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이야기 한토막

2009. 3. 14. 18:15책 · 펌글 · 자료/문학

  

 

  

달래는 냉이와 한 짝을 이루면서도 냉이의 반대쪽에 있다.

똑같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태어났으나 냉이는 그 고난으로부터 평화의 덕성을 빨아들이고,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 끝을 만들어낸다.

달래는 기름진 땅에서는 살지 않는다.

달래의 구근은 커질 수가 없다.

달래는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던 힘을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

그 맛은 너무도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달래는 인간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달래와 냉이는 그렇고 된장국은 어떤가.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 여린 것들이 언 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쑥은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으로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더 많이 된장 쪽으로 끌려간다.

국물 속의 쑥 건더기는 다만  몇 오라기의 앙상한 섬유질만으로 남는다.

쑥이 국물에게 바친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이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성 속에 퍼져 있다.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다.

 

쑥된장국의 동물성 짝은 재첩이 될 것이다.

재첩은 콩알만한 크기의 민물 조개다.

섬진강 아랫마을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그 국물의 색깔은 봄날의 아침 안개와 같고, 그 맛은 동물성 먹이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 맛이다.

차마 안쓰러운 이 국물은 그 안쓰러움으로 사람의 마을을 데워준다.

쑥된장국이 재첩국과 다른 점은 동물성의 그 몽롱한 비린내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미나리는 전혀 종자와 근본이 다르다.

겨울 강가의 얼음 갈라진 틈으로, 이 새파란 것들은 솟아오른다.

미나리에는 출신지의 음영이 드리워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지나간 시간의 찌꺼기가 묻어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그늘이 없다.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미나리의 맛은,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의 맛이다. 

맛의 질감으로 분류한다면 미나리는 톳나물이나 두릅나물에 가깝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중에서 -

 

 

 

 

 

 

 

 

 

'책 · 펌글 · 자료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문학과 그 적들  (0) 2009.04.01
똥 이야기  (0) 2009.03.18
마당 이야기 #7  (0) 2009.03.09
마당 이야기 #6  (0) 2009.03.09
마당 이야기 #5  (0) 2009.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