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4. 13:52ㆍ발칸반도/터키
「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 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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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타사이 홈구장이 보입니다.
술탄들의 거주지, 톱카프 궁전
「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7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게 되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후 4세기 동안 꾸준히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이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투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원래 오투만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으로 한때 이 곳에는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터어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의 방도 보존되어 있어 그 흥미를 더한다. 」
보석궁입니다. 내부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톱카프 궁전 위에서 바라본 골든혼.
세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정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포인트랍니다.
바로 밑에 성벽이 있는데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보입니다만, 오스만 터키가 단 하룻만에 점령했다는군요.
한산대첩 못지 않은, 전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전투였답니다.
「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 혼, 마르마라海에 의하여 베욜루, 파티프, 위스키다르의, 3지구로 나뉘어지는데,
갈라타橋와 아타튀르크橋로 연결되어 있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 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 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 외국은행이 많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크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방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 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驛이 있다.」
톱카프 궁전 밖에 늘어선 노점상입니다.
지하 저수저(Yerebatan Sarayi)
「 이스탄불은 많은 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충분한 물의 공급이 필요했던 도시였다.
따라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지하 저수저를 많이 건축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저수저가 성 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위치한 지하궁전(Yerebatan Sarayi)이다.
물은 이스탄불로 부터 20km 떨어진 곳으로 부터 수로를 통해서 공급했고 기둥과 천장 장식이 화려하게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를 지하 궁전(saray : palace) 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336개의 기둥중 거의 모두가 비잔틴 코린트식의 기둥 머리를 가지고 있다. 저수저 전체의 크기는 70m 폭에 길이는 140m 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이스탄불 시는 이 저수지를 개축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기둥들 사이에는 나무를 재료로 도보길을 만들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써서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만들었다.
석고위의 수심 측정기의 눈금이 기둥머리에 까지 다다른 것을 보면 당시 이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가득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건물의 양 구석의 기둥의 받침은 메두사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이를 제조한 사람들이 이단을 믿지않는 기독교인임을 알 수 있다.
물 속의 잉어 조각은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인데 이는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어떤 이들은 비잔틴 인들이 실제 이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길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
지하궁전에서 나오면 시내 중심도로가 나옵니다. 멀리 블루모스크도 보입니다.
이 근처에 모든 관광지가 몰려있는 셈입니다.
이제 바자르 시장으로 갑니다. 걸어서 5분 거리입니다.
그랜드 바쟈르(GRAND BAZAR)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엄청 복잡합니다. 주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시장이고요, 현지 주민들 시장은 따로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보면 3중 4중으로 골목이 나있어서 잘못하면 입구를 못 찾아나오게 생겼답니다.
대부분은 가격표를 붙였습니다. 원래는 정찰제로 팔았는데, 우리 한국관광객이 몰려가면서부터 깎기와 바가지가 생겼답니다.
제가 모자 하나를 살려고 보니 가게에 따라 그 가격이 세 배씩이나 차이가 나더군요.
호객행위를 하는데 한국말도 좀 하더군요. 일본말은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합니다.
"반에 반값!"이라는 말을 저기서 처음 들어봤습니다.
모자 사던 얘기 좀 더 하지요.
좌판에서 젊은 친구가 장사를 하는데 제가 파는 모자를 샘플로 썼더라구요.
그게 멋있어보여서 3개를 샀는데, 가만 돌아서서 보니까 상태가 션찮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네가 쓰고 있는 걸로 바꿔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안된다면서 벗어주지를 않더라구요.
그런데 마침 주위에 친구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둘러서 있었는데 나보고 <코리>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했더니 갸들이 갑자기 단체로 "대한민국~짜작짝 짝짝"을 하면서
강제로 뺏어서 저에게 넘겨주더라구요.
나도 박수 한번 쳐주고 웃으면서 받아왔습니다.
그 모자는 쓸만합니다.
블루 모스크 (술탄아흐멧 모스크) / SULTAN AHMET MOSQUE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술탄 아흐멧이 이스탄불을 로마로 부터 빼앗아 점령하고 보니 <성소피아 성당>이 그렇게 아름다운데 놀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우리도 이슬람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겠다며 지은 게 이 블루모스크랍니다.
지대를 소피아 성당에 맞추기 위해서 2~3미터 정도를 성토하고 지었다는데 그러자니 얼마나 큰 공사였겠습니까?
소피아가 다보탑이라면 블루모스크는 석가탑 분위기랄까? 장중하고 엄숙합니다.
물론 규모는 소피아 성당 보다 큽니다.
야경도 끝내줍니다.
이스탄불의 상징, 성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박물관은 마치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성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성 소피아 성당이라는 가장 최초의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듯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 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 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에는 회칠로 덮여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성 소피아 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 75m X 70m 로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이슬람 세력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보니 기독교의 상징물을 그대로 두었을리가 없지요.
모든 기독교의 흔적을 지웠답니다.
그런데 이 소피아 사원만큼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네가 봐도 너무도 아름다운 건축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고 해서, 내부를 전부 회덧칠을 해서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답니다.
원래는 저렇게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로 되어 있었던 겁니다. 화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외벽도 이중으로 둘러쳐서 지금은 어두컴컴합니다.
유럽에서는 빨리 벗겨내라고 이만저만 성화가 아닙니다만
터키는 느긋하게 일년에 손바닥만큼씩 벗겨내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느 세월에 다 복원될런지 알 수 없습니다.
저 친구가 둘러메고 있는 것이 그 유명한 물담배입니다.
시장에서도 파는데 종류나 가격대가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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