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6. 15:14ㆍ발칸반도/북유럽 러시아
헬레쉴트 도착해서 오늘의 숙박지 라르달로 이동한다.
버스에서 내리 잠만 자는 거 아니다.
뵈이야 빙하도 보고 빙하 박물관도 본다.
어제 큰비가 왔냐구? 안 왔다.
노르웨이만이 아니라 북유럽은 일년이면 300일은 비가 온다는데,
우리나라처럼 좍좍 퍼붓는 비가 아니라 부슬부슬 오다말다...... 홍수나 산사태가 없는
그냥 농사짓기에 좋을 만큼만 온다.
저 물은, 빙하가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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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쉴트에서 두 시간 왔나?
캐나다 로키산맥의 벤프 같은 도시 스트린이다.
도시가 아주 활기차다.
관광 거점 도시다.
피요르드로 여행오는 사람들은 일단 여기서 짐을 푼다.
매년 여름스키대회가 열리는 곳이란다. 물론 빙하 위에서.
햇볕은 따갑지만 그렇다고 저런 물에서 물놀이 할 정도의 날씨는 아니다.
제대로 햇빛이 나는 날이 일년에 60일이라니까, 무조건 해 나면 벗는다. 애고 어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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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간다.
최종 목적지는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이다.
당연히 오늘에야 못 가지.
차량이 부쩍 많아졌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배타고 온 사람들이 스트린에서 합류해서,
다시 베르겐으로, 오슬로로,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 간다.
말하자면 이 도로가 1번 국도가 되는 셈이다.
저렇게 강물이 에메랄드 빛이 되는 것은 석회석 돌가루가 섞여서 그런게 아니라,
바닥이 돌바닥인데다가 꽃가루니 뭐니 온갖 물질들이 혼입되어 그 스펙트럼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그러니까 당연히 물고기가 산다.
내가 버스를 세워서 사진 찍고 싶었다는 데가 여기 같다.
노르웨이는 원래 터널이 많은 나라지만 이 지역은 유독히 더 많다.
터널을 나왔다 싶으면 또 터널이다. 수도 셀 수 없다.
이 터널 이름은 피얼란드 터널이다.
나중에 베르겐 가기 전에 더 긴 터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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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이야 빙하(氷河)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을 자랑하는 푸른빙하라 불리우는 요스테달 빙원(氷原)의 한 자락이다.
'요정의 길' 즈음에 있다는 브릭스달 빙하엘 가면 직접 만져볼 수가 있다더라.
솔직히 빙하 위를 설상차로 올라가서 직접 밟고다니던 캐나다 로키의 콜럼비아 빙하와는 껨이 안된다.
물론 위에 두 사진은 다른 방향의 사진이다만, 빙하가 녹아 없어지는 모습이랑 흡사하다.
10년 정도면 저렇게 변한다. 앞으론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시 왔을때는 틀림없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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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박물관이다.
진짜 맘모스 뿔이더라.
빙하를 이용한 수력발전의 원리다.
그동안 보아온 많은 물들은 빙하의 껍데기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나오는 물이다.
물론 위에서도 녹아서 밑으로 스며들겠지.
이러한 수력발전으로 전기사용량의 25%인가를 커버한다고 들은 것같다.
빙하 바닥 모형관
빙하 사진촬영한 과정을 입체영화로 보여주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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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박물관에서 바라본 풍경이 또한 절경이다.
당연히 세계자연유산이다.
사진이 여전히 삐뚤다.
내가 삐질이가 아니고 뭔가 착시현상이 있는 것 같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상하다, 왜 자꾸 삐둘어질까 하면서 여러장 찍어봤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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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배 탄다.
이번에 배 실컷 타봤다.
" 만헬러 - 포드네스, 유람선으로 이동"
유람선??? 완전 짐배다. 사람 앉을 자리도 없다.
오래 타는 건 아니다.
그냥 건너기만 하면 되니까. 20분 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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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숙박지 라르달에 도착했다.
바람이 몹시 불고 비까지 간간히 뿌리는게
아주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이 날 몇팀이 모여서 바베큐 파티를 하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나가리됐다.
예술은 유희가 아닌 ‘성숙한 인간’ 의 통로이다 -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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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시가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기득권을 모두 버린, 사르트르가 ‘금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표현했던 그가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이 시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한 혁명을 빼면, 시만이 그의 최후였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은 ‘가장 성숙한 인물’ 게바라가 사랑한 시 69편이 옮겨 적혀 있는 노트의 전말을 게바라 만년의 생애와 함께 정리해 놓은 책이다.
혁명가는 정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사랑했다고 이제 사람들은 기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했던 혁명의 정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대상들을 자유롭게 어루만지기 위해
필요한 삶의 조건들을 만들려는 매개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그 예술이 아름다움의 탐닉에 빠진 한 개인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한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서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즐거워하는 다른 존재들로부터
혹은 그 다른 존재들과 함께 생성되고 공유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한 개인의 이기적 탐닉을 충족시키는 예술일 뿐이라면 그것은 필요없는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날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고리키에게 말한다.
‘내가 알기로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이 곡은 경이로운 초인적인 음악이다.
인간이란 정말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레닌은 더 이상 베토벤을 듣지 않기로 결심한다.
러시아 혁명을 위해 개인적 내면의 황홀감에 빠질 겨를이 없다고 그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닌에 대비되는 음악 애호가들이 있다. 나치 가스실을 작동시키던 장교들.
그들은 독가스를 유태인들에게 분사하면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듣는다.
누가 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일까? 억압받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개인의 황홀을 위한 예술을 유보하는 사람과,
사람을 억압하면서 그 폭력성을 예술로 치장하는 사람.
예술은 때로 의미심장한 애매모호함으로 인간의 인간성을 드러내준다.
하나의 작품은 객관적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행동은 주관적이다.
그 주관성이야말로 근대적 인간의 모습이라고 근대철학자들은 누누이 설명해왔다.
그러니까, 주관성은 근대적 삶을 살아온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예술은 그 주관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그 주관성만큼이나 타자를 위해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주관성을 객관성으로 바꾸어놓는 매뉴얼과도 같다.
‘성숙한 인간’은 그 주관성의 매뉴얼을 타자와 함께 하는 객관성의 매뉴얼로 바꿀 줄 아는 인간이다.
시를 알고 있었던 ‘성숙한 인간’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 9일 살해되었다. 그 살해는 그러나 20세기의 예수라는 말과 함께 그를 되살리는 기억과 행동의 출발점이었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였으며, 쿠바혁명을 성공시켰고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장관, 외교관이었다.
그는 뛰어난 저술가이기도 했다.
그의 혁명활동은, 가진 자들이 흔히 사회운동가들을 가리켜 ‘열등감에 지친 사회적 증오 분자들’이라고
왜곡하는 그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체 게바라와 같은 능력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그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다면 아마 그는 그의 일생을 보다 더 안락한 환경 속에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대신 콩고 민중의 편에서 독재자들과 싸웠고 곧이어 볼리비아로 건너가서 제국주의 식민권력과 싸웠다.
그 선택 때문에 미국 CIA의 명령을 받은 볼리비아 군에 의해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그는 그 죽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체 게바라는 배낭 속에 지도와 일기 그리고 시가 적힌 녹색 노트를 남겼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시간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로 소박하기만 한 최후였을까?
그곳에는 채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그의 꿈과 그리고 그 꿈을 알맞게 형상화했던 시편들이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뻬. 네 명의 시인이 쓴 시.
그 제3세계 민중들의 노래가 체 게바라의 영혼을 사랑하게 한다.
권해주고 싶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일 포스티노’와 ‘책 읽어주는 남자’.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은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고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은 한나 나렌트의 책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에 등장하는 ‘아이히만’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상상력 탓일수도 있다.
‘일 포스티노’의 우체부가 파블로 네루다에게 시를 배워가는 과정,
그의 시가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채 읽히지 못한 채 흩어지는 영상은 게바라가 시를 노트에 옮겨 적고,
그의 최후의 순간에 배낭 속에서 숨쉬고 있던 시의 흔적들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은 어떤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여 유대인 학살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바라보는 그 인물은
2차대전 당시 현실 속의 실제 인물 아이히만이기도 하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소설을 읽어주는 청년에게 사랑을 느끼고 절망하며 죽어간다.
여기에 예술이 있다. 예술은 이를테면 존재의 기쁨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레닌이 열정소나타를 듣고 예술을 유보하는 행동을 할 때 거기에도 부끄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하는데,
세상에 이런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하는 것과 같은 부끄러움.
이 부끄러움은 쌍용자동차에서 노동자들이 70여 일 동안 생리작용마저도 인간답게 해결하지 못하도록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취급당할 때, 여유있게 음악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던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부끄러움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위해, 기뻐해야 할 사람을 위해 예술은 물론 아름다워야 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술은 부끄러움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저 가진 자들의 끔찍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유희에 빠진 내가 독가스를 분사하는 나치 장교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부인하지 못한다.
게바라는 시를 읽으며 필요 없는 폭력을 금하는 법을 배운다. 그는 부상당해 달아나는 정부군을 사살하려는 동료 게릴라에게 말한다. “쏘지마.”
세상 권력자들의 폭력을 향해 ‘하지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러므로 시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시를 아는 사람이 삶을 사랑하 사람이다.
-박수연, 문학평론가- |
저 탁자에 보이는 모자, 내가 평소에 꽤나 아끼는 모자인데,
핀란드로 가는 크루즈 배에다 놓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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