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11. 19:59ㆍ발칸반도/동유럽
프라하市 만을 지칭했던 것인지 아니면 체코 전체를 말한 것인지는 긴가민가한데
아무튼 지난해에 관광객이 9,800만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도대체 수입이 얼마냐?
공식적으로 지불하는 여행경비는 제쳐두고 계산해 보자.
그냥 쓰고 가는 돈이 10만원이야 안되겠냐? 그럼 98,000,000 x 100,000 = 9,800,000,000,000
자그마치 9조8천억원이다.
호텔 숙박료/항공료/입장료/교통비/식비/ 등등의 공식 지출을 빼고도 말이다.
유로(eu)에 가입한 동구권 국가중에 체코가 가장 앞서간다고도 했고,
곧 유로화가 통용 될 나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지목한다는......
까를橋에서 나오면 바로 만나게 되는 큰 건물이 이 국립 도서관이다.
그동안 건물의 외관을 소개하는데 그쳤는데, 교회에서 보았다시피 내부는 훨씬 화려하다.
천정이나 실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거 구경하느라 책에 집중할 수가 없더란다.
지난번엔 고딕을 소개했었는데, 이번엔 바로크를 소개해 보자.
물론 같은 책에서 인용하는 거다.
'바로크'라는 이름 자체도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엄청나게 크고 따분한
석조 건물 양식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무심결에 얕잡아 붙인 이름이다.
스페인 말로 바로코(barroco)는 불규칙한 모양의 커다란 진주를 뜯하는데,
좀 잘못되어 아름답기보다는 괴이해 보이는 진주를 의미한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이 북쪽에서 온 것은 무엇이나 '고딕'이니
'훈족의 것'이니 하고 놀리는 것과 다름없다.
분명하게 연대를 정하기는 어렵지만 바로크는 16세기 중엽 종교개혁의 발생과 함께 시작하여
1700년 직후 루이 14세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고할 수 있다.
좀더 늦게까지 지속된 곳도 있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이미 끝나있었다.
그러나 이 150년이란 기간 동안 기독교 세계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적으로 종교 문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루터와 칼뱅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졌던 중세의 종교적 보편성이 깨져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구원을 제시하는 수많은 새 선지자들 가운데 누가 미래의 행복을 가장 잘 보장해줄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이윽고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세례파와 재세례파, 숙명론자와 후정론자, 광교파와 제한론자,
삼위일체파와 그리스도 편재파를 비롯하여 그밖의 서로 대립하는 수많은 교파가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려고 겨루었다.
이와 같은 논쟁은 사상 유례없는 백 년 간의 분쟁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30년전쟁' 이라는 가장 비참한 전쟁으로 치달았다.
나중에야 어느 한 분파도 나머지 분파 전체를 멸망시킬 수는 없으며
타협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유럽 전체가 드넓은 싸움터로 변하고 난 뒤였다.
싸움터로 변한 유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가톨릭 장군이 개신교 군대를 지휘했고 가톨릭 군대를 개신교 장군이 지휘했다.
결국 완전한 교착상태가 되었다.
30년 동안 싸우고 난 뒤 쌍방은 휴전에 동의했다.
그러나 매우 불행한 휴전이었다.
각 군주에게 대다수 백성의 뜻과 상관없이 제 신앙을 강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1555년 아우크스루브크 종교화의 3개조를 승인한 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럽 전토는 수많은 조그만 나라로 세분되어
서로 자기 종교를 갖고, 종교를 달리하는 이웃 나라와 원수가 되었다.
이제 중세의 교회는 이전보다 더 '전투의 교회' 라는 고전적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유럽 문명에 영향을 끼진 가장 광범한 변화였으며
그 변화는 모든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화가나 조각가나 건축가나 음악가들은 더이상 하나의 보편적인 신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일하는
평화로운 장인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더이상 그림일수 없었다. 그것은 선전 광고가 되었다.
교회도 더이상 예배와 명상의 장소가 아니었다.
같은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전락했다.
이 무섭고 무자비한 투쟁에서 남쪽의 가톨릭 군대는 시각예술의 도움을 빌려서 싸웠고
북쪽의 개신교 군대는 청각예술에 의지했다.
한쪽은 그림과 건축으로, 한쪽은 음악으로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바흐 대 벨라스케스의 기묘한 10회전!
그러나 이것은 내가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사실 역사상 바로크 시대만큼 복잡한 시대도 없었다.
우승을 겨루는 자가 또 하나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조(王朝) 국가, 모든 권력이 오직 한 사람,
즉 왕이나 그의 재상 손아귀에 들어가는 왕조 국가였다.
왕조 국가는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 의해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이권을 놓고 모든 나라가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적 상황에 따른 고도의 중앙집권적 정치 형태의 필요성 때문에 탄생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국가의 군주들도 교회와 손잡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는 외적뿐 아니라 내부의 적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부의 적이라야 단순히 종교적 이단자 또는 잠재적 이단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그런 사람들까지 충실한 지지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세속 군주들은 교회의 경우를 본떠서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초호화판 공사를
계획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그것만큼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 모두 자신의 영광과 매력과 관력과 부를 과시하기에 바빴다.
가엾은 백성들이 정신적 지배자와 세속적 지배자들의 권위와 광채에 완전히 압도되어
그 장려한 행사에 조금이나마 참가하기 위한 세금 납부를 행복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자는 속셈이었다.
바로크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한,
바로크 양식 교회 건축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건축가들은 모두 이탈리아인,
그 중에서도 로렌초 베르니니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설계를 승인하고 자금을 제공한 것은 예수회 회원들이었다.
바로크의 뚜렷한 특징은 다시 말해서 어떻게든 큰 인상을 주어
압도해버리고 싶은 끊임없는 욕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끝-
이건 프라하 대학 예술학부인가 철학학부 건물이라는데,
외국계 호텔체인에다가 팔아먹을려고 한단다.
지금 시의회에서 매각하는 걸로 통과까지 되었다는데,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통빡을 굴리는 중이라고 한다.
이거 말고도 프라하 시민들에겐 고민이 많다는데,
외국관광객이 많다 보니, 도시 운영시스템이 모두 관광객 위주로 되어있어서
프라하 시내 주민들은 여간 불편한게 아니란다.
관광수입이 어마어마해서 이럴 수도 저럴수도 없게 생겼다고......
행복한 딜레만지......
오페라 하우스, 국립극장이다.
"weddings only"
예식장으로 빌려준다. 저기 서 있으면서 두 팀이 들어가는 걸 봤다.
궁금해서 들어가보려고 했더니, 신랑 신부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들여보내더라.
식권 같은 건 안 주는 눈치더라.
니콜라스 교회
틴성당
1365년 세워진 이 교회는 금장식을 정점으로 하는 두 개의 탑이 높이 80m에 이른다. 화려한 외관은 초기 고딕양식을 띠고 있지만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음울한 분위기이다. 이 교회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스타일의 거대한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의 출입문이다. 이 곳에서는 종종 클래식 콘서트가 열리며 특히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가 기막히다. (펌)
(좌)골스킨스키 궁전 / (우) 틴 성당
얀 후스 동상
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 보헤미아에서 1372년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 지역의 최고 명문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얀 후스는 그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37세 때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책망했고 교황이 갖고 있던 교황권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명설교가였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로마교황청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1414년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가 독일 남단에 위치한 콘스탄츠에서 개최되었다. 후스는 이 종교회의에 참석,자기의 입장을 알리고 교회개혁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독일 황제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받은 그는 콘스탄츠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스는 즉시 체포돼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당대 명문대학 총장이었고 최고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인사였다. 후스는 투옥된 상태에서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 당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해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독일 황제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1415년 7월 당시 로마교회는 후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도 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고 하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후스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였다. 그런데 후스의 최후에 관해서 한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화형대에서 뜨거운 불길이 후스의 몸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이제 ‘거위’와 같이 불에 타 죽지만 앞으로 ‘백조’와 같은 인물이 내 뒤를 이으리라.” 마르틴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00년전 후스가 말했던 ‘백조’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를 ‘백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백조’를 바라보는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펌)
코스모스는 어느 나라고 다 피나?
이번에 보니 동유럽엔 저 붓꽃처럼 생긴 보라색 꽃이 참 많더라.
헝가리에서도, 폴란드에서도, 오스트리아 짤츠감머굿에서도....
이 사람들, 유대인이다.
저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원리주의자 '하레디'라고 부른다.
물론 지금은 우비를 걸치고 있지만 시커먼 모자와 긴 외투를 입고 다닌다.
꼭 집시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스라엘에서도 골칫거리라더라.
러시아나 동유럽의 유대인이 대량으로 이스라엘로 이주를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이런 낙서는 여기 말고도 많다.
유대인 공동묘지다.
40,000基인가가 묻혀있다고 하는데 2차대전때 희생된 사람들이다.
안에 들어가면 꽤 넓다고 한다. 입장료도 받는다. - 20유로.
이 인근의 지역이 유대인 거주지라는데, 아무렴 市에서 강제하는 것은 아니겠고 즈덜끼리 모여살겠지.
물론 차이나타운하고는 분위기가 다르다.
다 끝났다.
동유럽, 아니 중유럽 관광이, 프라하를 마지막으로,
이제 저 다리만 건너면 열흘간의 일정이 모두 끝나는 거다.
공항으로 데려다 줄 버스다.
여행 내내 우리를 태워다준 버스다. 물론 버스기사도 그 젊은 친구고......
벤츠라곤 해도 우리나라 관광버스보다는 허룸한 것 같다. 앞뒤 좌석 간격도 비좁다.
프라하는 공항이 가깝다. 20분 정도만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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