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테푸르 시크리

2009. 2. 5. 12:08북인도

 

 

 

안영배, 『인도건축기행』

 

「인도의 건축문화는 화려할 뿐 아니라 매우 독특해서 세계 건축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도문화를 다른 지역에 비해 소홀하게 생각해 왔다.

건축가들도 서유럽 건축에 대한 지식은 있어도 인도나 중동 지역의 건통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도에 한번 다녀오면 인도건축에 한없이 매료되고 인도건축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인도에 갈 때마다 인도 건축에 점점 더 심취하게 되었다.

인도는 워낙 광대한 지역이어서 인도의 중요한 건축들을 모두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알려진 건축들은 거의 다 본 셈이다.

특히 아그라와 뭄바이, 암다바드의 인도 건축들은 매우 중요하여 인도에 갈 때마다 찾았다.

훌륭한 건축은 보면 볼수록 더욱더 매료되게 마련이다.

인도의 전통건축은 서유럽 건축보다 친근감을 훨씬 더 느끼게 하는 점이 많았다.  

 

한국 건축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고건축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

1980~1990년대에 중국와 일본 각지를 탐방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인도와 동남아 지역까지 확대하여 고건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인도를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아시아 전 지역에서 한국의 전통건축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점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인도 건축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은 인도 건축 탐방에서 얻은 가장 값진 성과였다.」

  

 

 

 

 

 

 

 

 

 

에휴~!!!  저누머 새끼들 정내미 떨어져서 원~!!!

 

입구가 너절해서 아주 별볼일 없는 유적지 같지만 그건 아니다.

남들이 뭐라 평가하든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가 젤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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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황제 악바르에겐 늦게까지도 아들이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가

'치스티'라는 이슬람교 성자의 도움으로 아들을 얻었다.

그 보답으로 치스티가 살고있던 곳에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것이<파테푸르시크리>다.

아그라에서 서남쪽 40km 지점이다.

 

<파테푸르 시크리>라는 말 뜻은 '승리의 도시 시크리'라는 것인데

실은 이 지역 서쪽에 파테푸르라는 마을이 있고 동쪽에 시크리라는 마을이 있어서

그 중간 지점에 건설하다보니 이름이 그리 되었다는게 칸의 설명이다.

지어놓고보니 그럴듯했는지 수도를 아그라에서 이리로 잠시 옮겨오기까지 했다.

 

 

 

 

  

 

  

 

초대 황제 바부르도 자식 때문에 속 많이 썩였다.

아들이 '후마윤'이었는데 병약했던 모양이다.

후마윤이 황제에 오르고서도 외침으로 인해 이리저리 쫒겨다니다가 일찍 죽었다.

며칠 전에 MBC에서 땜방용으로 무굴제국의 역사에 대해서 방영하는 걸 중간에 얼핏 봤는데

바부르가 자식을 위해서 꽤나 헌신적으로 살다 죽었더라.

그 바람에 악바르가 16살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악바르 자신이 성군의 틀을 타고났지만 보좌하는 신하들도 당태종때 못지않게 짱짱했다.

 

그 악바르 황제가 뒤늦게 얻은 자식이 '자한기르'인데,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그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게 키운 아들놈이 왕위를 빨리 안 물려준다고 반란을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쳤다니까

악바르가 기가 막혔겠다. (오르차 城 참조)

그러거나 어쩌거나 자한기르가 물려받아서 황제 노릇을 잘 했다곤 한다. 

페르샤 쪽에선 학자로서도 크게 알아줬다고 그러더라.

 

그 다음 代가 타지마할을 지은 샤자한인데,

애비가 돈을 헤프게 쓴다고 아들놈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서 샤자한을 감금시켰다고 하지 않았냐?

아우랑제브는 또 두 아들에게 나눠서 물려줬는데...거기서부터 무굴제국은 절단이 났다. 

 

집안 내력인지... 권력의 속성인지... 암튼 흔하지는 않은 일이다.

초대 황제 '바부르'만 아프가니스탄에 묻히고 나머지 황제들은 모두 인도에 무덤이 있다.

 

 

 

 

 

 

 

 

 

 

목조건축 같지 않냐?

그런데 아니다. 역시 사암이다. 나무는 한쪼가리도 들어가 있지 않다.

왜 이런 목조 양식으로 지었을까? 몽고의 영향 때문인가?

오르차에서도 느꼈는데 얘네들이 목조건축에 대한 미련이 많은 것 같다.

건축재료로 쓸만한 나무는 귀했기 때문에 늘 동아시아의 목조건물을 부러워했을런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는 집으로야 당연히 돌보다 나무가 낫겠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도건축기행』에 나오는 해당 부분을 옮겨본다.

 

「이슬람 건축은 축성(軸性)이 강한 것이 특징인데,

이곳 궁전지구의 공간은 축성에 얽매이지 않아 기능과 규모에 따라 독특한 모습으로 부드럽게 연이어 있다.

왕이 머무는 궁전은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거대하게 짓는데, 파테푸르시크리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규모와 구성에 크게 호감이 갔다.

건물은 모두 붉은색의 사암으로 축조되어 있어 바닥과 천정까지 온통 사암 일색이다.

건물의 구조는 목조건물에 쓰는 가구식(架構式)으로 되어있고,

햇볕을 가리기 위한 차양이 있어 석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목조건물을 보는 것처럼 경쾌하게 느껴진다.

지붕 모양은 돔, 완만하게 굽은 반원형, 사선 등의 형태가 다양하고 변화의 폭이 크다.

여기에 높낮이의 변화까지 곁들여 율동감이 느껴진다.

아치문이 사용된 건물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가구식 구조미가 잘 표현되어 참신한 느낌마져 들고

마치 현대건축을 보는 듯했다.

5층 높이의 판치마할까지 가구식으로 지은 것을 보면 당시의 건축기술 수준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내부 조각 역시도 목조양식을 흉내냈다.

 

 

 

  

 

 

 

 

 

여긴 식당인데  뷔페음식 먹을때 음식 하나하나 데우는공간이란다.

아침녘의 햇빛 영향도 있겠지만

같은 사암이라도 여기의 것이 유난히 붉고 밝다.

전성기 시절엔 굉장히 화려했을 것 같은데..., 사암에 이런 면이 또 있었구나....

 

 

 

 

 

  

 

 

 

이런걸 사분정원이라고 하는데,

신과 인간의 만남을 상징한다는 것과 한가운데엔 반드시 물이 있다는 얘기를 타지마할에서 했다.

 

 

 

 

 

 

 이걸 뭐라캤는데 잊어버렸다.

 

 

 

 

 

 

원래는 저 나무가지 문양에다 보석을 열매로 주렁주렁 매달았었다는데...

인도 특히 라지푸트 지방에 보석이 무지 많이 난다고 한다.

 

 

 

 

 

 

 

 

 

 

 

 

이런걸 '판치마할'이라 한단다. 

1층은 황후마마, 2층은 악바르 황제가 쓰고,

3층은 2왕비, 4층은 3왕비, 5층은 아들 자한기르가 썼다는데,

2층 3층은 바꿔서 말하기도 하더라.

 

  

 

 

 

  

 

 

 

이 자리에서 악바르와 치스티의 면담이 이루어졌단다.

 

 

 

 

 

돈 넣는 구멍이다. 말하자면 금고다. 다시 꺼낼라면 부셔야겠더라.

 

 

 

 

 

 

 

 

 

 

 

이 건물 2층이 황제 침실이다.

성곽 전체를 내려다보는 경관이 제일 좋은 장소라고 한다.

 

 

 

 

   

 

 

 

  

 

 

 

 

 

 

 

북쪽에 있는 <디와니하스>라는 건물인데,

 

"내부공간이 특이하다. 상부에는 다리가 대각선으로 교차되고

바나나 넝쿨처럼 생긴 장식이 있는 기둥이 교차되는 지점을 지지하고 있다.

교차지점은 악바르 황제가 앉아서 회의를 주재하던 곳이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만다라 개념에서 도입되었다고 보고있다."

 

"인도 건축은 중국, 한국, 일본을 잇는  동북아시아 건축과 서유럽 건축 사이에 있는

이른바 제3의 건축으로 보였다."

 

 

 

 

 

 

 

 

도시는 격자형으로 이루어졌고 궁전과 모스크 등 주요 건물들은 언덕 위에 세워졌다.

궁전지구는 물이 부족해서 서북쪽에 인공호수를 만드는 등 여러 시설을 갖추었으나

여전히 물이 부족했고 나중엔 역병까지 돌아서 수도를 다시 아그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파테푸르시크리는 300여년간 빈 채로 보존되었다.

 

 

 

  

 

 

이것은 물을 담아두던 수조다. 성(城) 규모에 비해선 당연히 택도 없는 크기다.

도시 설계하는 사람이 이 정도도 몰랐을까?

 

  

 

 

   

 

 

  

 

 

  

 

 

 

 

 

 

內城이 있고 外城이 있다.

물론 이건 內城이다. 외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있고 그냥 밭이다.

여기 궁전은 지대가 높다.

내외 성곽을 잘 수리해서 잔디밭 쫙 깔아놓으면 명품 골프장 되게 생겼다.

 

 

 

 

 

 

 

 

 

    

아라비아 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평화가 있을지어다.

 인생은 다리다.

 다리를 통해 삶을 건너지만 집을 짓지 말라.

 한 시간을 소망하는 자는 영원을 소망한다.

 인생은 기도 중의 한 시간이다.

 나머지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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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자이푸르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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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안영배교수의 인도건축기행이 소개된 인도 건축물들이다.

날짜별 지역별의 건축 여행 일정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인도는 북인도 서인도 동인도 중인도 남인도로 구분한다. 

 

아름다운 조형미의 극치 / 타지마할  

이슬람과 힌두 양식이 융화된 / 파테푸르시크리 & 악바르 묘 

내부공간이 다채로운 / 라나크푸르 아디나타 사원 

환상적인 경관을 이룬 / 사트룬자야 사원도시 

무을 귀하게 여긴 인도인의 지혜 / 계단우물과 쿤다 

만다라를 상징하는 핑크빛 도시 / 자이푸르 

인간의 애정과 신의 축복이 충만한 / 카주라호 사원군 

불교미술의 정수 / 아잔타 석굴 

풍부한 영감을 주는 건축의 보고 / 엘로라 석굴 

기하학적 공간에서 자유로운 공간으로 변화 / 오르차 성곽궁전 & 우다이푸르 시티팰리스 

별처럼 빛나고 보석같이 화려한 / 호이살레슈와라 사원 & 벨루르 사원 

호이살라 양식의 최고 걸작 / 케샤바 사원 

신앙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 / 미나크시 사원 

사원이 하나의 도시를 이룬 / 랑가나타 사원 

춤추는 시바 신을 위한 / 나타라자 사원 

치밀하게 계획된 기하학적 공간 / 단자부르 사원 

남성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 강가이콘다촐라푸람 사원 

들어가는 방식이 매우 특이한 / 다라수람 사원 

힌두교 사원건축의 요람 / 판차 라타 & 해안사원 

힌두교 사원건축의 원형 / 카일라사나타 사원 & 바이쿤다페루말 사원 

자연의 아름다움이 한껏 돋보이는 / 시기리아 & 칸다라마 호텔 

고색항연하고 주옥같이 아름다운 / 링가라자 사원 & 묵테슈와라 사원 

정형적 공간 구성 / 브라메스와라 사원 & 라자라니 사원 

힌두건축의 최고 걸작 / 코나락 수리아 사원 

20세기의 거장 르 꼬르뷔제의 / 찬디가르 도시계획 

거장 루이스 칸의 / 디카 국회의사당 & 인도경영대학

 

 

 

 

 

 

 

 

 여기도 타지마할처럼 주차장에서 다시 셔틀버스로 이동하게 되어있는데,

중학생 정도 보이는 아이들이 견학왔더라.

우리가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다... 자리도 양보해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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