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선종
2009. 2. 17. 21:08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시대의 양심에서 패권보수 원로,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던 김추기경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가톨릭계 대표적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그동안 투병생활을 해오던 강남성모병원에서 2월 16일 오후 6시12분께 향년 87세로 선종(善終)했다.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1951년 사제품을 받았다.그후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 대교구장에 올랐으며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고인은 그동안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그동안 김추기경의 대국민 고해성사를 기대했던 입장에서 김추기경의 선종 소식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며 인연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김추기경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찰라의 순간에 비명횡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노환이나 사고의 후유증으로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생물학적 생명력을 다해갈 무렵이면 대부분 인간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잘못된 점을 진솔하게 뉘우치고 자신으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는등 선한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 뒷정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이와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평소 마음씨 좋고 선했던 사람이 죽음이 임박해 올수록 태도가 표변하여 병간호를 하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괴롭히는등 죽는 순간까지 포악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다. 목숨이 얼마남지 않은 환자가 까닭없이 성질을 부리고 괴롭히는것은 정떼기 위해 그런다는 말들을 하지만 당하는 당사자들이 받는 정신적 고통은 간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감내하기 힘든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선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면 좋지만 이처럼 평소와 달리 고통을 안겨주고 떠나면 슬픔보다는 정말 정떨어진 나머지 차마 드러내지 못한 묘한 기쁨을 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87)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할까.그동안 일부 국민은 김추기경의 투병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쾌유를 빌었지만 특정계층과 지역민,민주개혁 진영내에서는 김추기경의 병환과 운명적 거취에 대해 관심은 커녕 차디찬 냉소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던게 사실이다.
김추기경이 권위주의 정권시절 시대의 양심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약자의 편에 섰던건 사실이나 5.18광주 민중항쟁을 기점으로 수구패권 세력을 옹호하고 반민주,반화합적 언동으로 특정지역민과 서민,민주개혁진영 국민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데 이어 지난해 12월25일 성탄절을 맞아 병문안을 온 이명박 대통령 부부에게 기존의 정신적 지도자상과는 사뭇 다른 보수 원로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신군부 용인,김대중 정권과 호남에 냉정했던 친영남 보수 원로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 유신정권시절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야당 정치인과 재야민주 인사들에게 명동성당을 피난처와 투쟁의 장으로 기꺼이 제공하고 미사집전과 강론을 통해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는등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구심적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그와같이 민주화의 고비마다 회피하지 않고 성직자의 양심에 바탕한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민주화의 전환점의 계기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정신적 지도자상은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에 의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12.12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저지른 5.18광주 민중 학살사건에 대해 권력 굴종적이고 반민주,반화합적 처신으로 패권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김추기경은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신군부의 천인공노할 반민주적 살육범죄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면서 광주시민을 향해 "국가를 위해 광주시민이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는 공개적 압박발언을 통해 신군부와 일부언론의 광주시민 폭도론을 정당화시켜 줌으로써 호남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김추기경은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것을 계기로 민주화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6.10항쟁을 맞아 전국민적 동참으로 대세가 민주화로 기울즈음 "나를 밟고 수녀를 밟고 넘어야 할것"이라며 민주항쟁에 나선 학생들을 옹호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그나마 아예 존재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정치국면에 모습을 드러낸것은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87년부터였다.
김추기경은 같은 천주교 신자이면서 가택연금과 투옥,세번의 죽을고비를 넘기면서까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온몸을 던져 세계적 민주,인권 지도자로 알려진 김대중 후보보다 박정희 대통령과 비밀회동,신군부 정계은퇴 선언및 단식쇼,권력욕에 집착한 3당야합등 알맹이 없는 허무맹랑한 정치야합이 전부인 김영삼 후보의 민주화 경력을 높이사 1987년~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였음을 공개하기까지 하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추기경 유해가 안치된 명동성당을 찾아 조문한 자리에서 김추기경이"DJ보다 젊지만 먼저 대통령을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며 이사실을 확인해 주었다.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김영삼 지지 공개 발언으로 다시금 호남인들의 가슴에 상처를 안겨주고 국정무능으로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자초한 인물을 국가의 운명을 짊어질 대통령깜으로 본 불가사의한 인물보는 안목으로 인해 국민을 실망에 빠트렸다. 김수환 추기경은 국가를 환란에 빠트려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김영삼을 지지한 잘못에 아랑곳하지 않고 1977년 과 2002년 대선에서도 연거푸 환란정권 후예인 이회창후보를 지지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김영삼이 김대중보다 민주화 공로면에서 우위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합리화하여 김영삼을 지지하고 비영남 출신 이회창후보의 손을 들어준것은 자신의 고향인 영남에 정치적 기반을 둔 패권 보수 정당 한나라당 후보였기 때문이었지 않나한다. 다른 이유는 있을수 없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있어 영남과 보수패권세력의 이익에 반하는 호남출신 김대중후보와 자신과 같은 영남출신이긴 하지만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은 노무현 후보는 한나라당 후보 당선을 위해 떨어뜨려야 할 적일뿐 성직자적 양심이나 민주적 정치의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공개적 지지,후원에도 불구하고 김대중후보가 승리하여 집권하자 세차례이상 보수언론과의 인터뷰나 공개발언으로 김대중 정부가 호남편중 인사를 한다며 공격하여 호남인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안겨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영남출신 박정희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시절 40%내를 넘나드는 영남편중 인사를 하였지만 단 한차례도 영남편중 인사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들 영남정권 시절 호남출신 고위 공직자는 실세아닌 힘없는 자리 위주로 10~14%선에 그칠정도로 소외 받았지만 역시 김수환 추기경은 호남인사 소외에 대해 단한번도 언급한적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김대중 정권 인사는 역대 영남정권과 이명박정권의 고소영,강부자,5대 사정기관장 전원 영남출신 오사영등 영남편중 인사와는 비교도 안된다. 김대중 정권시절 이루어진 인사를 호남편중인사라고 하는건 언어도단이다.
당시 충청,강원출신 고위공직자까지 증가하면서 영남출신이 줄어들긴 하였지만 그래도 영남출신 고위공직자가 전국 최고인 27%이상을 유지하였으며 영남출신에게 검찰총장,경찰청장등을 맡겼었다.그런데도 김추기경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모든 국민이 믿을만큼 성역이나 다름없었던 추기경이라는 공신력을 이용하여 호남편중 인사라고 물고 늘어져 실정을 잘알지 못하는 국민들로 하여금 김대중 정권이 한풀이식 지독한 호남편중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도록 만들어 호남인들로 하여금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
이처럼 반민주,반화합적인 성향을 보인 김추기경이기에 12월25일 성탄절날 병문안을 온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민정서와 동 떨어진 "대통령 말씀을 들으면 힘이난다"고 말한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김추기경 반화합적 친보수 언행 고해성사하는 모습 보여 주었어야
모든 국민이 후보시절 약속과 달리 강부자,고소영,지독한 영남편중 인사,국가경제를 파탄내고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절망하고 있음에도 자신은 힘이 쑥쑥난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은 도탄에 빠진 국민에게 더 큰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와같은 김수환 추기경의 일련의 신군부 정권 이후 보여준 반민주,반화합,반국민적인 모습은 김추기경을 국가원로,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아니라 일본군 장교출신 친일보수 패권세력의 패권보수 원로이자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다.
김추기경은 1944년 일본 상지대 유학시절 학병에 징집되어 동경남쪽 후시마섬에서 사관후보생 교육을 받다 일본이 패망한 다음 상지대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 장교가 되는 사관후보생은 학병으로 끌려가 무조건 선발되는게 아니고 조선인의 경우 사상적으로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사관후보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사관후보생이 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는 여론이 많았다.
특히 효성여대를 설립한 전상재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잘 다려진 일본군 장교 군복을 입고 어깨걸이 가죽반도를 찬 상태에서 지휘봉을 든채 뒷짐을 진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모습은 사관후보생 이기보다 장교신분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었다. 군의 관례로 보아 장교로 임관되어 지휘자,지휘관이 되어야 지휘봉을 사용할 수 있지 사관후보생이나 사관생도는 지휘봉이 주어지지도 않고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아리송한 것은 김추기경이 일본군 사관후보생,장교복무에 대해 1944년 몇월에 징집되었으며 사관후보생 교육은 언제까지 받았는지 또 일본패망후 상지대에 복학하였다고 하나 1946년 12월 귀국한 것으로 볼때 패망후에도 상지대 복학한게 아니라 일본군 장교생활을 더한것인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유신정권시절 민주화에 관심을 보인것은 이러한 지난날 친일 일본군 전력을 상쇄하기 위한 차원이 아니었나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김추기경은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라는 신분과 유신정권 시절 민주화에 대한 관심,민주화 성지라는 명동성당 이미지에 의해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성역적 국가원로,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 위상을 굳혔다. 김추기경의 한마디 한마디는 내로라하는 학자,지식인,정치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신적 지침,교시로 받아 들여졌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원로로서의 위상은 예전같이 않다. 광주학살 신군부를 용인하고 특정 지역민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환란국난 주역 김영삼을 국가적 지도자로 추켜 세우고 영남 편중인사는 눈감고 새발의 피인 호남균형 인사를 편중인사로 트집잡고 국민이 절망한 이명박 대통령이 힘을 주는 구세주로 우러르는등 성직자의 양심을 의심케하는 반민주,반화합적 행적으로 인해 패권 보수원로이자 정신적 구심점으로 보는 국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추기경에게 '국민명예협회(대표 김규봉)'라는 단체가 지난 1월 5일 김추기경을"가톨릭 성직자로서 시대의 양심과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인간 존엄성의 고귀한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과 함께해 국민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는 이유로 2008년의 '명예로운 한국인'으로 선정하는등 김추기경에 대한 국민 일각의 존경심 또한 각별한것도 사실이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이와같은 국민일각의 존경심이 사후에라도 국민적 추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선종전에 일본군 행적,신군부 이후 반민주,반화합적 언행,호남인들에게 준 상처 그리고 잘한것은 잘한것대로 진솔하게 대국민 고해성사가 있었어야 했다.그점이 못내 아쉽다.
선종한 고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신문과 방송을 중심으로 전국을 뒤덮는 이때 고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가 예의에 벗어나고 시기상조인지도 모르겠다.시대의 양심으로 민주화와 약자를 위해 헌신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일본군 장교전력과 친일파와 친일행위에 대한 침묵, 친일청산 반대,영남정권 인정을 바탕으로한 민주화,약자를 사랑한다면서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약자였던 호남에 대해서는 냉정했던 점에 대해서는 가감없이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본다.기본적인 평가와 이해관계를 떠나 인간적 차원에서 고인의 선종을 애도하고 영생하시길 빈다.
(글쓴이. guel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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