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이야기 #5

2009. 3. 7. 13:04책 · 펌글 · 자료/문학

 

  

 

 

오랫동안 마당을 쓸어본 사람의 비질 자국은

마당 위에 고르고 유연한 모양을 낸다.

그리고 쓸려진 마당 위로는

마당 쓴 이의 발자국까지 일정한 보폭과 무게감을 지니고 리드미컬한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이런 마당의 비질 자국과 발자국의 흔적에는

그 사람의 솜씨와 마음씨가 그대로 묻어난다.

할머니나 아버지는 안마당을 다 쓸고 이어서 바깥마당을 쓸었다.

안마당을 쓸 때는 촘촘하고 고왔던 비질이

바깥마당을 쓸 때는 조금 성글고 거칠어진다.

그러나 이런 성글음과 거칠음은 바깥마당의 외부성과 잘 어울려서

어느 때는 시원시원한 남성성을 기분좋게 느끼기까지 한다.

바깥마당을 다 쓸고 나면

두 분은 자신들의 눈길이 미치는 곳까지 바깥마당에서 이어지는 동네의 고샅긿을 한참 쓸었다.

이런 삼 단계의 마당 쓸기는 

세상이란 혼자만이 깨끗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마당과 바깥마당 그리고 고샅길은 서로 어울러 쓸려서 어우러져야만

제대로 된 환한 세상이 창조된다는 걸 알려주었다.

 

  

 

 

 

 부석사일몰02-06.JPG

 

 

 

"스님, 제가 내일부터 절 마당을 쓸면 안 될까요?

"그러지, 마당이야 쓰는 사람에게 공덕이 있는 것이지."

 

"그럼 내일 저녘부터 절 마당을 쓸면 안 될까요?"

"저녁 시간은 곤란한데.... 저녁 시간엔 절 마당을 안 쓸거든."

 

"그러면 언제 쓰나요?"

"새벽 예불 후, 4시쯤에 쓸지. 그때 함께 마당을 쓸고 하루를 시작하지."

 

"새벽에는 곤란한데 제가 저녁나절에 한 번 더 쓸면 안 될까요?

"저녁 마당은 안 쓸거든....."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언제든지 시간이 되면 새벽에 마당을 쓸러 오라는

비구니 스님의 말만 기약없는 약속처럼 손에 쥐고

절 마당을 걸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절이란 有와 無를 넘나드는 자유자재, 융통무애한 지혜의 도량이라는데

도대체 저녁에는 마당을 쓸지 않는다는 그 터부,

아니 계율이 나는 못마땅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그 이유를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아침 마당은 쓸어서 깨워야 옳지만

저녁 마당은 스스로 저물도록 재워야 예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아침 마당은 우리가 세수를 하듯

해가 뜨면 밤의 분비물을 털고 깨어나야 한다.

그것을 도와주고 마당과 함께 하는 일이 아침 마당 쓸기이다.

아침 마당을 쓰는 일은 외형상 물리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내적인 일이고, 영적인 일이며, 우주적인 흐름의 물결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루를 깨어서 시작하는 작지만 중요한 의식이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주 속의 모든 존재가 호흡을 하는 모습인 것이다.

 

절 마당도 저녁이 되면 음의 세계를 품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녁에 마당을 쓴다는 것은

그런 음의 세계가 깃드는 것을 방해하고 역행하는 일이다.

절 마당도 저녁이 되면 서녘의 노을과 더불어 음의 몸이 되어

지혜와 성숙, 은거의 시간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저녁 마당은 이런 모습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마당은 쓸어서 될 일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마당 곁에 앉아서 마당에서 익어가는 저녁의 음기와 동행하며

그 기운으로 욕망에 과열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의 소란을 가라앉히면 될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저녁 마당처럼

스스로에게 다가올 저녁과 밤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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