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0. 09:42ㆍ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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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망한다고 외쳐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적의 공세와 소강상태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좀 소란스럽다가 가라앉겠지.
설마 미국이 버티고 있는데 아주 망하기야 하겠는가?
월남을 잘 알수록, 그 사회에 오래 묻혀 살아온 사람일수록 월남의 급작스러운 패망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대사관측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민들은 LST라는 절호의 피난 수단을 기피하였고,
월남 패망 마지막 날인 4월 29일과 30일 미국 대사관 뜰에서 헬기를 얻어 타려고 우왕좌왕하는 한국인의 수는
또다시 놀랍게도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월남 패망의 시나리오를 최종적으로 쓴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결국은「미국」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미국은 정해진 시간에 쫓기듯이 우방인 한국의 다수 공관원과 교민들, 수많은 난민들을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월남전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 가지 분명한것은 「우방」이자「혈맹」이며 월남전에서 같이 피를 뿌리며 싸웠던 한국이
「그 날」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숨막히는 사이공 탈출,
한국인들은 어떻게 빠져나왔으며 누가 최선을 다했던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한국인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고초를 겪어야했나?
분단국가 한국민들은 베트남 엑소더스의 교훈을 어떤시각으로 봐야하는가?
마지막 주월 한국대사 김영관씨 등 관계자들의 비화 증언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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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베트남 엑소더스
역사에 있어서 한 사태의 종결은 또 다른 역사의 시작과 맞물린다.
1975년 4월 30일 막을 내린 베트남 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국 해외 공관의 엑소더스를 기록하였으나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한·베트남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는 이 시점에서,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던 구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던 4월의 주월 한국대사관의 엑소더스를 되짚어 정리해 봄으로써
그 때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겸허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975년 4월 9일, 봄날의 엷은 안개가 끼어있는 부산항 중앙부두를 해군 수송선(LST) 제815함 (북한함, 함장 이윤도 중령),
810함 (계봉함, 함장 박인석 중령) 두 척이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장병들에게 알려진 출항목적은 「남지나해 훈련」.
그러나 실제로는 풍전등화와 같은 베트남에 남겨진 한국 공관원과 교민들을 철수하기 위해 발진하는 대탈출극의 시작이었다.
비록 미국과의 협의 아래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철수계획은 수립되어 있었으나
1천 여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베트남 잔류 한국인들을 우리 손으로 안전하게 싣고 오기 위한 최후의 구조선이 떠나는 참이었다.
LST 2척이 부산항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베트남의 정세는 아직도 유동적이었다.
사이공 정부는 금방 망할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도 쉽게 떨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기묘한 안도감을 주면서 용케 버티고 있었다.
경찰을 합하여 1백만이 넘는 군대가 아직 잘 짜여져 있었고, 비행기 2천대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휘발유 5년 분을 저장해두고 있고,
세계 최강의 미국이 여차하면 엄청난 화력을 다시 퍼붓기로 약속을 하고 있는 땅….
따라서 LST 815, 810함 두 함정이 부산항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십자성(十字星) 계획」으로 명명된 파월 특수수송분대
(사령관 권상호 대령)는 자신의 임무가 패망의 마지막 불길 속에서 대탈출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을 못하기는 이 함대의 파견을 요청한 주월 한국 대사관의 김영관 대사 (전 해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고,
함대를 월남으로 보낸 본국의 외무부나 국방부, 해군본부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4월 30일에 베트남 정부가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십자성 계획」의 함대는 애초에는 월남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의약품, 식품, 의류 등 구호품을 싣고 가는 평범한 수송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월 한국 대사관은 기왕에 월남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LST가 본국으로부터 파견되는 호기를 최대한으로 이용키로 하여
이 함정에 주월 공관원, 상사원, 교민들을 실어 철수키로 계획을 세운다.
십자성 계획
십자성 계획」에 동원된 함정은 모두 3척이었다.
먼저 4월 9일에 부산항을 떠난 LST 815, 810함 두 척의 임무는 ① 월남 구호물자 수송 ② 월남 피난민 수송작전 지원 ③ 유사시 대사관 및
교민철수로 명시한 것처럼 월남 정부가 요청한 구호물자 수송이 첫째 목표이고,
그 다음은 역시 월남 국내의 피난민 수송을 돕는 일, 마지막으로 유사시에 한국 공관원과 교민 철수에 사용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배가 남지나해를 항해하는 동안 사태는 급전직하로 돌변하여 맨 마지막에 끼워두었던「유사시」의 임무를
긴박하게 수행하게 된다.
한편 주월 한국 대사관과 본국 정부는 진짜「유사시」를 위하여 또 한 척의 LST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앞선 함정들보다 열흘이 늦은 4월 19일에 부산항을 출발한 LST 808함이 그것이다.
808함의 출항 목적 역시 첫째는 월남 구호물자 수송으로 되어 있었으나 사실은 주월 한국 대사관 요원과 교민 및 재산의 철수가 기본
목표였다.
앞서 떠난 두 척의 LST는 월남 정부 요청에 따라 구호물자 수송을 전담하고 뒤따라가는 808함으로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을 철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808함은 항해 도중에 베트남 패망의 소식을 듣고 뱃머리를 돌려 815, 810함보다 6일 전인 5월 7일에 부산항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LST 2척이 구호물자를 가득싣고 남지나해를 항해하고 있는 동안 베트남의 전황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고,
주월 한국 대사관과 본국 정부의 이에 대응하는 움직임도 긴박감을 더해 가고 있었다.
1975년 1월초,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지대 요충지인 푹 롱성(省)이 베트콩의 공세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캄보디아로부터 사이공을 향하는 최단거리의 전략요충이 베트콩의 장악 하에 들어갔고,
사이공의 이마에 뜨거운 불길이 닿게 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각국 대사들을 불러 전황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정작 믿었던 미국은 포드 대통령이「의회와 협의 중」
이라고 얼버무리며 마지막 원조조차 제공하지 않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미국이 손을 뗐다」는 인식이 전 세계에 독감처럼 전파되었고 베트남 국민들도 더 이상 미국과 자국 정부를 믿지 않게 되었다.
휴전협정에 아랑곳없이 사이공을 향한 월맹군과 베트콩의 포위망이 압축되고 성도(省都)들의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도 속수무책이었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의 정세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은 1월 말경의 일이었다.
캄보디아가 적화되고, 이어 불똥이 베트남으로 튀면서 캄보디아 접경 요충지가 베트콩의 수중으로 떨어진 때문이었다.
외무부는 주월 한국 대사관에 만약의 사태에 대한 자체 대책을 수립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우선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교포들의 수를 파악하여 단계적인 철수계획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3월 15일부터 철수 준비
이에 주월 한국 대사관은 자체 철수 수단으로서 KAL을 이용한 공로 철수와 함께 해군 LST를 이용한 해상 철수의 두 가지 방법을 입안,
철수 계획서를 작성하여 외무부에 보냈다.
197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아주지역 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인도지나 반도의 위험한 상황변화와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이었다.
이 자리에서 주월 김영관 대사는 김동조 외무장관에게 이미 보고한 베트남의 공관원 및 교민 철수계획을 빨리 승인해주도록 요청하였다.
3월15일부터 주월 한국대사관의 교민철수 준비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우선 교민의 수를 파악해 보니 약 1천2백 여명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숫자는 대사관에 신고한 교민의 수인데, 신고를 하지 않고
베트남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불법 체류자를 포함한 교민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나중 최후의 순간에 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아수라장을 이루는 바람에 정작 대사관의 공관원들이 철수를 하지 못하고 적의 수중에 남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주월 한국 대사관은 우선 철수의 순서를 정하여 ①국영기업체 임직원, ②은행 직원, ③정부 파견 농업기술자 ④KAL 직원 ⑤일반기업체
직원 순으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의료기관에 파견된 의료요원들도 의사, 간호원 합하여 15명 정도 있었으나 베트남 정부가 민심의 동요를 우려, 각국 공관에 공문을 보내
「갑작스런 외국인의 이동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해왔기 때문에 다소 늦게 철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대사관의 공관원들을 제외한 일반기업체, 공직자들의 철수는 비교적 일찌감치 질서있게 이루어졌다.
4월 초순에는 대사관 요원의 가족들이 모두 항공편으로 태국을 경유, 본국으로 돌아가고 대사관에는 대사 이하 24명의 홀아비들만 남았다.
문제는「교민」들이었다.
신고자의 수는 1천 2백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배가 더 될 것으로 추산되는「월남 내의 한국인」들은 그 성분이 워낙 잡다하여
대사관의「통제」가 먹혀들지 않았다.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함께 외화벌이의 첨병으로 베트남으로 몰려 들어간 민간인들은 사실상 외화 획득을 위한 민간인들의
해외 진출사에 효시를 이루면서 60년대의 경제 건설에 큰 몫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 호주, 남미, 중동, 미국 등지로 퍼져나가는 이민 물결의 진원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들이 베트남으로 들어온 경로는 대체로 기업체에 임시직으로 고용되어 들어왔다가 그 기업체가 철수하거나 또는 고용 관계가 해지되어
이국 땅에서 갑자기 실업자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4월 초순까지는 그 수가 파악되지도 않다가 사이공 북쪽의 성도(省都)들이 차례로 월맹군에 떨어지는 4월 중순부터
「난민」이 되어 사이공의 한국 대사관으로 몰려들기 시작함으로써 한국대사관의 마지막 철수작전에 커다란 짐이 되고 만다.
교민들의 비협조적 태도
신고를 해 온「교민」들의 철수문제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우선 서울로 돌아갈「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월남에서 새로 가정을 만든 사람들, 빈손으로는「죽어도」고국 땅을 밟을 수 없는 사람들,
기타 여러 사정으로 귀국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3국으로 보내 줄 것을 원했다. 한국 대사관은 호주 대사관과 접촉, 백호주의의 장벽이 높은 이 나라에 베트남의 한국 교민들
다수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본격적인 호주 이민의 길을 열었다.
제3국으로 보내거나 본국으로 철수시키거나 어쨌든 전황이 긴박한 베트남 땅에서 한국인을 잔류시키지 않고 전원 내보내려는
한국 대사관의 노력은 그러나 애쓴 만큼의 결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첫째 장벽은「교민」들의 비협조였다.
베트남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위험에 대한 일종의 면역증세가 있어서 아무리 「망한다고 외쳐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적의 공세와 소강상태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좀 소란스럽다가 가라앉겠지 설마 미국이 버티고 있는데 아주 망하기야
하겠는가, 하는 믿음(?)이 의식의 밑바닥에 납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베트남이 혹시 망한다 하더라도 최후까지 버티다가 남들이 잡기 어려운 어떤 사업상의「기회」를 잡아보겠다고 노리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추악한 전쟁상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LST가 부산항을 떠나기 전인 4월 초순까지, 주월 한국 대사관은 대부분의 주월 한국 기업체와 공무원(대사관 직원 제외), 그리고 일부
교민들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1천 여명이 훨씬 넘는 교민들이 베트남 땅에 머물고 있었고, 월맹군에 쫓겨
북으로부터 내려온 교민들이 사이공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1975년 4월 3일, 정부의 베트남 철수를 위한 관계부처 대책회의가 김정태 외무부 정부차관보 주재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정부는 매우 중대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미국의 움직임과 월맹군의 공세로 미루어 베트남의 정세가「위기」라고 공식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같은 판단 위에서 관계부터 대책 회의는
① 베트남에서의 한국 공관원과 교민의 철수는 현지 대사가 총지휘토록 하고 구체적인 철수 내용도 대사의 판단에 일임한다.
② 취업교포 및 민간들에게 대한 퇴거 명령권도 대사에게 부여한다.
③민간인 중에서 자비 퇴거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전세기를 투입한다는, 내용의 방침을 정하여 4월 4일 열린 국무회의에 보고하였다.
월남군은 기초가 없는 벽돌집
마지막 항목인 자비 퇴거 불가능한 민간인을 위해 전세기를 투입한다는 계획은 마침 진행 중이던「십자성 계획」과 연계하여
「그렇다면 LST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1975년 4월 3일의 대책회의에서 베트남의 현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베트남군이 얼마나 더 견딜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내려준 사람은 이 회의에 국방부를 대표하여 참석했던 국방부 기획국장 이희성 소장이었다.
이국장은 참석자 중 상당수가「그래도 월남군이 아직 건재하고 있지 않느냐」고 위기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월남군은 벽돌로 지은 집과 같다.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을 때는 단단하지만 기초가 빠져 한 번 기울면 걷잡을 수 없이 와해(瓦解)된다.
지금의 월남군이 기초 없는 벽돌집과 같다」고 비유했다.
이국장의 이 같은 견해가 외무부 관리들에게「철수를 서둘러야 한다」는 의식을 고조시켰고,
외무부 본부의 이 같은 분위기는 그대로 주월 한국 대사관에「철수 독려」로 지시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 대사관은 LST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대사관 가족과 중요 상사원들을 항공기로 내보내고
나머지 교민들을 LST로 전원 철수시키기 위하여 현황 파악, 철수 권유, 베트남 정부와의 수속 대행 등에 전 공관원이 매달려
눈코 뜰 새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적법 출국」에 대한 월남 정부의 강조는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한국 교민들이 철수를 하기 위해서는 출국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출국 비자를 받으려면 세무서의 납세 확인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많은 교민들이 걸려들었다.
아예 수년 동안 불법 체류해 오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여서 이들에 대한「적법 출국」과 모양새를 갖추기란 여간 진땀나는 일이 아니었다.
베트남 정부는 내일 망할지도 모르는 위기감 속에서 태평스럽게도 우방 혈맹국의 교민 철수에 발목을 붙잡고「법에 따라」철수할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이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는데,
나중에 이대용 공사가 사이공의 감옥에 갇혀 있을때 북한측의 집요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교적 자주성을 지켜 우리 외교관을
평양에 보내지 않았던 점과 연관시켜 되새겨 볼만한 것이라 하겠다.
해군 LST에 탑승한 장병들은 함정이 제주도 근해를 벗어날 즈음에야 비로소 항해 목표가 베트남이라는 사실을 지휘관들로부터 통고 받았다.
「십자성 계획」의 기구는 분대사령관 권상호 대령, 참모장 정홍석 중령, 참모 지혁 소령, 김해윤 소령, 옥영규 소령, 그리고 특별히 대사관 파견요원으로 이문학 중령이 가세하였고,
각 함정의 함장은 810함 박인석 중령(외 1백11명), 808함 이종훈 중령(외 1백13명), 815함 이윤도 중령(외 99명)이 맡고 있었다.
각 함정에는 해병요원이 다소 포함되어 만약에 벌어질지도 모를 지상전에 대비하였고, 항해 도중 끊임없이 가상 전투를 위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LST 작전
사령관 권대령을 포함, 815함의 이윤도 함장은 여러 차례 베트남 작전에 가담하여 그쪽 사정을 꿰뚫고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따라서 815함이 기함이 되었다.
반대로 810함 함장 박중령은 어쩌다가「제주도 밖에도 나가본 적이 없는」함장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메콩강에서 죽음의 항해를 할 때는 낯선 전장에서 항로를 열어 가는 용감무비의 활약을 하게 된다.
이문학 중령은「십자성 계획」과 관련, 4월 1일에 한 차례 베트남을 방문한 바가 있었다.
3월 하순경 주월 한국대사관의 김영관 대사는 교민 철수를 위해 LST의 파견계획을 조속히 실시해 줄 것을 본국정부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은「현지의 현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현황 파악을 위한 요원으로 함대 부사령관 김대용 준장과 해군본부 작전과장이었던 이중령이 차출되었다.
이들은 곧장 탄손누트 공항으로 날아가 임무에 착수하였다.
이들이 해야할 임무는 LST의 파견을 위한 선결조치로써 안정항해 여부, 사이공 입항 가능 여부, 기뢰의 부설 유무, 하역작업,
부두 주위의 안전조치, 베트남 정부로부터의 군수물자(식수, 유류 등) 지원 가능 여부, 베트남 합참본부 및 미국대사관 해군관계자들과의
군사적 문제의 협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연 월남사태는 급박한가?」하는 의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 업무들은 그러나 김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의 협력으로 일사천리로 진행, 당초 10일간으로 잡았던 스케줄을 사흘 안에 전부 해치우고
「빨리 떠나, LST를 빨리 보내라」는 김대사의 열화 같은 독촉을 등에 받고 나흘만에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해군 작전참모부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함께 해군본부 벙커로 직행,「십자성 계획」이라는 작전이 밤 새워 만들어졌다.
그리고 LST 2척이 진해항을 떠나 부산 중앙부두에서「인도적 견지의 구호물자」를 싣고 있던 7일, 이중령은 통신요원 중사 2명과 함께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다시 사이공으로 날아가 현지 대사관에 합류한다.
그의 직책은 대사관과 LST 분대사령부와의 연락장교였다.
장장 13일 간의 항해 끝에 4월21일 오후 3시경 815함과 810함 두 척의 LST는 사이공에서 50마일 떨어진(우리나라로 치면 인천과 비슷한
위치) 메콩강 하구 붕 타우의 외항에 도착했다.
위장철수 작전
그 사이에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주월 대사관은 원래 LST 두 척으로는 월남 정부 요청에 따라 구호물자를 하역한 후 빈 배로 월남인 피난민들을 사이공 또는 붕 타우에서
푸쿽섬(우리의 제주도와 비슷한)까지 실어다 주는 역할을 맡고, 뒤에 오는 808함에 교민들을 실어 철수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먼저 도착한 LST 두 척에다 공관원, 교민들을 몽땅 실어 보내고 뒤에 오고 있는 808함을 바다 위에서 뱃머리를
돌려 회항케 해야 할 정도로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인도적 견지」에서 베트남 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온 LST 두 척을「교민철수」최우선의 목적으로 변경, 사용하기 위해서는
베트남 정부와 미묘한 마찰을 빚지 않을 수 없었고, 자칫하면 교민을 싣지도 못하고 내쫓기는 신세가 될 판이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일종의 기만작전인「위장 철수」였다.
한국 교민의 철수를 위해 불가피한 최선의 길이었던 이 위장 철수작전은 김영관 대사가 진두지휘하고 권상호 사령관이 적극 호응하여
성공을 거둔 철수작전이었으나 당시에는 국제간의 관계도 있고 하여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815함과 810함이 붕 타우 외항에 도착하자 베트남 정부는「붕 타우에 구호물자를 하역하고 그 자리에서 난민을 실어 푸 쿽섬으로 철수
시켜 달라」고 했다. 여기서「난민」이란 월남 난민을 말하는 것이지 한국 교민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사관으로서는 우선 우리 LST를 사이공으로 불러들여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한국 교민들을 사이공에서 붕 타우까지 이동시키는 데 따른 위험을 감안하면 붕 타우에서 교민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 정부에 그런 사정을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한국 해군 LST는 월남 피난민을 도우러 온 것이지 자국 국민의 철수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창했던 구호물자 전달식
김대사는 21일 외무부 장관에게 전문을 보내「붕 타우는 기항지로서는 적합하나 사이공으로부터 붕 타우간의 도로가 사태악화와 동시에
위험성이 극히 많으므로 사이공 해군부두에 기항해야 하며, LST의 용도에 대해서는 본직이 선택하여 교민 철수에 사용하도록 위임하여
줄 것, 여기서 발생하는 주재국과의 문제는 현지에서 협조 해결하겠다」고 요청했다.
즉 LST를 사이공으로 기항시켜 본래 목적과 다르게 교민 철수용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달라, 만약 현지 정부와 마찰이 생기면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말이었다.
결국 LST 두 척은 사이공의 뉴 포트 해군 기지에 기항하였다.
「구호물자」를 하역하고 전달식을 거행해야겠다는 당당한 이유가 먹혀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문학씨의 증언)
-「당시 자유중국 LST 몇 척이 뉴 포트에 기항하기 위하여 붕 타우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우리와 순서가 바뀌었다.
우리는 구호물자를 가득 싣고 있었고 자유중국 배는 빈 배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철수작업의 성공을 알리는 청신호였다.」-
4월22일 12시에 LST 두 척이 뉴 포트에 도착하자마자 굉장한 행사가 벌어졌다. 이것은 한국 대사관이 위장용으로 일부러 과장스럽게
마련한 것으로 구호물자 전달식이 거행된 것이었다.
베트남의 구호부 차관이「한월 양국은 과거 20년간 자유를 위하여 같이 싸운 형제…」 운운하는 인사를 하고 김대사가「월남이 조국
평화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이 구호품이 피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김대용 해군 준장, 이문학 중령이 사회복지장 1급, 권상호 대령, 정홍식 중령, 박인석 중령, 이윤도 중령, 대사관의 김창근 2등 서기관, 김기원 공보관 등이 사회복지장 2급의 훈장을 받았다.
다음 날인 23일 오전 11시부터 구호물자 하역작업이 시작됐다.
(이문학씨의 증언)
-「원칙적으로 하면 48시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대사관이 교민들의 승선시기를 26일로 잡아놓고 준비를 하기때문에
시간을 좀 끌어야 했다.
다행히 베트남 보사부에서 보내준 인부 10여명의 동작이 하도 느려 25일까지 하역작업은 지지부진이었다.
결국 25일부터는 우리 사병들을 동원, 밤 새워 하역을 끝내고 당일날 예정대로 교민들을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LST 두 척에 교민을 싣고 나오는 것은 당초의 작전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함대의 지휘를 맡았던 권사령관으로서는 이 엉뚱한(?) 계획을 거부하고 하역 즉시 배를 몰고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권상호씨의 증언)
-「베트남 정부의 눈을 속여 위험을 무릅쓰고 교민을 태운 것은 순전히 김대사의 집념과 나의 결단 때문이었다.
우리(김대사와 나)는 밤을 새워가며 구수회의를 했다.
교민들을 독려하여 LST에 태워서 출항하는 것은 내 영역이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책임은 무슨 책임인가?
본국에서 날아온 다음과 같은 「작전지시」들이 그 책임의 소재를 말해준다.
본국 훈령 거역한 김 대사
4월25일 날아온 작전지시에 의하면「본전수령 즉시 구호물자 하역을 중지하고 교포 탑승 (대사관 직원 및 연락장교, 통신원 포함)
귀국하라」는 다급한 내용이었다.
즉 교민들은 민간인들이니 굳이 다 철수시키려고 애쓸 것 없이 공관원과 해군함정만이라도 시급히 적지에서 빠져 나오라는 지시였다.
본국에서 바라본 월남 사태는 그토록 다급하였다.
그러나 현지 대사와 파견 사령관은 본국의 훈령을 거역하고(?) 교민들을 끝까지 철수시키자는데 의기가 투합 되어 있었다.
다시 26일에 날아온 본국 훈령은「귀 분대가 사이공에 체류한 채 메콩강이 봉쇄될때 이에 따른 문제의 중요성과 그 결과를 감안하면
한시라도 체류할 수 없는 실정임을 명심하여 군 통수계통의 지시에 의거 행동하라」는 단호한 것이었다.
메콩강이 봉쇄되어 해군 함정 두 척과 장병들이 나포될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
그것은 국가의 위신과 관련된 아주 중대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현역 군인들은「포로」가 된다.
이「포로」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평양 거리에 나타나 행진을 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본국에서 월남 사태를 바라보는 박대통령 이하 해군 사령부 지휘관들의 머리 속에는 이「잘못 될 경우」의 그림이 악몽처럼
달라붙어 있었을 것이다.
이미 외무부 장관에게 LST를「본직이 선택하여 교민철수에 응하도록 위임하여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는 김영관 대사는
권사령관이 25일 본국의 지시 전보를 가지고 오자 그냥 출항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교민들에게 LST로 실어보내기로 설득해 놓았고,
이들이 26일 아침에 전부 모이기로 했는데 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모든것을 내게 맡겨라 여기까지 온 이상 대사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나를 대사로 생각 말고 해군 참모총장으로 알고 지시에 따르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그러자 권사령관도「대사가 아닌 해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알고 따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이 같은 현지의 결정이 본국에 보고되자 국방부에서는「즉시 나오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으나
박대통령이「현지 대사의 지시대로 하라」는 최종단안을 내려줌으로써 본국과의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된 셈이었다.
그동안 대사관측에서는 LST가 입항하기로 결정된 다음부터 줄곧 한국 교민들에게「더 이상 잔류하면 위험하니 LST편으로 귀국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교민들은 말을 듣지 않고 소극적이었다. 교민회장과 김상우 목사 등이 설득에 나섰고, 김대사는 교민들을 대사관 뜰에 모아놓고
매일같이 호소를 했다. 특히 출국비자를 갖지 못한「문제 있는 교민」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 외에 달리 기회를 만들 방법이
없는 형편이었다.
2,500명 승선시켜
한편으로는 교민들을 설득하여 26일 집결토록 조치를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무사히 싣고 떠날 핑계를 만들어야 했다.
한국 대사관은 월남 보사부에다「한국 교민들이 자꾸 북쪽에서 내려와 사이공에 집결하는데 여기 그냥 방치할 수 없으므로 푸쿽섬에
옮겨 수용해야겠다. 푸쿽섬에 수용하기 위해 약간의 천막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월남 정부도 거절하지 못하였다. 한국 LST가 월남 피난민들을 푸쿽섬으로 싣고 가면서, 가는 길에 한국 교민들도 그 섬으로 싣고 가
수용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 교민들의 LST 승선은 일단 합법화되었다.
대사관에서는 이들 승선 인원들을 일일이 분류하여
①한국인 ②한국인과 관련 있는 월남인 ③순순한 월남 교민들로 구분하고
이들을 쉽게 식별하기 위해 모양이 약간씩 다른 리번을 가슴에 부착케 하였다.
승선은 26일 아침 6시부터 시작됐다.
한국 해병 사병들이 리번에 따라 ①번과 ②번은 815함에 태우고, ③번은 810함에 태우는 분류작업을 하였다.
4월26일 아침 6시부터 시작된「난민 승선 작업」은 오후 4∼5시경에야 완료되었다.
기함인 815함에 승선한 인원은 모두 1천3백 여명. 그리고 푸쿽섬까지 실어다 줄 월남 난민을 실은 810함 역시 1천2백 여명의 난민을
승선시켰다.
이렇게 교민들을 싣기까지 주월 대사관측은 4월 1일부터 24일까지 전후 3차례에 걸쳐 신고를 접수하고,
출국에 미온적인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는 권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고를 하면서 24일까지는 사실상 영사업무를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란과 같은 제3국으로 일부 기술자를 내보내는 한편 출국 서류에 하자가 있는 교민들을 위하여 재무성 (세금 청산관계),
내무성(불법체류관계), 법무성(형사범 교민의 석방관계)과 접촉, 사안들을 일괄 처리토록 승인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교민들을 결집시켜 승선토록 한 것인데 일부 교민들은 여전히 뒤로 처졌고, 배에 탔다가 도로 내려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이 광경을 본 해군 장병들은 「교민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울화통이 치밀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앞서 1천1백36명으로 집계되었던 재월 한국인은 그동안 항공기 편으로 떠나고 LST에 승선한 인원을 합쳐 9백72명이 빠져나가고
26일 저녁 현재 공관원 10명을 포함 1백 64명이 잔류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떠나는 시기」를 놓고 논쟁
LST 편으로 부산항까지 돌아온 인원은 1천3백35명. 이 중에 한국인은 2백50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월남인, 중국인, 필리핀인이었다.
대사관측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민들은 LST라는 절호의 피난 수단을 기피하였고, 월남 패망 마지막 날인 29일과 30일
미국 대사관 뜰에서 헬기를 타려고 우왕좌왕하는 한국인의 수는 또다시 놀랍게도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어쨌든 LST는 난민들의 승선을 완료하였다. 다음은 출항시간이 문제였다.
김대사와 해군 지휘관들이 모여 논의를 거듭하였다.
의견은「지금 당장 나가자」는 쪽과「곧 어두워지니 내일 아침에 나가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먼저 「야간 항해 불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사이공에서 붕 타우까지 50마일의 메콩강은 뱀꼬리처럼 꾸불꾸불하고 지류가 복잡해 대낮에도 파일럿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운 항로이다. 하물며 지금은 달도 없는 야간인데다 야간 항해의 유일한 길잡이인 등대들도 베트콩에 의해 모두가 파괴되어
버렸다. 어둠 속의 항해 그 자체도 위험하거니와 중간에 베트콩의 습격을 받는다면 속수무책이다.
대개 이런 이유들이었는데 모두가 적절한 이유였다.
반대로「지금 떠나야 한다」는 주장은 그 근거로서 인원을 가뜩 실은 상태에서 부두에 정박하고 있으면 최상의 공격 목표가 된다.
이미 뉴 포트항도 안전하지 못하므로 한 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본국의 훈령도 긴급 철수를 지시하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베트콩들은 자기네 피난민들을 싣고 가는 수송선을 격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피난민 때문에 갑판을 공격하지 못하는 대신
하부를 공격할 것이 예상되는데 LST는 기관에 정통으로 맞지 않는 한 웬만한 하부공격에는 격침되지 않는다… 등의 이유를 들었다.
해군 참모총장 출신의 결단
김대사가 결론을 내렸다.「지금 나가라」는 것이었다.
「지금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 사령관 이하 함장 여러분들은 월남전의 베테랑들이다. 하구에 닻을 내리고 있다가 당하는 것보다는
항해하는 쪽이 훨씬 성공 가능성이 높다. 여러분의 기술,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라」고 격려했다.
이것은 대사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불과 2년 전까지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사람이 그 부하였고 후배인 장교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결단이었다.
이날 이 자리에 있었던 권사령관과 함장 두 사람은 한결같이「이 작전은 당시 주월 대사가 해군 참모총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실현이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오후 6시 30분. 기함 815함부터 뉴 포트를 벗어나 뱀꼬리같은 메콩강으로 접어들었다.
810함은 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뒤를 따랐다. 당초 810함은 승선이 다소 늦었으므로「다음날 아침 출항하기로」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대사의「당장 떠나라」는 호통에 밀려 815함의 뒤를 따랐다.
(815함 함장 이윤도씨의 회고)
-「6시 30분에 출항하여 지류와 합류되는 지점인 나베에 도착하니 해가 졌다.
810함 역시「다 실었다. 곧 떠나겠다」고 타전해 왔으므로 기다리니 1시간쯤 후에 810함이 나베에 도착, 합류하였다.
810함 함장은 나보다 선배이지만 나는「내가 앞서겠습니다. 따라오시오」하고 기함을 앞세웠다.
메콩강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는 분명히 전쟁의 심장부 깊숙이 위치하고 있었지만 전황에 대한 정보라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저 수도 사이공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막연한 소문들뿐이었다.
따라서 단 1분이라도 메콩강 위에서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절명의 명령에 쫓기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해군 함정은 그 나라의 영토의 연장이다.
우리 영토를 베트콩에 넘겨주고, 이어 평양에 넘겨 줄 것을 생각하면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함상의 전등불을 축제라도 벌이듯 모두 켰다.
갑판 위에 난민용 텐트도 일부러 쳤다. 적이 있다면 이 배가 어떤 목적으로 항해하는지 분명히 보라는 뜻이었다.
갑판에 불을 밝혀 놓으니 함교에서 내다보는 시야가 엉망이었다.
어둠 속에 강줄기는 검은 빛깔이 짙고 엷은 차이로 희미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메콩강 하류는 지형이 편편한 평야지대이고 미군이 주변을 싹 쓸어버렸기 때문에 레이더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부함장이 꾸불거리는 강줄기의 코너를 돌 때마다 각도를 체크하여 위치를 확인해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식으로 항해하니 통상 5∼6시간 걸리는 메콩강 하류를 9시간이나 걸려 겨우 하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 3∼4시쯤인가 파도가 치기 시작하고 그토록 그립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제주도 밖으로 나가본 경험이 없는」810함의 함장 박인석 중령은「야간 항해를 하라」는 대사와 사령관의 지시에
「누구 죽일 일이 있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넘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에 등대도 없는 강줄기를, 적이 어디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항해하라는「미친 명령」을
따르기는 하면서도 속으로는「두고 보자」고 이를 갈며 벼르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 마침내 함정이 붕 타우 외항으로 빠져나와 일단 닻을 내렸을 때 박중령은 자신도 모르게 생리현상을 일으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아침 사이공의 뉴 포트 항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박중령은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두고 보자」고 벼르던 마음이 「고마움」으로 돌변했다.
해군 참모총장 출신의 현지 대사와 그의 후배 권사령관의 기지와 신념이 자아낸「위장 철수작전」은
이로써 성공의 축배를 들 일만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LST 두 척이 월남 난민을 수송한다는 목적과는 달리 한국 교민들을 불법으로」승선시켰고,
대사관의 차량 등 집기를 통관절차 없이 반출했으므로 월남 해군으로 하여금 LST 두 을 나포하겠다는 월남 정부의 강경한 어조의
항의 겸 협박 전화가 대사관으로 걸려 왔다. 월남 난민담당 부수상 판 쾅 단으로부터였다.
교민들에게「위장철수」에 대해 입을 다물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으나 한국인들이 월남 가족들에게 한 이야기가 결국은 새어나가
저쪽 관리들의 안테나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예상을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상대방의 태도가 너무 강경하였다.
전화 통고에 이어 27일 오후에는 부수상 명의의 외교각서가 대사관에 전달되었다.
그 내용인 즉「월남 정부는 해군 참모총장에게 지시하여 약속을 이행치 않고 사이공을 떠난 한국 LST 두 척을 해상에서 즉시 나포하겠다」는 것이었다.
김대사는 일이 어줍잖게 되어간다고 느끼고 월남 해군 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자 해군 참모총장은 사정을 이해하고「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이 쪽을 안심시켰다.
이런 북새통 속에서 푸쿽섬에 도착한 LST 두 척은 피난민 중 C그룹을 하선시키고 A, B 그룹을 각각 절반씩 나눠 태운 후
부산항을 향한 길고 긴 귀항길에 오른다.
(다음은 이윤도씨의 진술이다)
-「푸쿽섬의 외항에서 갑판을 정리하고 있는데 부두에서 월남 경비정 5∼6척이 우리를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닻을 올리는 한편 전투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 경비정들은 우리를 스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항진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배들은 월남을 떠나 도망치는 배들이었다. 이미 월남은 패망한 뒤였다.」
시나리오 주인공은 미국
월남 패망의 시나리오를 최종적으로 쓴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결국은「미국」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월남 마지막 날이 된 75년 4월 30일 사이공을 둘러싼 메콩강 삼각주의 광활한 평원에는 월맹 정규군 14개 사단, 14만의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응하여 미국 제7함대의 막강한 화력도 길게 뻗은 인도지나 반도를 에워싸듯 포진하고 있었다.
미국은 정해진 시간에 쫓기듯이 우방인 한국의 다수 공관원과 교민들을 포함, 수많은 난민들을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월남전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베트콩과 월맹군도 평야지대에 군대를 밀집시켜 노출시키는 것이 미국의 화력 앞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14만 군대를
사이공 주변에 포진시킨 채 태연히 미국이 성조기를 걷고 떠날 시간을 재며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그 시간」은 미국과 월맹 사이에 이미 약속이 돼 있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이다.
다만「그 시간」을 어느 선의 사람들까지 알았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미국의 우방」이자「혈맹」이며 월남전에서 같이 피를 뿌리며 싸웠던 한국으로서는「그 날」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월남 정부였다. 패망의 벼랑에서 대통령직을 서로 떠넘기는 기묘한 정치적 장난이 계속되고 있었다.
1975년 4월 21일 구웬 반티우 대통령이「미국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말과 함께 대통령직을 늙고 병든 부통령 짠 반 후옹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4월 28일 후옹 대통령은 두옹 반 민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미련 없이 던져주고 물러난다.
겨우 이틀만에 사라질 나라의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민장군은「결사항전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대사관 직원의 미묘한 입장
누가 결사항전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태양은 이미 기울었고 각국 대사관은 모두 철수를 서둘렀다.
참전의 혈맹 미국과 한국 대사관만이 마지막 철수의 잔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만큼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았던 탓이기도 하다.
「정리해야 할 일」이란 교민의 철수문제였다. 한국 대사관은 유사시에 공적신분인 대사 및 관원들이 우선적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끝까지 교민들의 등을 밀면서 잔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3명의 공관원이 5년에 가까운 영어생활을 해야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이 문제는 정답을 찾기 힘든 일종의 아이러니다.
대사를 포함, 공관원들이 교민을 남겨둔 채 먼저 떠나오면「대사와 공관원이 저만 살려고 먼저 도망했다」는 식의 도덕적(?) 질타를
당하게 마련이고, 만약 교민들을 위해 끝까지 애를 쓰다가 적의 수중에 떨어져 국가의 외교적인 부담이 될 경우,
「외교관이 자신의 신분도 망각하고 어물거리다가 붙잡혔다」고 욕을 먹기 일쑤이다.
월남 패망일의 한국 대사관 역시 이래도 질타를 당하고 저래도 욕을 먹을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선택」의 장면들을 추적해 보자.
4월 중순부터 주월 한국 대사관은 비상 대책회의를 매일 아침 8시에 열었다. 멤버는 김영관 대사, 이대용 공사(준장), 정순영 무관(대령),
이규수 정치참사관, 김기원 공보관 등이었다. 회의에서 이대용 공사가 철수대책 본부장으로 추대되었다.
회의는 주로 수집된 정보의 분석과 그의 따른 행동방향의 설정에 초점이 모아졌다.
무관인 정대령은 주로 월남군 총사령부에 가서 O·B(Order of Battle·전투 상황도)를 살펴보고 와서 대사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신문에는 전황이 숨가쁘게 바뀌는데 월남군 총사령부의 O·B는 변동이 없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하였다.
즉 월남군 총사령부의 현황판은「마비되었다」는 뜻이고 전쟁 수행의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월남군 사령부의 O·B가 정보로서의 가치를 잃은 대신 이대용 공사는 주로 업무상 자신의 카운터 파트인 미 CIA의 사이공 지부장을 비롯,
티우 전 대통령 등 사이공에 있는 월남정부 고위층의 광범한 지인들을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김기원 공보관은 역시 직책상 자주 접촉하는 외국 언론인들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 비상 대책회의에서는 주로 이공사와 김공보관이 발언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티우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인 21일 저녁 김공보관은 NHK 사이공 지국상실에 들렀다가 NHK 지국장으로부터 흘려 넘길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월맹의 레 둑 토와 키신저가 이미 30일에 완전히 손때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일본 대사관도 극히 일부만 남겨놓고
전원철수하고 있다. 당신들도 빨리 떠나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다.
엇갈린 전황 판단
다음날 아침 비상 대책회의에서 이「정보」를 내놓았다.
김공보관은 이 정보의 신빙성을 강조한 후「그러니 대사관의 직원을 더 줄이고 몸을 가볍게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대용 공사가 그 정보의 신빙성에 회의를 표명하고 미국과 월남 CIA의 견해, 월남군의 건재 등을 들어「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자 김대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회의를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 날 밤 김대사는 김공보관을 불러 그 정보를 대사관 공문 아닌 대사의 개인적 사신 형식으로 대통령에게 타전토록 하였다.
대사관 공문은 이공사의 결재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굳이 반대의견을 가진 이공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통령에게 올려 보낼 편법을
강구한 것이었다.
상황을 보는 눈의 차이는 대외공관원들 사이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이다. 당시 외무부 아주국의 심의관으로서 4월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주국장대리 역할을 수행했던 공노명 외교안보연구원장(전 주소련 대사)도「본부에서보다 현지 외교관들이 월남 정세를
낙관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월남을 잘 알수록, 그 사회에 오래 묻혀 살아온 사람일수록 월남의 급작스러운 패망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현지에 있었던 많은 외교관들이 비슷한 증언으로 들려주고 있다.
4월 26일 저녁, LST를 출항시켜 놓고 그 날 밤이 새도록 불안에 휩싸여 있던 한국 대사관은 이튿날 새벽 LST가 무사히 붕 타우 외항을
빠져나갔다는 전보를 입수하고 한시름을 놓았다. 베트남에서의 철수작전 중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나머지는 탄손누트 공항을 통하여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이럴 때 미국의 힘을 빌지 않고 본국에서 전세기라도 한 대 불러 모두 싣고 떠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대사는 그런 아쉬운 생각을 씹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LST가 무사히 메콩강을 빠져나갔다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사태가 눈앞을 캄캄하게 했다.
27일 날이 밝자 어디서 몰려온 것인지 피난짐 보따리를 싸들고 몰려온 교민들이 2백 명을 넘게 대사관 뜰에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국측의 철수 약속
이미 사이공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피난민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베트콩은 벌써 사이공 대교까지 쳐들어와 교량을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4월 27일 새벽에는 사이공 시내 일부에 대한 베트콩의 산발적인 공격이 있었다. 뉴 포트항도 그 대상이었다. 사정은 급해지고 있었다.
이날 한국 대사관은 LST로 실어보낸 집기와 서류 등외에 남아 있는 서류 중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소각하는 등 대사관의 완전 철수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미 대사관 무관부와 협의하여 미국 군용기 탑승권 1백매를 교부하였다.
여기서 한국 대사관의 최종적인 철수계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민들의 철수를 뒷바라지하면서 한국 대사관 공관원 20여명이 여전히 남아 철수작전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측의「철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사관측의「철수계획단」을 주관하고 있는 기관은 CIA였다.
군대는 일부 경비부대를 제외하고 모두 철수해버린 뒤였으므로 미 대사관의 철수작전은 주로 CIA에 의해 수행되었다
(총영사를 포함한 상당수의 대사관 직원들이 CIA 요원들이었다).
한국 대사관에 대해서는 탄손누트 공항을 통해 빠져나갈 비행기편이 약속되어 있었다.
만약에 탄손누트 공항으로 빠져나갈 길이 봉쇄되었을 때의 최악의 경우에는 시내 곳곳에 암호로 지정된 어셈블리 포인트를 통해
헬기로 떠나 항공모함으로 후송된다는 비상계획이 별도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 일을 위해 미 대사관측과의 연락을 맡은 사람은 무관 정대령과 이상훈 참사관이었다.
그리고 이대용 공사 역시 CIA 등 자신의 채널을 통하여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 대사관측은「비상시」를 대비해 한국 대사관의 인원과 짐을 줄이도록 거듭 요청해 왔다.
탄손누트를 통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빨리 나가고 짐은 1인당 소형 가방 1개로 제한하여 준비하라는 통고가 쉴 새 없이 내려왔다.
한국 대사관도 만약의 작전을 위해 헬기에 비상 탑승해야 할 대사관 인원수를 매일 보고하였다.
몰려드는 한국 교민들의 처리와 비상 철수계획으로 부산하게 보낸 27일이 지나고 28일의 아침이 밝았다.
이날 아침 8시의 비상 대책회의에서는 전원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회의는 주월 한국 대사관의 마지막 공식회의로 기록되었다.
오전 9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이상훈 참사관에게 전화로 긴급 연락이 왔다. 한국 대사관들의 철수를 위해 비행기를 마련해 두었고,
공항까지 싣고 갈 버스를 보낼테니 두 시간 내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바빠졌다. 그래도 한국 대사관은 교민들의 완전 철수를 보지 못하고 몽땅 떠나기가 싫었다. 그래서 미국 측에 제의를 했다.
「아직은 전황이 급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사관 핵심요원 몇 사람은 남아 나중에 헬기로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공항으로 보내면
되지 않을까」...「좋다. 그렇게 하라.」
대사관에서 내리는 태극기
어쨌든 대사관은 문을 닫아야 할 참이었다. 국기를 내리는 의식이 거행됐다.
김영관 대사가 대사관의 태극기를 내리는 역사적인 장면을 한국 특파원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한국일보 안병찬 기자의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이문학 중령은 LST와의 연락용으로 열어 두었던 통신기기를 부하인 통신요원 변중진 중사와 전자사 김형태 중사를 시켜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파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수송분대 사령관(권상호 대령)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1. 사태 급변으로 주월 한국 대사관 연락장교 및 통신요원 2명 긴급 철수함 (통신장비 파기함).
2. 28일 10시 이후 제반 함대 행동은 본국 지시에 의거할 것.
3. 안전항해와 건투를 기원함.
전보를 발신한 시간은 9시 20분.
잠시 후에 통신기기를 파괴하여 뒤뜰 소각장에서 휘발유를 끼얹어 불태워버렸다.
국기는 내려졌고 통신기기는 파괴되었다.
지금쯤 푸쿽섬으로 향하고 있을 LST와의 교신도 끝이었다.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측으로부터 날아온 전언은 엉뚱한 것이었다.
태우러 온다던 버스는 취소되었으니 대사관을 떠나 대사관저에서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으나「시간은 미정」이라는 대답이었다.
공항은 폐쇄되었고 비상 헬기 이륙지점도 벌써 비밀이 새어 일단 취소되었으니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했다.
월남 공군기들의 반란
대사관원들은 한국인 교회의 김상우 목사와 교민 몇 사람을 포함, 모두 대사관저에 집결하였다.
이보다 바로 직전 월남의 패망을 좀더 재촉한 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이공 상공을 편대 비행하여 북쪽으로 가던 월남 공군 비행기 F5중 맨 마지막에 날아가던 전투기 한 대가 갑자기 기수를 하강하여
새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던 독립궁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해프닝으로 사이공 시내는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통행이 금지되었다. 시내 곳곳에는 철조망 바리케이드가 등장하였다.
한국 대사관원들은 간신히 대사관저로 이동하였으나 이곳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28일 아침11시 40분경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직원이 직접 한국 대사관저로 찾아와「29일 중으로 버스로 실어나가도록 주선하겠다.
시간은 미정」이라고 통고하고 가 버렸다.
그러자 김대사는 대사관 직원과 일부 교민들을 둘러보며「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개인적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각자 행동하여
출국하라」고 했다. 그 목소리가 비장하게 들렸다.
김기원 공보관은 에어 베트남의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최병훈 건설관에게「오늘 떠나야 한다. 지금 공항으로 가보자」고 권했다.
최건설관은 김공보관의 말에 건뜻 따랐다.
「오는 길에 공영토건의 김상무 집에서 점심을 먹고 대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상황 변화는 없다. 철수할 수 있으면 하라」고 했다.
최병훈씨의 자동차로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했으나 최병훈씨에게 비행기표가 없어 각자 패스에다 50달러씩을 끼워 넣어 뇌물을 주고
일단 보세구역으로 들어갔다.
그 때 비행기 한 대가 예고 없이 홍콩에서 날아와 계류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러자 보세구역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타려고 앞으로 다투어 뛰어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월남 공군기가 비행장을 폭격했다.
공군 조종사 한 사람이 독립궁을 폭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공항을 폭격했다.
우리는 비행장 하수도 공사를 하면서 맨홀을 파놓은 곳으로 뛰어가 엎드렸다.
10분쯤 후 조용해지길래 머리를 들어보니 비행기 조종사가 비행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아, 저 친구가 비행기를 띄워 도망치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죽자하고 달려 간신히 트랩에 올랐다.
비행기표 따위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렇게 눈치 빠르게 달려든 1백 여명만이 비행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시간은 하오 6시경이었다.
이륙 후 지상을 내려다보니 비행기가 방콕 쪽으로 날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벨트를 풀고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한국인은 소속, 성명, 주소, 전화를 적어내라」고 종용하였다.
33∼34명이 적어냈다.
이 명단은 공항대합실에서 AP 방콕의 각 일간지에 넘겨졌고 4월 29일 서울의 각 일간지에 그 명단이 발표됐다」
김기원 공보관은 탈출과정에서도「공보임무」를 이처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각자 임무는 달랐지만 위기의 가운데 한국 대사관원들 모두가 직책에 충실했고 확고한 국가관과 행동준칙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패망 하루 전날
월남 공군의 탄손누트 공항 폭격은「불의의 사고」였다.
탄손누트를 통하여 미국이 철수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베트콩은 월남 공군기가 반란을 일으켜 공항을 폭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29일 새벽에는 로킷포와 자주포로 탄손누트를 공격, 공항은 마비되었다.
이로써 미국 대사관과 한국 대사관, 그리고 수많은 난민, 교민들의 철수 창구는 갑자기 단 하나의 루트,
즉 미군 헬기를 통한 비상탈출의 한 가닥으로 좁혀지고 말았다.
김기원 공보관과 최병훈 건설관을 제외한 나머지 공관원들과 김상우 목사 등 몇몇 교민들은 28일 밤을 대사관저에서 합숙으로 지새웠다.
4월 29일, 베트남 패망 하루 전날의 날이 밝았으나 이것이 최후의 하루라고 실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혹 최후의 순간이라 하더라도「미국이 버티고 있으니…」하는 생각이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캄보디아가 떨어질 때 프놈펜을 철수했던 미군 헬기의 매끄러운 철수광경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신뢰는 더욱 컸다.
아침 9시. 김영관 대사는 이상훈 참사관과 무관 2명을 미국대사관으로 보냈다.「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지시였다.
3명의 한국 대사관원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관계자로부터「오늘 철수한다. 출발지는 미 대사관 후문의 헬기장이 될 것이다.
가서 대기하라」는 전갈을 듣고 돌아왔다.
대기하는 사이에 교민들은 대사관저로 달려들고 있었다. 전화도 불이 났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살다가 이제 나타나는 것일까?. 1백 여명은 넘는 것 같았다.
대사관은 이들 교민들의 처리 문제로 또 다시 부산스러웠다.
이들에게「가까운 헬기장으로 가서 헬기를 타거나 미 대사관으로 가라」고 일일이 권고하고 있을 때
미 대사관의 톰슨 1등서기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철수작전이 시작된다. 어셈블리 포인트 3으로 집합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버스를 보내겠다고 했다가 곧이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대사관의 차를 타고 오라고 했다.
이보다 앞서 이대용 공사는 이달화 공군 소령, 이문학 해군 중령과 함께「한국 대사관에 타다 남은 서류가 있다」는 전갈을 받고
확인하러 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대사관에 가서 남아있는 서류들을 마저 소각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공사가 평소 절친하던 전 부수상 찬 반 튀엔의 집에
들러 튀엔과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약간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대사는 어셈블리 포인트 3을 향하여 떠났다.
이공사 일행이 대사관저에 도착했을 때는 김대사, 참사관 2명, 서기관 2명, 영사 2명, 통신사 2명, 대사관 고용원, 안병찬 기자,
김상우 목사 등은 이미 떠났고 정영순 대령, 서병호 총경, 해군 사병 2명, 예비역 해군하사관 가족 4명 등이 남아 있었다.
이들도 곧 대사의 뒤를 따라 어셈블리 포인트 3을 향하여 출발했다.
어셈블리 포인트 3은 대사관저에서 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USAID 직원 전용 아파트였다.
그 옥상이 한국 대사관 철수용 헬기 이륙장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미 대사관으로 향하라
김대사와 공관원, 목사 등은 차량 3대에 분승하여 국기를 달고 유세이드 직원 아파트를 향했다.
(김영관씨의 증언)
-「가까운 헬기장으로 가 보니 헬기 착륙장으로서는 너무 빈약해 보이는데다 헬기도 보이지 않았다.
로터리를 돌며 의논하기를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했다.
비상 철수계획에 의하면 지정된 헬기장으로 가거나 미국 대사관으로 집결하도록 택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보다 안전하리라고 생각되는 미국 대사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관계자들의 기억이 서로 어긋난다.
일부 인사들은 이날 대사 일행이 어셈블리 포인트3을 버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가버린 것이「완전 철수」를 그르치게 한 가장 큰 실수
였다고 꼽고 있다.
이대용 공사는 그의 저서 「사이공 억류기」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9명을 인솔하고 제 3집결지에 도착했다. 옥상에는 60명을 태울 수 있는 대형 헬리콥터 한 대가 인원 철수용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권총으로 무장한 미국인 3명과 월남 경비원 3명이 서 있었다. 몇 명의 미국인 가족이 피난짐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아파트 건물 안팎에는 먼저 대사관저를 떠나 제3집결지로 떠났다는 한국 대사관 직원이 한 명도 와 있지 않았다」-
이대용 공사와 함께 대사관으로 갔다가 뒤늦게 제3집결지로 쫓아왔던 이달화씨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공사, 이문학 중령과 함께 대사관에 갔다가, 오는 길에 이공사의 친지 집에 들른 후에 돌아오니 그 사이 미 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대사 일행은 제3집결지로 떠난 후였다. 제 3집결지는 관저에서 2∼3분의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 가보니 옥상에 헬기가 돌고 있었다. 그러나 건물 앞에 대사관 직원은 없고 월남인 경비원들이 아파트 문을 열어주지 않아 들어갈
수도 없었다. 우리 대사관원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더니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고 했다.
부랴부랴 미국 대사관으로 갔더니 벌써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경비원은 우릴 들여보내 주지 않으려고 했다.
외교관 패스를 보여주니 그제야 길을 비켜주는데 조짐이 좋지 않았다.」-
결정적 실수
이달화씨는 제3집결지를 비켜 간 것이「결정적 실수」였다고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한국 대사관원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제3집결지에 헬기를 보낸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건 나중에 내가 항공모함에 철수하여 작전장교들에게 물어봐서 확인한 것이다.
차질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 우리 대사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헬기도 오지 않았고
그 건물을 경비하는 요원들에게 그런 지시도 내려가지 않았을 때였다.
결국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 대사 일행이 너무 일찍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 것도 없는데다 건물에 들여 보내지도 않으니 실망하여 미 대사관으로 가 버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어쨌든 차질은 거기서 일어났다」-
이상훈씨의 얘기는 다르다.
-「나는 김대사의 지시에 의하여 미국 대사관에서 오는 전화를 주로 받았고, 연락도 담당하였다.
그래서 확실히 기억하는데 미국 측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제 3집결지는 우리 대사관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 집결하라고 해놓고도「제일 좋은 곳은 미 대사관이다」고 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다.
어셈블리 포인트 3에서 기다렸으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본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 주변을 두 바퀴 돌았으나 아파트의 문은 꽉 닫혀 있고 경비원은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헬기는 물론 보이지 않았고… 저런 아파트의 옥상에서 헬기가 뜨리라는 생각에 차츰 회의가 짙어졌다.
그 때 누군가 「미 대사관으로 가자」고 했고, 모두들 그쪽으로 옮긴 것이다」-
이규수씨(당시 참사관)도 이상훈씨와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민간인이었던 김상우 목사(현 LA 거주)의 기억은 약간 다르다.
-「대사와 함께 제3집결지로 갔다. 해병대 병사가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냐?」「한국 대사다」그리고 옥상의 헬기를 가리키며「저게 우리가 타고 갈 헬기다」하자 해병은「천만에 그럴 리가 없다.
저건 이곳 직원들 철수용이다」고 하면서 우리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는 수 없이 미 대사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7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억의 내용이 조금씩 다 다르다.
다만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3집결지에서 어떤 한국 대사관원도 헬기장 접근이 불가능했고, 출입마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발길을 돌린 사실을 두고 선악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대사관에 결집한 뒤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위급한 상황 하에서는 이처럼 사소한 일이 대세를 그르칠 수도 있다는 점만은 짚고 넘어가야 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 죄수를 빼내온 서 총경
4월 29일 11시경, 미국 대사관 경내는 약 3천명의 난민들이 몰려들어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한국 대사관원들은 이 시간까지 모두 미 대사관 마당 안으로 모였다.
이 북새통 속에서도 치안국 파견관인 서병호 총경은 레 반 두엣 거리에 있는 지하감옥으로 가서 그곳에서 복역 중이던 한국인 죄수 7명을
빼내오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였다.
미국 대사관은 6천평이나 되는 드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사관은 본관 쪽과 레크리에이션 센터 쪽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원래는 하나의 마당에 들어서 있었으나 베트콩의 습격을 당한 후로는
본관과 레크리에이션 센터 사이에 높이 5m의 어마어마한 담벽을 쌓아 만일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난민들은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수영장 둘레에 집결하고 있었고, 여기서 우선순위 순번에 따라 줄을 세운 후 본관과의 통용문으로
헬기 두 대에 탑승할 인원 1백20명씩을 들여보내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철수용 치누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전에 한국 대사관원들이 도착했을 때 미 대사관 본관 마당에는 그제야 헬기 착륙장을 만들기 위해 하늘 높이 자란 정원수를
포크레인으로 찍어내는 등 법석을 피우고 있었다.
원래 미 대사관에는 옥상에 두 개의 헬기 착륙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미국 측은 이것을 이용하여 최후의 순간에 요인들을 탈출시킬 예정이었으나 28일 탄손누트 공항이 폭격을 당하면서 그쪽 탈출로가 막히자
모든 난민들이 일제히 미 대사관 쪽으로 쏟아지기 시작, 예정에 없던 대량 수송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옥상의 헬기장은 각국 대사, 월남 고관 등 귀빈용으로 사용하고 난민수송을 위해 마당에다 헬기장 두 개를 급히 만들었던 것이다.
김영관 대사는 아침에 미 대사관에 도착하는 즉시 이상훈 참사관과 함께 3층의 마틴 대사 사무실 옆의 대기실로 안내되어 그곳에서
「철수」를 기다리게 되었다. 같은 방에는 마틴 대사를 비롯하여 필리핀, 자유중국 대사, 월남의 고위인사 등 여러 명의 VIP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나머지 한국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레크리에이션 센터 마당에서 불안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본관과 레크리에이션 센터 사이에는 우악스러운 미 해병대가 M16을 삐딱하게 꼬나들고 막아서 있었다.
김대사의 비망록
미 대사관의 3층에 대기하고 있던 김영관 대사는 아래쪽의 공관원들과 교민들 상태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틴 대사가「지금 대사를 위한 헬기가 옥상에 와 있다. 이것을 타고 나가라」고 권하자
「교민들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떠나겠다」고 하며 아래의 마당으로 내려왔다.
마당에 나와 보니 담장 위로 난민들이 넘어 들어오는 광경이 보였다.
한국인들도 있었다. 김대사는 경비하는 미 해병 지휘관에게 신분을 말한 후에「한국 사람들은 여권을 높이 드시오」하고 외쳤다.
한국인들이 여권을 높이 들자 김대사는 직접 그들을 지휘하여 대사관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김대사는 버스를 한 대 내어 사이공 시내의 교민회관, 대사관 등지에 흩어져 있던 잔류 교민들을 끌어 모아
미 대사관으로 집결케 하였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상훈 참사관을 세 번이나 아래쪽으로 내보내 교민들의 이상 유무를 확인케 하였다.
김상우 목사가 김경준 영사와 함께 3층의 대기실로 올라가 김대사를 만났다.
(김상우 목사의 증언)
-「올라가 보니 김대사는 아래쪽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대사님은 외교관이니 지금 떠나야 한다」고 하자「여긴 괜찮으니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고 내려왔다.
그 후로도 김대사는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대사는 이 마지막 순간에 마틴 대사의 대기실에 앉아 백지 위에 흘려 쓴 글씨로 비망록을 남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옥상과 아래쪽 마당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 비망록에 기재된 당시의 상황 개요이다.
-「대사관 정원의 나무를 자르고 헬리포트를 만든 후 첫 헬기가 이륙한 시간 16시 05분, 2차 16시 15분, 3차 16시 51분, 4차 16시 54분,
5차 17시 25분, 6차 17시 54분, 그동안 옥상에서는 계속 20인승 헬기가 이륙했다.
마침내 18시 5분 우리더러 떠나라고 독촉, 아래쪽에 내려가 한 번 더 확인코자 하였으나 이미 층별로 비상구에 셔터가 내려져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고, 길은 오로지 옥상으로 탈출하는 통로만이 열려 있었다.
아래쪽의 철수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한 후 철수 헬기에 오르다.
항공모함 핸코크(Hancock)호 갑판에 내린 시간 19시 19분.」-
닫혀버린 미 대사관 정문
(이상훈씨의 증언)
-「29일 오전 우리가 미대사관 현관에 도착하자 연락관이 내려와「대사님께서는 올라오시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일국의 대사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했다. 그때 김대사는 왠지 날더러 같이 가자고 해 모시고 3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평소에 내가 미국 대사관과의 연락책임자였고, 또 공관원들과의 연락책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 때가 10시 이전이었다.
3층에 올라가니 한국계 여비서가 샌드위치도 갖다주고 대접이 괜찮았다. 그러나 김대사는 철수가 옥상과 마당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대사 본인도 마당에 내려가 교민들의 미 대사관 진입을 도왔고, 나도 몇 번이나 내려가 상황을 살펴보고 올라와 보고하였다.
안병찬 기자를 대사관 영내로 넣어주기도 하고 그밖에도 문 밖의 교민들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아래쪽에는 이대용 공사를 비롯, 모든 한국 공관원들이 모두 대기하고 있어 헬기만 차질 없이 뜬다면 철수에는 이상이 없을것 같았다.
그리고 김대사가 마틴 대사에게 거듭 확인한 바에 따르면「한국인의 전원 철수는 염려하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계단으로 내려가는 철문이 닫혔다. 이렇게 차단된 이후에는 아래쪽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헌병들에게 물어보면「한국 사람들 다 잘 나갔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실제로 4시부터 아래쪽의 헬기가 부지런히 내리고 뜨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6시쯤 미 대사관측이「이제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우리는 중동 대사 등 몇 명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헬기를 탔다.
떠나기 전 그래도 못 미더워 그곳 지휘관에게「한국 공관원들이 밑에서 아직 잔류하고 있으면 대사가 먼저 떠난다고 전하라」고
당부를 했다」-
( 이규수씨의 증언)
「한국 대사는 미 대사관 영내에 들어간 순간부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곳은 그의 권한 밖에 영역이었고, 그 때부터 일어나는
상황은 미군의 문제였다. 그래도 김대사는 미 대사관 구역 내에 우리 교민들을 집어넣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완전한 철수를
보장받기위해 미국 대사와 의견을 교환하는 중에 일이 끝났다.
애만 쓰다가 「설마 미 대사관 영역에 있으니 나오겠지」 안심을 하고 떠난 것이다」
김대사는 아래쪽에서 헬기가 부지런히 철수난민들을 남지나해의 항공모함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뜨고 내리는 것을 확인한 후에
안심하고 미 대사관을 떠났다.
철수권유를 거절한 이대용 영사
그러나 아래쪽의 사태는 김대사의 희망과는 반대로 절망적이었다.
다음은 이대용씨의 회고다.
-「철수작전은 예상보다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밤 8시 40분경, 한국인들은 지지부진한 철수작전을 걱정하며 이렇게 가만히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언제 헬리콥터를 타게 될지 모르니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같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달화 소령의 건의에 따라 별관 북쪽 일직사령실로 가서 전화로 베넷 공사와 통화를 했다. 베넷 공사는 만나자고 했다.
나는 본관 건물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베넷 공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의 사무실은 마틴 대사 사무실과 레만 공사 사무실에 인접해 있었다.
베넷 공사는 제콥슨 예비역 대령과 함께 있었다.
나는 철수본부에 와 있는 한국 외교관 2명이 있는 곳을 물었더니 그들은 이미 남지나해상에 가 있었다.
나는 월남에 있는 한국 외교관으로서는 내가 최고 선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베넷 공사는 이공사더러 대사관 옥상에서 헬기를 타고 7함대로 떠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아래쪽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권유를 거절한다.
이공사는 기다리고 있는 공관원들에게 돌아와 신상범 서기관, 이달화 소령, 안병찬 기자, 이순홍 사장 등과 상의한 후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뭐니뭐니 해도 현장의 통제관을 구슬리는 길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통제하는 군인에게 다가가 한국인을 먼저 내보내
줄 것을 가까스로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별관 수영장 둘레에는 아직도 대기하고 있는 줄이 한없이 늘어서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대용 공사의 지휘 아래 본관으로 통하는 통용문
가까이에 별도로 줄을 서 있다가 다음 차례가 되자 슬그머니, 자연스럽게 통용문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통제관의 묵인 아래 행하는
일이었다.
조급한 마음이 그르친 전원 철수
통제관과의 약속은「절대로 질서를 지킬 것, 조용히 행동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대로 되었다. 한국인 대열의 선두는 통용문에 닿아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한국인 대열의 후미에 있던 사람들이 한 걸음이라도 먼저 나가려고 뛰기 시작하자 대열은 지리멸렬,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 때까지 한국인 대열의 끼여들기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수영장 둘레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일제히
통용문으로 향해 쇄도하였다.
미 해병대는 갑작스러운 폭동(?)에 놀라 통용문을 가로막고「수송을 중단한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슬픈 일이었다. 한국인은 공관원과 교민들 전원이 모두 헬기에 탑승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말았다.
이공사, 이소령 등 공관원들은 진땀이 났다. 만약 철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비로소 불안이 몰려들었다. 현역 군인들이 가장 큰 문제였으므로 군인들이 먼저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였다.
현역은 정영순 육군 대령, 이달화 공군 소령, 이문학 해군 중령, 그리고 해군 중사 2명이었다.
이들은 가방 속에 군복이 있었으므로 재빨리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경비병에게 분관으로의 우선적인 출입을 허가받았다.
(이달화씨의 증언)
「4월 30일 새벽이 됐다. 이제 마지막 문만 열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차례였다.
그 찰나에 통제하던 해병이「미국시민권 가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3∼4명이 나왔다.
그 뒤로 월남인 가족(?)이라는 자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는데 자그마치 1백 명은 족히 되었다.
우리 차례인데 그들이 앞질러 들어간 후 문이 닫혔다.
미국 시민권 못 가진 사람의 비애가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벌떼같이 몰려가 문을 흔들자 해병이 다시 문을 열었는데 그 틈에 정대령이 혼자 들어갔다.
나는 식당으로 가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통용문으로 가 패스를 내밀었더니 나만 들어가게 하고 후미는 잘랐다.
안병찬 기자도 내 뒤에서 저지 당했다.
잠시 뒤에 이문학 중령과 해군 중사 2명도 들어왔다.
본관에 대기하는 줄이 50명이 되자 헬기 쪽으로 이동시켰다.가다 보니 미 대사관 무관인 서머스 중령이 보이길래
그에게「밖에 우리 상관 육군 준장이 대기하고 있다.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서머스는「걱정 말라. 철수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추가로 철수작전이 이어질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 얘기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통용문 쪽으로 가다가 해병들에게 끌려 헬기 쪽으로 돌아왔다」
아비규환
이대용 공사 역시 미국 측의「전원 철수」약속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
(이대용씨의 회고)
-「 30일 0시가 지난 후 통용문이 활짝 열리고 별관에 남은 사람이 모두 본관으로 들어갔다….
본관 정원에는 약 9백 명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네모지어 동쪽과 북쪽 두 곳에 앉아 탑승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헬리콥터 이착륙장에는 2대의 헬리콥터가 약 30분 간격으로 와서 인원을 실어가고 있었다.
4월 30일 새벽 4시 15분경, 한국인 집단 바로 앞줄 사람들과 한국인 일부(안병찬 기자도 포함되어 있었다)가 헬리콥터를 타고
미 7함대로 떠났다.
한국인들이 무더기로 탑승할 차례가 왔다고 모두들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대사관 경비와 민간인 철수를 통제하고 있던 미 해병들이 갑자기 수상한 거동을 보이더니 우방 국민들 약 4백 50명을 향해 최루탄을
터뜨려놓고 등을 돌려 화살같이 현관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공사다. 장성이다. 너희들 지휘관은 어디 있느냐?」
그는 해병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과 함께 대사관 본관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있었다. 그렇게 하면 옥상을 통해 미 해병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약 1백40명의 한국인들을 생각하고, 그곳에 지휘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최루탄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곳에 시한폭탄이 장치되어 있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모두들 미 대사관을 벗어나느라고 또 한 번의 아비규환이 연출되었다.
이 어설픈 탈출극으로 월남 최후의 새벽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남지나해상 미 7함대의 항공모함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한국 공관원들은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고 안타까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김영관 대사와 이달화 소령이 유독 그랬다.
「항공모함 통신실로 가보니 굉장히 바쁘게 설치고 있었다. 대위 한 사람을 붙들고「우리 대사가 어디 있느냐」고 수소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대사는 해군 참모총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7함대의 귀빈으로 환영받았던 탓으로 금방 소재가 밝혀졌다.
내가 탄 항모가 행코크호였는데 대사는 오키나와호로 옮겨져 있었다.
오키나와호로「우리 공관원 10명이 못 나왔으니 긴급 조치해 주시오」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잠시 후에 또 통신실로 가서 방콕에 있는 미국 대사관 무관을 통해 한국 무관을 경유하여 서울의 윤홍정 정보국장에게 닿을 수 있도록
복잡한 경로의 전문을 보냈다.
내용은 정대령을 비롯 국방부 소속 요원은 전원 철수했다는 요지였다.
그래 놓고 식당으로 가니 마침 스피커에서「이소령」을 찾는 방송이 나왔다.
갑판으로 올라가니 나를 데리러 헬기가 한 대 와 있었다. 김대사가 보낸 것이었다.
대사는 내 전문을 받고 곧장 7함대 기함 미드웨이호로 날아가 마틴 대사를 만난 후 방금 오키나와호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대사는 나에게 「방금 마틴 대사를 만나니 자기가 한국 대사관원을 모두 철수시키고 나왔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내가 사정을 얘기하자 대사는 큰 주먹을 내리치며「그럴 수가」하고 통탄해 했다.」-
김대사와 이소령이 있는 오키나와호는 한국 공관의「임시 해상본부」가 됐다.
여기서 7함대의 18척 함정에 모두 전문을 보내「한국인은 모두 신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어 보고를 받았다.
그 내용은 그대로 서울의 TV에 방영되어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달화씨의 증언)
「항공모함은 붕 타우 밖의 바다에서 왔다갔다하며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양, 또는 아쉬움이라도 남은 것처럼 하루를 머물렀다.
그 사이에 월남 해군들이 똑딱선을 타고 탈출하여 항모로 기어올라오고, 미 공군 헬기는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마침내 수많은 헬기가 용도 폐기되어 바닷속으로 내던져졌다.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마틴 미 대사의 잘못된 판단
항모로 철수한 사람들의 일부는 필리핀의 수빅만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곧장 서울로 날아왔고,
일부는 오키나와의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귀국한다.
김대사와 이달화 소령은 전자의 경우였다.
이소령은 수빅만에 내려 클라크 공군기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부터 묘한 인연이 있던 서머스 중령과 다시 조우한다.
이소령은 서머스 중령에게「월남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을 구출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서머스 중령은 이소령을 비행기 안 화장실로 데려가 가방 속에서 미국 측의 철수작전에 대한 보고서 사본을 건네줬다.
그 보고서에는 미 대사관 요원들이 30일 새벽 4시 45분, 한국인, 미대사관 고용원 일부를 포함한 잔류자를 뒤에 남겨놓은 채
서둘러 철수작전의 막을 내려버린 잘못을「마틴 미 대사의 조급한 판단 때문」으로 적고 있다.
마틴이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아직 시간을 충분했는데 그 엄청난 미국의 힘을 어디 두고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그 어설픈 철수작전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이대용씨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마틴이 큰 실수를 했다. 그는 아마 새벽에 베트콩이 사이공강을 건너왔다는 허위보고를 받고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 4시 30분에 철수를 중단시킬 이유가 없었다」-
이대용씨는 베트콩의 노획문서 등 당시의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볼 때 베트콩의 사이공 진입 예정일은 5월 2, 3일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4월 30일 이전에 공황 상태가 일어난 것은 탄손누트 공항에 대한 반란군의 공격으로 철수로가 좁아졌고,
마지막으로 4월 30일 새벽에는「베트콩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허위정보 때문에 결정적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의 일부 월남전 보고서적들이「새벽 4시에 베트콩이 다리를 건넜다」고 쓰고 있는 것은 모두 허위라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었다.
그러면 베트콩들은 어디까지 진격해 있었던 것일까?
사이공강 건너 뚜 덕에 들어와 있었다고 이씨는 말한다.
뚜 덕 다리에서 독립궁까지는 2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서 베트콩들은「약속의 날」인 5월 2일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제풀에 놀란 미국
그러나 제풀에 놀란 미국 측이 서둘러 빠져나가느라 북새통을 치고, 여기에 베트콩이 흘린 가짜 정보에 화다닥 놀라 새벽 4시 30분에
우방국의 공관원들마저 팽개치고 철수를 끝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것이 이씨의 분석이었다.
그럼 베트콩은 과연 언제 사이공에 진입한 것일까?
현지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베트콩의 사이공 진입시간을 4월 30일 정오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철수가 중단된 뒤로부터 베트콩이 들어오기까지 약 8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이대용 공사를 지휘자로 삼은 한국인 잔류자들은 일본 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등을 전전하며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을 여유가 있었고, 그 와중에 한 사람도 사상자를 내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월남 패망일의 사이공에서 바라본 시각으로는「미국은 병든 나라이며, 덩치 값을 못하고 서두르다 월남전 사상 최대의 수치스런
대미를 장식했다」는 것이 이씨의 평가였다.
모든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관씨도「당시 미국 CIA의 판단과 행동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외무부 아주국 심의관으로 본분에서 월남 철수를 초조하게 지켜봤던 공로명 외교안보연구원장은 한국 대사관의 입장에서
「완전 철수」에 실패했던 원인을 이렇게 꼽는다.
첫째 교포들이 적지에 붙들리는 것과 공관원이 붙들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따라서 공관원들은 교포들 철수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수부터 먼저 생각했어야 옳았다.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김영관 대사에게「혼자 먼저 떠났다」고 비난한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대사는 대사로서 행동을 해야 하고 김대사는 당연히 그 지침에 따랐을 뿐이다.
둘째, 마지막까지 남아 공관의 짐이 되었던 2백∼3백 명의 우리 교민들에 대해 원망스러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패망하는 나라에서 일확천금을 꿈꿀 것이 아니라 LST편으로 전원 철수해야만 했다. 그들이 철수했더라면 우리 공관원들이 그토록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공로명씨의 말에 따르면 한국 공관원의 완전철수 실패는 그 원인이 일차적으로 교민들의 이기심 때문이고,
두 번째는 역설적으로 우리 공관원들의 동포애 때문이었다는 풀이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도 한번 살펴본 것처럼 좀처럼 정답을 구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공관원이 그 신분상의 문제 때문에 민간인들보다 일찍 철수해야 하느냐? 최후까지 남아 동포들을 다 내보내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입장에 따라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까닭이다.
끝까지 남았다가 적의 수중에 잡히면 국가의 큰 부담이 되고, 일찍 떠나버리면「도의적인 견지에서」비난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공로명 원장은 그러나「공관원은 먼저 철수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국가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속죄하며 살고 있다.
1975년 4월 30일,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동조 외무장관으로부터 김영관 대사가 무사히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박정희 「김대사 들어오거든 즉시 다른 곳에 대사로 내 보내시오」
김동조 「현재로서는 자리가 나지 않습니다」
박정희 「거 왜 있잖아. 한병기(칠레 대사) 불러들이고 그쪽으로 보내면 되지않소」
대통령의 김대사에 대한 신뢰는 아주 컸다. 사위를 불러들이고 그 자리에 내보낼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이 소식은 외무부 총무과장을 통하여 김대사의 부인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날아온 한 통의 눈물겨운 전보를 받는다.
9명의 공관원, 1백 40명의 교민들과 함께 적지에 떨어진 이대용 공사가 보낸 비장한 내용의 전보였다.
이 전보를 받은 날로부터 박대통령은 한시도 이공사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신 철수하여 돌아온 김대사에게는 상대적으로 곱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고 그의 귀국인사조차 받으려 하지 않았다.
김대사는 공관원 다수를 적지에 남겨놓은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사직을 사임, 야인이 되고 만다.
그런 후 지금까지 그는「월남 최후의 날」에 대해 줄곧 입을 다물어 왔다.
김영관씨는 당시「완전철수」에 실패한 총체적 책임은 대사였던 자신에게 있으며「지금도 고생했던 공관원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속죄하며 산다」고 했다.
한편 사이공 탈출 헬기를 타지 못하고 적지에 남은 한국 교민 1백 40병은 나중에 1백 65명으로 증가,
공관원 이대용 공사, 김창근 서기관, 이규수 참사관, 안희완 영사, 신상범 서기관, 서병호 영사, 김경준 영사, 김교양 통신사,
양종렬 통신사 등 9명의 공관원들이 공산화된 사이공(호치민시로 개칭)에 남아 겪은 참담한 억류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장으로
기록되어야 할 부분이다.
간단히 그 귀추를 정리해 보면 이들은 미 대사관을 떠난 직후부터 이공사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일본 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등에 보호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이후 환 딘풍가 53번지의 프랑스인 소유 건물에 머물면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지내다가 국제적십자사 등의 노력에 의하여 최고 1년여만에 모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1년뒤에는 귀국했으나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대용 공사,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 세 사람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대사관 내에서 정보업무를 다루는 특수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월남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5년 가까이 공산국가의 감옥에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상우 목사(LA 거주)의 증언)
-「1975년 10월 1일, 우리나라의 국군의 날 저녁이었다.
이공사가 나에게「꿈이 이상하다. 목사님, 혹시, 상황이 잘못되어 내가 못 나가게 되거든 대통령에게 김대사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내 잘못으로 철수를 못하게 되었으니 죄송하다고 말해 주시오. 나는 죽어도 조국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그런 말을 했다.
내가 「이제 유언입니까?」하자 그는「유언」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다음 다음날인 10월 3일 이공사는 구속됐다」-
부담을 안게된 한국 정부
이공사와 다른 두 요원의 구속은 한국 정부와 박대통령에게 엄청난 외교적 과제를 안겨줬다.
이들이 평양으로 끌려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찌할 것인가?
이공사는 1급비밀 취급자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2급비밀 취급자였다.
우선 정부는 우리의 우방국 중에서 공산 베트남과 외교관계가 있는 나라, 주로 프랑스의 외교루트를 통해 옥중의 이공사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옥중에 있는 사람의 불안 중 가장 두려운 것은「미래를 알 수 없다」는 심리상태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따라서 본국정부가 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공사에게 알리는 것은「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므로 아주 중요하다.
마침내 선이 닿았고, 이공사는 본국에서 보내 온 편지와 의약품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본국으로 보내오기도 하였다.
그동안 이공사는 적지의 감옥에서「조국을 배반하는」말하자면「자백」같은 것을 일체 하지 않고 외교관의 신분임을 내세워 꼿꼿하게
견뎠다. 이렇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특수신분의 외교관들 중에서도 아주 보기 드문 예인데, 이공사는 인간으로서 하기 힘든 일을 해낸
것이다.
북한에서 두 번이나 심문관이 와서 이공사를 심문했다. 그러나 저들이 평양으로 데려가서 심문하겠다는 제의는 공산베트남 정권이
단호히 거절했다. 베트남 정권은 자주성이 강했고, 자존심이 깊었다. 이 점은 이공사 일행을 위해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1978년이 되자 공산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끈질긴 석방교섭에 대하여「북한이 동의하면 석방하겠다」고 가능성을 엿보였다.
즉시 한·월·북한의 3자회담이 극비리에 뉴델리에서 열렸다.
근 1년이나 끌어온 이 회담은 성과가 없었다. 북한이 내세운 조건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회담에 관여한 외무부 인사는「북의 요구는 당연히 남파간첩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합당했으면 박대통령은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1대 1의 교환이 아니라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결국 북한은 비현실적 수확을 꿈꾸다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3자회담에 참석한 공산베트남의 대표조차도 북한의 황당무계한 요구에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측 입장에 내심 동조했을 정도였다.
결국 박대통령의「무슨 일이 있어도 이공사를 구출하라」는 엄명에 따라 아이젠버그를 중간에 넣어 비로소 구출작전을 성사시키게 된다.
도중에 박대통령은 서거했으나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이「사업」을 인수하여 계속 추진하였다.
월남에 대한 애정
형식적으로는 스웨덴 외무차관 레이프랜드와 외무부 비서실장 넬슨이 이공사를 인수해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아이젠버그의 하노이 지사장이 구출작전의 실무를 맡아 수행했고, 베트남을 떠날 때도 아이젠버그의 개인 비행기를 이용했다.
아이젠버그는 한국 정부와 벌이는「사업」이 많았던 때였으므로 이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 것이었다.
「월남 최후의 날」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면서 김창근 서기관의 대탈출극을 빼놓을 수 없다.
김서기관은 철수에 실패하고 뒤떨어진 지 사흘 만인 5월 2일, 사이공을 탈출하여 붕 타우까지 죽음의 여행을 한 후,
붕 타우에서 해상 탈출에 성공한 장렬한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나머지 한국 공관원들과 교민들 전부는 이 탈출극의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아무도 따라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영웅」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베트남 엑소더스」의 주인공들 대부분에게 공통된 점이 하나 있었다.
그토록 사선을 넘는 고생을 했으면서도 월남과 월남 사람들, 심지어 오늘날의 공산화된 월남 정부에 대해서조차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따뜻하게 흐르는 그 어떤 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에 대해 주월 대사관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창헌 외교안보연구원은「월남 사람들의 섬세함과 한국인의 진취적 성격이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월남 사람들은 아주 자존심이 강하고 합리적 사고를 지닌 신사들이다. 그러나 왠지 한국사람들에게는 순하고 친밀하다.
한국사람들도 월남사람들에게는 금방 친척을 만난 것 같은 포근함과 신뢰감을 느끼게 된다. 두 나라의 관계는 한번 맺어지기만 하면
급속하게 발전될 것이다」
★
베트남전 홈페이지(www.vietvet.co.kr) 출처의 글을 옮겨다가 읽기 편하게 정서를 하면서 다소 손 봤습니다.
나중에 좋은 자료사진을 찾게되면 전체적으로 다시 편집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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