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18. 22:56ㆍ책 · 펌글 · 자료/문학
1.
술을 억수로 마신 다음날 아침에 누는 똥은 불우하다.
똥이 항문을 가득히 밀고 내려가지 못하고,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온다.
똥이 똥다운 활력을 잃고 기신거리면서 툭툭 끊긴다.
이것은 똥도 아니다.
삶의 비애는 창자 속에 있었다.
이런 똥은 단말마적인 악취를 풍긴다.
똥의 그 풍요한 넉넉함이 없이, 이 덜 썩은 똥냄새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주인을 찌른다.
간밤의 그 미칠 듯한 슬픔과 미움과 무질서와 악다구니 속에서,
그래도 배가 고파서 집어먹은 두부김치며 낙지국수며 곱창구이가 똥의 원만한 조화에 도달하지 못한 채,
반쯤 삭아서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다.
이런 똥의 냄새는 통합성이 없다.
덜 삭은 온갖 재료들이 저마다 제각기 덜 삭은 비명을 질러댄다.
그래서 이런 똥의 냄새는 계통이 없는 아우성이다.
육신을 통과하면서 육신을 먹여주고 쓰다듬어주며 나온 똥이 아니라 육신과 싸우고 나온 똥이다.
삶은 영위되지 않고, 삶은 살아지지 않는다.
이 악취는 영위되지 않는 삶의 비애의 냄새인 것이다.
이것은 날똥이다.
날똥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난다.
이 눈물은 미칠 듯한 비애의 눈물이다. 날똥 새어나오는 아침의 화장실에서 나는 때때로 처자식 몰래 울었다.
날똥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이여 청춘이여 조국이여, 모든 것은 결국 날똥이 되어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가는 것인가.
쉰 살 넘어서 누는 날똥은 눈물보다 서럽다.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소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어와서 양명하다.
남자 칸과 여자 칸은, 서양 수세식 변소처럼 철벽으로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 안에서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다.
화장실의 남녀 칸을 철벽으로 막아놓은 것이 문명이 아니다.
화장실 남녀 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선암사 화장실에 정답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암사 화장실은 변소의 칸막이 담이 높지 않다.
쭈그리고 앉는 사람의 머리통이 밖에서 보인다.
똥을 누는 일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변소처럼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서 해야 할 일도 아닐 성싶다.
똥을 누는 것은, 배설물을 밖으로 내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다.
거기에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야 한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 자유의 낙원인 것이다.
이 화장실에 앉으면 창살 사이로 꽃핀 매화나무며 눈 덮인 겨울 숲이 보인다.
화장실 위치는 높아서 변소에 앉은 사람은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똥을 안 눌 때 똥누는 사람을 보는 일은 혐오스럽지만,
똥을 누면서 창살 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계면쩍고도 즐겁다.
이 즐거움 속에서 배설 행위는 겸손해진다.
햇빛은 창살을 통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빛은 굴절되어서, 화장실 안에는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고 늘 어둑어둑하면서도 그늘이 없다.
바람이 엉덩이 밑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엉덩이가 허공에 뜬 것처럼 상쾌하다.
똥을 누기가 미안할 정도로 행복한 공간이다.
- 김훈 『자전거 여행』중에서 -
2.
똥
시어머니는 후반기 생의 반을 금쪽같은 아들을 도둑질해간 도척같은 나를 미워하는 힘으로 살다 가셨다
그 때는 나도 그 노파를 미워하는 힘으로 사는 것 같았다
내 딴엔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변비나 설사를 부르고 우리는 종일 번갈아 가며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신경을 썼더니 똥이 안 나와”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도 그래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어머니 똥 좀 잘 나오게 해 드려!” 남편이 눈을 흘금거리며 말했다.
시어머니의 똥 문제는 나를 삼십 년간 들볶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의 똥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죄 없는 화장실 문짝이 너덜너덜 해 지고 우리는, 서로 지쳐 시나브로 말이 없어지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화장실도 못 가고 누운 채 밤새도록 똥을 쌌다. 치우면 또 싸고 치우면 또 싸고.....
그 때까지 나는 사람의 속에 그렇게 긴 똥의 길이 똬리를 틀고 있는 줄 몰랐다.
새벽녘이 되자, 무슨 생각에선지 시어머니는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누겠다고 우겼다.
나는 밤새 그렇게 많은 똥을 내보내고도 여전히 무거운 그녀를 간신히 안고 변기 위에 앉혔는데
그녀는 금방 다시 방으로 들어가겠다고 또 우겼다
나는 헉헉대며 울 듯이 ‘어머니, 계속 이렇게 똥이 나오는데 어떻게 들어가요?’ 통사정을 하는데
그녀는 ‘지금 똥이 문제야?’ 하고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이 똥이 줄줄 새는 그녀를 안고 방으로 가는데 문득 그녀의 머리가 나의 팔 밖으로 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역시 ‘똥이 문제’라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는 걸 알았다.
시어머니는 그 때 길고 긴 똥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진 것이다.
- 이경림. 다층 (2006년 가을호) -
'책 · 펌글 · 자료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시 (0) | 2009.11.25 |
---|---|
한국문학과 그 적들 (0) | 2009.04.01 |
'국' 이야기 한토막 (0) | 2009.03.14 |
마당 이야기 #7 (0) | 2009.03.09 |
마당 이야기 #6 (0) | 2009.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