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5. 08:15ㆍ책 · 펌글 · 자료/역사
머리말
북유럽 여행기를 마치면서도 표토르 대제와 에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부분이 미진해서 늘 찝찝했는데,
오늘 자식놈이 빌려온 책을 반납해주러 도서관 들른 길에 『불멸의 여인들』이란 책을 대여해 왔습니다.
해당 부분이 80쪽 정도 되더군요. 대충 옮겨보겠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해보면 어디고 간에 여자와 연관이 있는 유적이래야 유명한 관광지가 되더군요.
좀 웃깁니다만 사실입니다. 유럽이고, 중국이고, 인도고, 터키고, 제가 간 곳 모두가 그랬습니다.
표토르 대제에 대한 부분은 바로 앞 장에 포스팅한 스크랩으로 대신하고,
3명의 걸출하고도 극적인 삶을 살았던 여제(女帝) 위주로 소개합니다.
다만 표토르 대제의 사진 몇 장을 먼저 소개하고 가겠습니다.
표토르
(1)
(2)
사진(1) 오른쪽 윗줄에 <아조프 요새>라고 보이지요?
표토르는 물론 러시아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요새입니다.
표토르는 1695년에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에 차르가 아닌 포병 장교의 신분으로 종군했는데,
러시아가 흑해로 진출하고자 하는 돈 강 하구의 튀르크 요새가 바로 <아조프 요새>였습니다.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튀르크는 전함으로 후방지원이 가능했던 반면, 러시아는 해군이 없었습니다.
표트르는 이 전투에서 해군과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바로 해군을 창설해서 결국 <아조프 요새>의 함락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아조프灣>을 흑해 진출의 모항으로 건설하지요. 근대사의 화약고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사진 (2)는 <나르바 전투> 장면입니다.
당시에 표트르도 26살로 젊었지만, 스웨덴王 Karl12세 또한 18세 나이로 어렸습니다. 한마디로 만만했겠지요.
표트르가 4만 병력을 몰고 쳐들어갔습니다.
이때도 역시 발트해로 진출할 항구가 필요했던 겁니다.
스웨덴의 1만 병력에게 참패를 당했습니다.
Karl12세가 어려도 전략에는 귀재였거든요. 아주 호전적인 놈이구요. 나중에 이놈 저놈하고도 쌈 무지하게 많이 붙습니다.
거기에 스웨덴 군대는 당시에 유럽의 최강이었거든요.
이때 Karl12세가 끝까지 표트르를 쫒아갔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고 말합니다.
엄하게 폴란드로 방향을 꺾는 바람에 표트르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페테르부르그 공사현장에서의 표토르 대제
새로운 도시 페테르부르그를 건설할 때 진두지휘하는 표토르 모습을 보면 그의 진면목이 다 나옵니다.
스웨덴 포로와 러시아 각지에서 차출한 농노들이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는데,
과로, 질병, 추위로 수천명이 죽어나갈 정도의 대역사(大役事)였습니다.
페테르부르그는 북위 65도 거든요. 년중의 반이 겨울입니다.
한마디로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를 생각하면 됩니다.
표토르와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당시에는 내연의 관계)도 공사장 노역자들과 숙식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했을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표토르의 지지층은 내내 평민이었지요.
표토르가 마지막에 어떻게 죽은지 아십니까?
마지막 사인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병사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그 여파로 죽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요. 러시아 백성들이 그걸 현장에서 보고 듣고 했을테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吳子가 일부러 병사들의 상처를 입으로 빨아주는 시늉을 하면서 사기친 것과는 경우가 전혀 다릅니다.
표토르에게는 그런 강인함과 잔혹함이 있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바탕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얘기를 다 안한 것 같은데,
페테르부르그는 모두가 돌입니다. 제방도 물론 돌이고, 길도, 집도, 모두가 돌입니다.
강제적이었습니다. 돌이 아닌 것으론 만들지도, 지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밝은색 돌이어야만 했습니다. 화사하지요.
러시아 전역에서 석재를 끌어모았는데, 그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일체 석재로 집을 짓지 못하게 했답니다.
스웨덴 성벽의 돌까지 운반해왔다지 않습니까?
페테르부르그를 유럽에서 제일 가는 명품 도시로 만들겠다는 표트르의 집요함이 대단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뜻대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페테르부르그 입니다.
오죽하면 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페테르부르그 어느 구석에도 폭격을 못했습니다.
페테르부르그는 꼭 한번 가보시길 권합니다.
지금도 막 구워낸, 바닐라 향이 나는, 반듯반듯하게 자른 케익 같은 도시가 페테르부르그입니다.
중년의 표토르
내연의 관계였던 예카테리나와의 사이에 '안나'와 '엘리자베타' 두 딸이 네살 세살 되던 해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난번 여행기에서 소개해 드렸던 그 이삭성당에서였습니다.
예카테리나가 백성들 앞에 공식적으로 명함을 내미는 것이지요.
에카테리나 1세
안나 이바노브나
.
.
아래부터는 퍼온 글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더는 못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사진은 제가 찍은 것입니다.
출처는http://cafe.daum.net/painterworld/DXo3/5 입니다.
옐리자베타
* 표트르1세와 두번째 황후 예카테리나1세의 둘째딸.
Full name : Yelizaveta Petrovna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Елизаве́та Елисаве́тПетро́вна)
*생존 : 1709년 12월 29일 ~ 1762년 1월 5일 / *재위 : 1741~1762
영문식으로 하면 엘리자베스 여제
프랑스 가정교사를 둔 덕에 어릴 때부터 프랑스어에 유창했고,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독일어 회화도 가능했을 정도로
뛰어난 재원에다가 미모까지 당시에 찬사받을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다른 위대한 군주가 그렇듯, 그녀도 차르가 되기까지 오랜세월 기다려야 했다.
아버지 표트르1세 사후,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1세가 즉위했고, 그 후 배다른 오빠 표트르2세가 즉위한다.
후에 차르의 자리는 표트르1세의 사촌인 애나가 차지한다.
애나 여제는 독재자로서 친족중에 8주된 아이 (이반 6세)를 입양해 후임으로 삼는다.
갓난아이인채로 차르가 된 이반 6세의 생모' 애나 레오폴도브나'의 섭정아래 엘리자베트 여제는 궁정혁명을 일으켜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반6세는 갓난아이때 폐위되어 평생 감옥에서 살다 죽었다...비운의 황제임]
엘리자베트 여제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러시아를 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제를 인정하여 지방의 귀족들에게 통치권을 주었고,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승계전쟁과 7년 전쟁에 참가했다.
여제는 러시아의 몽골풍 잔재를 일소하고, 문화를 유럽식으로 바꾸길 원했으며, 특히 프랑스 왕실을 모방하려 했다.
유럽식의 호화판 파티를 일삼고, 평생 많은 애인을 두어서 후에는 음란한 여제라는 부정적 평도 받았지만,
러시아를 근대화시킨 발전을 한 공은 크다고 한다.
뒤 이어 '차르'가 된 표트르 3세는 그녀의 조카였는데, 표트르 3세가 원체 탐욕만 있지, 무능한 데가 있었고,
외교방침에 있어서 여제와는 서로 대립되어서 조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제는 프로이센과 전쟁 도중 프로이센을 벼랑끝까지 몰아간 시점에서 갑작스레 승하한다.
여제의 조카인 표트르 3세가 다음 차르가 되는데, 그는 프로이센을 매우 좋아하였던지라,
전쟁을 중단시키고 프로이센에게 유리한 조약을 해버린다. 프로이센 국왕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 프로이센에서 승전하고 개선한 군인들과 러시아 국민은 표트르 3세에게 불만을 가졌다.
그런 배경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가 군대의 신임을 얻어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
엘리자베트 여제는 뛰어난 건축가인 라스트렐리(B.Rastrelli)에게 겨울 궁전, 여름 궁전를 짓게 하고,
노후에 쉴 수 있도록 스몰니 수도원 (러시아 최초 여성교육기관) 등을 짓도록 했다.
로코코 양식의 겨울궁전은 1762년 건축되었고, 총 1056개의 방과 117개의 계단, 2000여개가 넘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건물 지붕 위에는 170개가 넘는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의 문화를 발전시킨 여제들은 고급 미술품 수집에도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유럽에서 수백점의 미술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현재는 그 미술품 덕에 국립 에르미타쥐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 유치를 하니, 후손에게 돈까지 벌어주는 대단한 여제들이다.
엘리자베트 여제가 세웠지만, 완공된 뒤 이 궁전을 차지한 것은 예카테리나2세.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는 엘리자베트 여제가 유럽식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열심히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옐리자베타 애인 라주모프스키
알렉세이 라즈모프스키 Alexei_razumovsky (1709-1777)
본래 우크라이나의 양치기 소년으로, 목소리가 좋아 성가대에 들었으며,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평생 정치 욕심은 없었으며, 말년에는 고향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Hetman으로 근무했다.
(Hetman이 정확히 어떤 지위인지 모르겠다...; 카자흐 토착 우두머리 정도 되는 듯 하다.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Hetman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라즈모프스키가 있었다고 함)
그는 여제에게 하사받은 궁에서 살았고, 그 곳에서 비공식적으로 여제와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여제는 미혼이지만, 라즈모프스키는 여제의 배우자로서 알려져 있다.
그에겐 두 딸이 있었는데, 엘리자베트 여제의 딸로 추정되고 있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예카테리나 2세
* Full name: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그녀는 러시아에 온 후,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러시아 식으로 개명한다.
* 개명 :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 생존 :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 / *재위 : 1762년 - 1796년 영문식으로 카트린 2세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생이다.
아버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일 제후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 체르브스트였으나
어머니는 홀슈타인 공작 가문과 친척이다.
14세 되던 해 표트르 대제의 손자이자 표트르 대공으로 러시아 왕위계승권자인 홀슈타인 고토르프 공작
카를 울리히의 아내로 간택되었다.
1744년 러시아에 도착한 그녀는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대공비>라는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나이 어린 사촌인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완전히 실패였으며,
그후 18년간은 그녀에게 기만과 수치로 점철된 시기였다.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대공비 시절
1761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트 여제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조카 표트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
표트르는 늘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예를 들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늦게까지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다.
표트르는 프로이센 황제인 프리드리히 대왕과 조약을 맺었다.
조약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
표트르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좋아했으며, 특히 대오를 갖추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행진하는 그의 군대를 좋아했다.
그는 숙모인 엘리자베트 여제가 죽었는데도 예를 갖추기는 커녕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전쟁놀이와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조신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 후에도 몇달 동안 상복 차림으로 옐리자베트 여제의 무덤을 찾아가 기도하며 울부짖었다.
그녀는 러시아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1745년에 표트르와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온 독일 공주였다.
하지만 그녀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으며 놀라운 속도로 러시아어를 습득했다.
예카테리나는 친위대 장교로 근무하던 '그레고리 오를로프'와 연인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신앙, 애국심, 통치자로서의 자격 등에 관한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은 오를로프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녀에게 군대가 뒤에 있으니 마음놓고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종용했다.
쿠테타 성공
표트르의 통치행위는 가혹했다.
체포와 처형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도 난폭하게 굴었으며, 이혼하고 후궁과 결혼하겠다고 위협했다.
어느날 술에 만취한 표트르가 아무리 괴롭혀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예카테리나에게 화가 나서 그녀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오를로프는 예카테리나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처형될 거라고 경고했다.
예카테리나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반쯤 풀어헤친 채 오를로프를 따라 군대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녀를 본 군인들은 땅에 엎드린 채 그녀의 옷자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 눈에 비친 그녀는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 같았다.
그들은 그녀에게 군복을 입혔다. 남자 군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워 보는 사람마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군인들은 오를로프의 지휘에 따라 겨울 궁전을 향해 출발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행렬은 더욱 불어났다.
다들 예카테리나에게 박수를 보냈으며 표트르는 폐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곧 사제들이 예카테리나에게 축복을 주려고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예카테리나는 마치 모든 일이 운명인 것처럼 침묵을 지키며 위엄을 잃지 않았다.
곧이어 표트르에게 반란 소식이 날아들었다.
반쯤 혼이 나간 그는 그날 밤 왕위를 양도하는 데 동의했다.
예카테리나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러시아의 여왕이 되었다.
출처 http://cafe.daum.net/painterworld/DXo3/5
표트르3세 에카테리나 애인 오를로프 포템킨
에카테리나 2세 (대제)
말년의 에카테리나 대제
'책 · 펌글 · 자료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진 몇 장 (ⅱ) (0) | 2009.09.08 |
---|---|
사진 몇 장. (0) | 2009.09.08 |
[스크랩] 표트르 1세 (0) | 2009.09.04 |
냉전의 추억 (0) | 2009.08.28 |
스페인 내전 (0) | 2009.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