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과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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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의 마당은 다르다.
그것은 삶을 다 살아낸 老賢者의 태연한 얼굴을 닮아 있으며
관상용이 아닌 생활과 삶 그 자체의 연속이다.
이런 마당은 아무것으로도 꾸미지 않은 진여의 모습을,
호들갑스럽게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자생하는 자발성을,
잉여나 사치를 넘어선 검소함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마당은 점잖고, 묵묵하고, 핍진하고, 사실적이며,
그런 가운데서도 육탈과 탈각의 초월성을 내재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마당의 본질이고 매력이다.
이런 마당에 서면 평정의 기운이 찾아든다.
그것은 화려한 정원을 보았을 때의 흥분과 기쁨, 감탄이나 환상적 동요와 구별된다.
또한 정원의 인위적인 미적 감각에서 오는 놀라움과도 구별된다.
말할 것도 없이 정원에는 정원 나름의 특성과 미학이 있다.
도회에서 이런 정원이라도 갖추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상류층의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원을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서양식 정원을 가진 주인들이 보이는 과도한 편견과 선입견은 안쓰럽다.
잔디와 잡초를, 화초와 잡화를, 정원수와 잡목을, 풀밭과 맨땅을 이분하는 그 마음은
너무나 단순하고 서열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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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의 우월성과 확일성도 그러하지만,
돌이나 나무를 놓아 일부러 만든 정원의 보도도 거추장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관상용으로는 미학적인 즐거움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이 보도와 보도 아닌 곳의 인위적인 구분은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에게 은근한 구속을 가한다.
흙 마당엔 보도가 따로 없다.
마당 전체가 길이면서 길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그날그날의, 그때그때의 내적 율동과 욕구에 따라
흙 마당의 어느 곳으로 걸어다녀도 상관없다.
그렇게 하여도 마당은 다치지 않고, 마당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마당이 주는 최상의 매력이 이런 무한으로 열린 길의 개방성에 있다면
다소 과장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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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룡산 신원사의 절 마당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신원사의 절 마당은 흙 마당 위에 서양식 잔디를 깔아놓고
그 위에 역시 서양식 인공정원을 모방해놓고 있었다.
그런 마당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도 어색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위적으로 조성된 보도는
그곳을 거니는 내내 몸과 마음을 구속하고 불편하게 하였다.
오직 이곳으로만 다니라고 돌을 놓아 만든 신원사의 보도가 강요하는 구속성은
절의 정신인 자유자재함을 방해하였다.
인공정원이 된 신원사 절 마당엔
흙이 주는 질료적 편안함도,
흙 마당이 주는 관능적 평화로움도,
어디나 길이 되는 마당의 무한 개방성도 없었다.
마치 몸이, 조이는 남의 옷을 임시로 입은 것처럼
보도를 의식하며 따라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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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정원은 삶과 휴식을 이분한다.
그에 비해 흙 마당은 삶 속에 휴식을, 휴식 속에 삶을 구비한다.
한국의 시골집 흙 마당은 그런 점에서 미래적이다.
삶과 휴식, 안과 바깥, 집터와 일터가 하나로 통합되며 경계를 트는
창조적 탈구축의 시대에 흙 마당의 유연성과 통합성은
미래적인 건축양식의 한정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Candlelight / Carl D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