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표트르 1세

2009. 9. 4. 12:29책 · 펌글 · 자료/역사

표트르 1세

 

 


 

“러시아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두사람의 이름을 들 것이다. ‘대제’라는 칭호가 곧잘 붙는 표트르 1세, 소비에트 연방을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 그것을 상징이라도 하듯 근대 러시아는 오랫동안 표트르의 이름이 붙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았고, 러시아혁명 뒤 그 도시는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붉은 깃발이 쓰러지고 나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을 찾았으니, 결국에는 표트르 1세가 이긴 것일까.

 

 

“병사들이여.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때가 왔다!” 1709년 6월 27일, 어스름한 새벽. 우크라이나의 폴타바에 5만의 러시아군이 모였다. 말 위에 올라 칼을 빼들고, 병사들의 앞에서 외치는 사람은 이제 38세가 된 표트르 황제였다. 그의 말처럼 러시아는 이제 물러설 데가 없었다. 눈앞의 적은 칼 12세 가 이끄는 스웨덴군과 표트르에게 반기를 든 우크라이나 토착민들. 지금 생각으로는 어떻게 스웨덴이 감히 러시아에게?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스웨덴, 폴란드, 투르크 등에게 돌아가며 침략당하는 약자였다. 적군은 3만으로 이쪽보다 열세였지만, 군사적 천재라는 칼 12세는 1700년에 나르바 에서 8천의 군대로 4만의 러시아군을 짓밟아 버린 적이 있었다.

 

표트르는 그때부터 스웨덴을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교회의 종을 몰수해 대포로 만들었고, 귀족이든 농민이든 가리지 않고 병력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렇게 칼을 갈아온 지 약 9년, 이 전투에서 이긴다면 러시아는 새로운 강자로 일어설 것이다. 그러나 패배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 표트르를 위해 싸울 필요는 없다. 표트르가 맡고 있는 러시아를 위해 싸워 다오. 이 나라, 이 민족의 내일이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다.”

 

우렁차게 외치는 표트르의 장검이 번쩍 빛났다. 그 장검은 단지 지휘를 위해 뽑아 든 것이 아니었다. 곧 벌어질 처절한 싸움의 제 일선에서, 적군을 베고 또 베어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 것이었다. 모두들 그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 일반 병사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며 싸워 왔으니까. 전쟁 때만이 아니었다. 표트르는 큰 불이 나면 소방대보다 먼저 달려가서 불길을 헤치고 사람들을 구해내곤 했다. 황제의 검은 처형장에서도 휘둘러졌다.


 

1698년, 그는 반역한 근위대 2천 명을 참수하며 그 중 2백 명의 목을 손수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2미터가 넘는 키, 날밤을 새우며 술을 마셔도 끄떡없는 체력, 성질이 나면 귀족이건 대주교건 그 자리에서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해대는 괄괄한 성미. 표트르는 러시아만이 가질 수 있는 황제였고,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모든 일에 직접, 전심전력으로 임하는 사람이었다. “···표트르의 목숨은 잊어버려라.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러시아를 위하여, 그대들과 그대 가족들의 행복을 위하여, 싸우자!”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고, 얼마 후 5만의 러시아군은 쳐들어오는 적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물론 선두에는 표트르가 무시무시한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을 따르는 군인들은 오직 공포 때문에 복종하기도 했고, 위대한 조국을 위하여라는 이상에 불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모두가 같았다. 지금 자신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인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있다는 확신만은.

 

 


표트르 1세는 1672년 5월 30일, 로마노프왕조를 세운 미하일의 손자이자 2대 황제 알렉세이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세이에게는 표트르 말고도 자녀가 수두룩했고, 표트르가 겨우 세 살일 때 알렉세이가 죽자 왕위는 가장 연장자였던 이복형 표도르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병약한 표도르는 6년 만에 죽었고, 차기 황제는 일단 표트르로 결정됐으나 이를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피비린내 나는 난리는 결국 소피아의 동생인 이반과 표트르가 공동황제가 되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낙착됐다. 이제 10대 청소년이 된 표트르는 공식적인 공부는 게을리 하면서, 이런 저런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전쟁놀이와 궁정놀이 등을 하며 보냈다.

 

‘표트르와 그의 악동들’은 엄숙한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를 흉내 내며 수도승 차림으로 음주가무를 즐기고, 예수 대신 술의 신 박쿠스를 섬기고, 여염집을 약탈하며 성직자를 두들겨 패는 등 온갖 비행과 신성모독을 자행했다. 그래서 “어떻게 명색이 황제라는 인간이 저럴 수가···”하는 손가락질을 받는 한편, 정적들에게서는 경멸과 함께 방심을 자아냈다. 사실 이런 ‘미친 짓들’은 자신을 늘 거북하게 여기던 소피아 공주의 그런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뜻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틀에 박힌 전통적 공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맛보고, 산과 들에서, 천한 무리들의 생활 속에서 더 큰 배움을 얻는 과정이기도 했다.

  

파격적이며 관습에 구애되지 않던 표트르는 러시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를 꿈꾸었고, 마침내 서유럽 유학에 나서서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다녔다. 그는 러시아 황제의 신분을 감추고 공장과 박물관, 병원, 대학과 천문대 등을 열심히 견학하고 다녔으며,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직접 손에 망치를 들고 배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영국에 갔을 때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해군을 배우는데 온 힘을 쏟았고, 영국 해군의 명예 제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표트르는 낙후된 러시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 있던 서유럽을 돌아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영혼에 깊이 새겼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러시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서구식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만 한다.”


 

표트르의 유학은 1698년, 소피아가 본국에서 쿠데타를 시도함으로써 갑작스레 중단되었다. 그녀는 이미 장성한 표트르 쪽으로 군부가 돌아서고 동생인 공동 황제 이반이 병사함으로써 권좌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래도 최후의 힘을 짜내 근위대를 움직여 반란을 일으켰건만, 표트르가 서둘러 귀국했을 때는 이미 황제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의 손으로 반란이 진압된 뒤였다. 소피아는 수도원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며, 나머지 역도들은 황제가 손수 목을 쳤다. 그리고 러시아를 전혀 다른 나라로 탈바꿈시키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17세기의 러시아는 ‘은둔의 왕국’이었다. 서구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을 뿐 아니라 뒤졌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국교인 러시아정교는 가톨릭 또는 개신교인 서유럽의 문화적 영향을 못마땅해했고, 아직도 중세적 특권을 누리고 살던 귀족들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쩌다 외국인이 다녀가면 그가 접촉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심문을 당하고, 그가 손댄 것은 부정을 탔다고 불태워 버리는 등, 19세기 말 조선의 쇄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꽉꽉 막혀 있던 사회가 당시의 러시아 사회였다.

 

표트르는 이런 뿌리 깊은 사회관습에 그야말로 ‘가위를 들이대고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그는 귀족들을 만찬에 초대해 다가가서는 긴 수염을 붙잡고 가차없이 가위질을 해댔다. 땅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해도 아랑곳없었다. 그래도 굳이 수염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물렸으며, 1년이 지나자 그 세액은 새로운 함대를 건설할 만한 돈이 되었다. 또한 동양식의 풍성한 옷을 없애고 서양식 양복을 입게 했으며, 역법 역시 유럽이 쓰던 것과 같게 바꾸었다. 문자도 간소화하여 쓰기 편하게 바꾸었다. 서구문물을 거부하던 교육과는 정반대로, 귀족의 경우 외국어를 익히지 못하면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게 했다. 교회도 개혁하여 황제가 정점에 서는 위계적 조직으로 재편성했다. 이런 급진적 개혁이 저항을 가져오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표트르 만의 카리스마로, 그리고 잔인할 정도의 가혹하고 철저한 형벌 제도로 거침없이 러시아를 뜯어고쳐 갔다.

 

 

하지만 이런 모든 개혁은 가장 큰 시험대를 통과해야 했다. 바로 전쟁이었다. 표트르는 먼저 남쪽으로 투르크를 공격할 생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대안은 북쪽이었다.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해야만 개혁도 계속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고, 개혁의 목표인 ‘강대국 러시아’도 실현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걸고 폴타바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전투는 치열했다. 선두의 표트르는 총상을 입었으나 꿈쩍도 않으며 계속 싸우고, 격려하고, 지휘했다. 그러나 적장인 칼 12세는 불운했다. 그는 앞서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이 싸움의 지휘권을 두 장군에게 위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칼 12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스웨덴군은 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스웨덴군의 선공을 잘 막아낸 뒤 전선을 길게 펼쳐, 물러서던 스웨덴군을 포위해 버렸다. 이 때 부상당한 칼 12세가 타고 있던 마차에 포탄이 명중했으며, 왕이 죽었다는 소문(그렇지 않았지만)은 열세에 몰린 스웨덴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었다. 렌스쾰트 장군을 비롯한 수 천 명의 포로가 잡혔고, 그들은 한창 건설 중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게 된다. 칼 12세는 천여 명의 병사만 데리고 몰다비아로 달아났다.

 

 

북방전쟁은 그 뒤로도 10년을 넘게 끌었으나, 사실상 이 싸움으로 승패는 판가름이 났다. 승리한 결과 오래 전 잃어버린 발트  연안을 되찾은 러시아는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고, 표트르는 더욱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귀족회의인 두마는 그에게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바쳤다. 그에게 영광의 기념물은 무엇보다도 폴타바 전투의 6년 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표트르는 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완전히 유럽식으로 건설했고, 그곳은 발트 해를 한 손에 움켜쥔 군사적 요충지인 동시에 러시아의 ‘서쪽으로 열린 창’으로서 서구문물의 본격적인 유입지가 될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에 14관등제도를 마련하여 종전에는 신라의 골품제도처럼 태생의 차이에 따라 정해지던 관료제도를 실적에 따라 정해지는 근대적 관료제도로 개편했다. 또 러시아 최초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기존의 토지세와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도입했다. 이 밖에도 행정, 군사,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에서 전방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표트르의 개혁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근대화’ ‘서구화’는 반쪽 짜리였다. 유럽의 앞선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산업, 교육 제도는 열심히 모방했지만 정치적 자유와 사상적 자유는 외면했다. 그의 개혁으로 구시대에 머물러 있던 귀족제도가 합리적으로 재편성되고, 그 위에 황제의 절대권력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지도 않았고,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과 농노는 여전히 중세적인 속박에 묶여 있었다. 아니, 인두세 도입 등은 그들의 생활을 더욱 괴롭게만 했다. 그것은 표트르의 개혁 목적이 애당초 “러시아를 부강한 나라로 만든다”는 데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루아침에 오랜 전통문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서구문화 추종에 급급해하는 일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단지 보수파들의 시대착오적 항변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런 항변을 가장 뚜렷하게 제시했던 사람, 그가 공교롭게도 황태자 알렉세이였다. 아버지 표트르와 달리 유약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알렉세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닮으라며 시키는 교육 방식이 몸에 맞지 않았다. 장성해서는 아버지의 정책에 대한 의문까지 생겨났다. 마침내 계속 말을 듣지 않는다면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선언이 표트르에게서 나왔다. 그 후 황태자가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나돌았고, 알렉세이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얼마 후 그는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귀국했지만, 표트르는 그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재판소에 넘겨 버렸다. 재판소는 그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했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알렉세이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여러 의혹이 있었다. 아버지 표트르가 독을 썼다고도 하고,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서 아들을 매질하다가 그만 때려죽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아무튼 모두의 눈에 분명했던 것은 표트르가 아들의 장례식에서 보여준, 황제에게도 저런 것이 있었나 싶었던 것, 뜨거운 눈물이었다.

 

 

불편한 부자관계였지만, 한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아들의 비참한 죽음 앞에 인간인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1년 뒤, 유난히 사랑했던 또 다른 왕자가 세상을 떠나자 표트르의 몸과 마음은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표트르는 마음의 고통을 오로지 술로 풀었다. 지나친 음주로 요독증에 걸리고서도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자, 이 초인의 강인한 육체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그가 쓰러지자 개혁은 방향을 잃었고, 그 틈을 탄 귀족들이 슬금슬금 과거의 기득권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1724년 말에는 최후의 타격이 왔다. 그가 평생 사랑했고 의지했던 황후, 예카테리나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불거졌던 것이다. 그 대상자인 남자를 다른 죄목으로 엮어서 처형하고 두 달 뒤, 대제는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이룩한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빈사의 황제는 여기까지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1725년 1월 28일이었다. 표트르가 채 마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자랑스럽게 여긴다”였을까? 아니면 “···후회한다”일까?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감탄했고, 러시아 땅에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뚜렷하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그의 행동이 또한 러시아의 모순을 심기도 했고, 그 자신과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물론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한 시대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완벽히 올바로 판단할 수도 없다. 진정 잘못은 그를 계승한 사람들, 위대한 인물의 발걸음에 대안 없는 반대만 일삼거나, 더 좋게 고치려는 노력 없이 맹종하고 안주할 뿐이었던 사람들에게 있지 않을까.

 

 

워제임스 크라크라프트의 <표트르 대제>(이주엽 역, 살림)는 표트르 1세의 생애와 업적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위대한 점과 아쉬웠던 점을 객관적으로 잘 묘사했으며, 궁극적으로 “표트르 1세 시대는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혁명’ 시대였다”고 결론짓고 있다.


표트르 대제대국굴기-강대국의 조건, 러시아편

 

중국중앙방송에서 야심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대국굴기>는 역사상 패권을 이룩한 8개국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데, 이 중 <대국굴기-강대국의 조건, 러시아편>(김인지 역, 안그라픽스)에서 표트르 1세의 개혁이 비중 있게 소개된다. 표트르 1세의 개혁이 러시아가 강대국이 된 원인이었음을 제시하고, 그 명암을 다채롭게 조명한다.

 

 

 

 

 

 

레닌2009.01.22
표트르 1세와 함께 러시아를 만든 사람으로 손꼽히는 블라디미르 레닌
출처 : 행운의 보금자리
글쓴이 : 행운아 웃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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