말하자면 진품 확인도장인 셈이지요.
하루종일 비석 앞에 서서 손님을 받는 건 아닙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비석을 순서대로 주욱 돌면서 신청을 받는 것이지,
관광객이 시킨다고해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면서 뜨지는 않습니다.
값은 당연히 비싸죠.
당시 환율로 200위안인가 받았으니까, 26,000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신청자가 별로 없는데,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횡재라 할 수 있지요. 왕희지 비문을 어디서 봅니까?
아 그럼, 길가에서 팔던 싸구려는 어떻게 된 거냐고요?
집에다 목판본을 똑같이 만들어 놓고 떠오는 거랍니다.
얼핏 봐서는 구별이 안되지요.
- 1 -
그림은 계림(桂林)에 가면 많이 파는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소주 항주에 대한 얘기만 해보렵니다.
보통 여행코스로, 상해-소주-항주,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상해와 소주는 지척지간이라 할 수 있고,
항주는 좀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제가 갔을때 <상해-소주>간은 고속도로를 건설 중이라서 1시간 좀 더 걸렸습니다만
지금은 이십분 거리라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소주-항주>는 왕복 2차선에 통행차량이 없고, 一字 도로라서 괜찮긴 했는데,
밤안개가 심한 탓에 50km/h 이내로 가다보니 6시간이나 걸렸더랬습니다.
상해와 항주는 별개의 도시입니다.
청나라 시절만 해도 상해보다는 항주가 월등히 컷을 겁니다.
항주야말로 유서 깊은 도시지요.
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의 오나라 수도 건업(建業)이 항주일 겁니다.
한산사 경내에선가 손권과 유비가 칼로 돌을 베었다는 그 돌이 있습니다.
소주는 이태리의 베니스 같은 도시라 일컫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도로 뚫리듯이 골목골목 수로가 있긴 한데, 물이 엄청 더러웠습니다.
우리나라 70년대 공단지역 같았었죠.
지금도 첨단 산업단지로 변했다고 들었습니다.
소주(蘇州)가 옛날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났었답니다.
그래서 부호나 권문세가들의 별장이 많았다더군요.
<졸정원>이라고 해서 유서깊은 별장이 한 곳만이 남아 있긴한데,
관리 상태도 그렇고.... 그저 그렇습니다.
- 2 -
소주에서 항주 가는데 휴게소가 한 개밖에 없다는 겨.
6시간이나 가는데 변소가 한 개 뿐이더라 그 말이여.
그런데 그 변소란 것도 말이여, 외양은 울나라 60년대 공동변소처럼 생겼는데,
들어가 보니까 남녀구분도 없고 말여, 이건 뭐 문짝도 없는겨.
쪼그리고 앉아서 둘레둘레 보면 저 끝에 앉은 놈 머리통까지 다 뵈는 겨.
그것만이 아녀. 마주보고 앉게 돼있는겨.
똥싸면서 같이 신문 앞뒤로 읽게 생겼더라 이 말이여.
그 당시에는 중국은 관광지 어디를 가도 그런 식으로 화장실 문이 없었어.
그렇더라도 설마하니 수도 북경의 자금성은 다르겠지 했는데, 마찬가지여. 참말로.
중국 관광의 일번지가 자금성이 아녀?
자금성 입장료 내고 딱 들어서면 화장실 큰 게 하나 있거던.
문은 있는데, 뒤는 허공 낭떨어지여.
서로 엉덩이는 안뵈지.
그런데 뒤로 넘어졌다가는 죽게 생겼어. 깊이가 2미터쯤 되여.
(바닥은 타이루 깔고.)
그렇다고 앞에 꽉붙잡을 말뚝 같은게 있는 것도 아녀.
불안해서 힘 못주지.
그리고 밑에는 도랑물처럼 물이 흘러내려가는데....
저쪽에 앉은 사람 똥이 흘러내려오는게 환히 보여.
바닥 타이루도 하얀데. 어휴.
- 3 -
지난번에 정주 낙양 갔을때 얘기했자니여.
평야가 오백리 칠백리 이어지더라고 말이여.
여기도 마찬가지여. 무덤도 하나 없는 겨.
차이가 있다면 낙양 거시기는 전부가 밭인데 여기는 전부가 논이여.
사탕수수도 많이 심었대.
여기는 사방이 맨 둠벙이여. 저수지 크기는 아니고, 적당한 축구장만 햐.
길 따라가면서 강은 못 봤는데,
강이 없더라도 그 정도 물이면 농사 짓기는 충분하겠대.
아, 그런데, 그 물이 참 논물이 아니여.
새우 기르고, 참게 기르고, 개구리 기르고, 붕어 잉어 기르는 물이리야.
중국 가면 왜 식자재가 다양하자니여. 그게 다 저런 데서 나오는 겨.
저기도 담장이 없어. 산동성 밑엣 지방은 담이 없디야.
제대로 된 담은 우리 조선족이 많이 사는 데서부터리야.
다시말해서 동북지방을 가야만 제대로 된 담을 볼 수 있다더라고.
요즘 우리나라도 서양 흉내낸답시고 담을 없애는데 말이여,
담장이란 걸 그렇게 간단히 만만하게 보면 안되는 구석이 있는겨.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정서....그런게 배어있는 거란 말이지.
봐바,
세계 나라들 보면 힘 세고 잘사는 놈들이나 담 치고 살았지, 백성들은 담 없이 살았어.
그런데 우리나란 밑바닥 천한 것들까지도 담은 치고 살았자니여.
이거야말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다 이 말이여.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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