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 1 }

2008. 9. 11. 13:50발칸반도/동유럽

  

 

 구시청사 천문시계탑   

 

 

 

 

 

이걸 600년 전에 프라하 대학인가의 수학과 교수가 설계했디야.

위엣 시계는 말 그대로 천문시계고 아랫시계는 농사 절기 같은 걸 갈쳐주는 시계라는데,

(물론 시간을 알켜주는 시계는 위엣 거지. 시곗바늘이 있자녀. 분침은 없고 시침만 있는겨.)

정각이 되면 해골이 줄을 잡아당기는데.......   

 

이제부턴 아랫시계는 무시하고 윗 시계만 보는겨~

시계 테두리 바깥으로 2시 10시 방향에 인형같은 게 보이쟈? 해골!

갸가 줄을 댕기면 종소리가 울렸던가 새소리가 났던가 하면서 바로 고 위에 창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나타나는 겨.

10명인가 12명인간데 예수님 제자들이리야.

갸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지나가는게 아니라 안에서 뱅글뱅글 돌리는 거겠지만.)

맨 위에 구멍에서 황금 닭이 튀나와서 꼬끼요 하고 우는겨. 

근데 줄을 잡아다닐때 보면 다른 조각상들도 움직이는데, 고개를 설레설레, "아니다!"

요단강 건너가 하나님한테 가자니까 아니라고 하는 겨.

바이올린 켜는놈 / 거울 보는 놈 / 지갑인가 자룬가 들고 있는 놈,,,

(바이올린은 쾌락이고, 거울은 허영, 또 하나는 돈이리야.)

그것 때문에 못 가겠단 거지.

 

내가 말해놓고도 뭔 소린 줄 모르겠다 야. ㅎㅎㅎㅎ

 

암튼 이 시계 히트쳤디야.

세계방방곡곡 여기 저기서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난리가 났디야.

그래서 여기 城主란 놈이 이거 만든 사람 눈깔을 파버렸디야. 똑같은 걸 못 만들게.

 

    

 

 

 

 

 

마침 운이 좋게도 시간대가 맞아서 작동하는 걸 바로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서 9시 5분에 가면 55분간을 기다려야 되거든.

  

여긴 정식으로 '프라하 가이드' 면허증을 목에 두른 사람만이 가이드 일을 할 수 있디야.

무자격자가 가이드 짓을 했다간 잠행하고 있는 경찰한테 붙들려가서 벌금 물고 나와야 된디야.

"가까이 오세요. 날 보지 마시고, 저 시계탑만 바라보면서 설명 들으세요." 

 

 

 

 

 

 

프라하 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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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양식이 가미되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모습으로 변화하다가 18세기 말에야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블타바강(江)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이는 570m, 너비는 128m이며, 9세기 이후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사용된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聖)비투스대성당 · 성 조지바실리카 · 성 십자가교회 등 3개의 교회와 성 조지수도원 등 다양한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설될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3세 중엽에 초기 고딕 양식이 첨가되고,
이어 14세기에는 프라하 출신인 카를 4세에 의해 왕궁과 성십자가교회 등이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되면서 이 때부터 체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뒤 1526년 합스부르크왕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다시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그러다 바로크시대인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시작에서 완성될 때까지 900년이나 걸렸다.

1918년부터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내부 장식과 정원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왕궁뿐 아니라 성 안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정교한 조각과 높이 솟은 첨탑, 화려하고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이며, 특히 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펌)

 

 

  

 

 

 

이른 아침 시각인데도 벌써 관광객이 많이 와 있더라고.

 

 

 

 

  

 

 

 

 

여기가 프라하 城 안에 있는 비트(비투스) 성당이란 곳인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여기부터 후딱 봐 치워야 된다는 거여. 

그 덕분인지 우린 한 20분 정도 줄 서니까 차례가 되더만.

나중엔 두시간씩 서야 된디야. 땡볕에 서있을라면 죽을 지경일 겨.

 

 

 

 

 

 

 

 

 

 

우산 쓰고 줄을 서 있으면서 물 떨어지는데를 피하려고 위를 쳐다봤더니,

아 글쎄, 물받이가 저거여. 꼭 침뱉는 거 같자니여.

둘러보니까 여러가지 모양이더만.

원숭이, 사자, 해골, 독수리, 드라큐라, 박쥐, ... 어디서 흉칙한 모양만 가져왔더라구.

저런걸 교회에선 뭐라뭐라 부른다는데 잊어먹었네 그랴. 

그리고 시커먼 건 역시 때가 쩔어서 그런겨. 저 때 벗기는데 100년 걸린다던가?

 

 

  

 

 

   

  

 

 

고딕

 

축 입문서에서 고딕을 다룰 때에는 온통 '뾰족 아치' 이야기로 채워버린다. 사실 고딕이라는 말이 여러 유럽語에서 '뾰족 아치 형식'을 뜻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고딕 건축가들은 회교건축가의 영향을 받아 로마네스크 시대의 석수들이 썼던 원통 모양이나 돔의 둥근 지붕 형식에서 분명하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잔틴 건축가의 둥근 지붕을 흉내내려고 하지 않고 결국 스스로 끝이 뾰족한 둥근 지붕을 고안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교회를 훨씬 밝고 환기도 잘 되게 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높이를 더욱더 높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끝이 뾰족한 둥근 지붕 형태를 씀으로써 부딪치게 된 여러 가지 곤란을 극복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는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이 수백 년 전부터 해왔던 방법을 그대로 채용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축가들은 둥근 지붕을 받칠 수 있는 강한 벽을 만들기 위해 천장과 닿는 네 군데 핵심적인 부분을 기둥에 얹는 방법을 썼다. 그 기둥은 벽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벽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본래 벽이 무너져도 오랫동안 지붕을 받칠 수 있었다.」

 

 

 

 

 

 

  

 

 

「 그런데 고딕 건축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먼저 기둥을 고려했다. 그런 연후에 벽을 만들었다. 마치 오늘날 고층 건물을 세울 때에 철골을 먼저 조립하고 그 철골에 필요한 벽을 입히는 것과 같다. 벽은 이제 지붕을 받친다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세워졌던 본래 뜻의 벽과는 거의 상관없어져 맨 위층부터 벽을 만들며 내려올 수도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건축가들은 이제 벽을 '창문 넣는 곳' 정도로 의미를 축소시켰다. 고딕 성당의 기둥은 건물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12세기 건축가들은 기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의 아이디어를 한번 더 빌려왔다. 로마네스크 성당에는 건물 주요부의 벽을 받치기 위해 규칙적으로 늘어선 측면 복도를 덧붙였다. 고딕 건축가들은 건물이 수직으로 선 유선형이 되도록 이른바 '벽날개' 를 고안했다. 벽날개는 내향 압력을 가함으로써 무거운 돌지붕이 기둥에 가하는 외향 압력을 상쇄시켰다. 대부분의 고딕식 교회는 뼈가 밖으로 드러난 괴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뼈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전체가 붕괴한다. 자연과 포탄에 견디면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고딕식 성당은 볼품없지만 훨씬 더 견고한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물보다도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보수해야 한다. 15. 6세기의 기록을 보면, 지붕 일부가 무너져서 수백 명이 죽은 참사가 어느어느 나라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딕식 성당의 특징이라고 생각되는 또 한가지는 측면 복도가 회중석(건물의 중앙부) 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졌고, 건축가가 기지를 발휘하여 몇 군데 지점에서 보면 모든 기둥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성당 안에서 수천 조각으로 이루어진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면, 홀연히 너무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로 빠져 들어가 사람들은 슬픔에 찬 현세의 모든 괴로움을 잊었을 것이다.」

 

 

 

 

 

 

  

 

 

 

  

 

「 이제 내부를 정말로 고딕식답게 만드는 또 하나의 특징인 창문과 예술 발달과의 관계를 이야기해보자. 기존 벽면이 많이 없어졌으므로 화가에게는 이제 솜씨 부릴 평면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화가들은 처음에 이 점에 크게 분개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하늘이 미술에 베푼 은총이었다. 익숙한 돌벽을 빼앗기고 부득이 다른 표현 재료를 찾던 화가들은 나무나 양피지 또는 캔버스에 되는 대로 그리면서 수백 년의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헨트� 반 에이크(Van Eyck) 형제에 이르러 물감과 기름 섞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반 에이크 형제가 개발한 방법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게다가 화가가 잃은 것만큼 '유리장이'가 덕을 보았다. '유리장이'라는 고풍스런 표현을 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듣기에도 좋고 그 말만으로도 스테인드 글라스가 제조되는 과정의 절반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철이나 놋쇠 또눈 구리나 철로 작업했던 모든 예술가(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다)의 성공이 가마에 달려 있던 중세로 데려다주는 듯한 기분이들기 때문이다.」

 

  

 

 

 

  

 

 

「 기술적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유리에다 금속 산화물을 섞거나, 흔히 하는 방법으로 유리 표면에 물감을 칠하고 구워서 색깔을 입힌 보통 창유리이다. 그 다음에 착색 유리조각을 납으로 붙이면 일정한 무늬나 그림이 된다. 그러므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채색화라기보다 모자이크에 가까운데, 사실 양자는 궁극적인 목적이 전혀 다르다. '유리장이'는 교회 내부가 초록이나 노랑, 빨강, 자줏빛이 제멋대로 분리된 채 얼룩지게 해서는 안 된다.  색채를 교묘하게 섞어서 그 효과가 기분 좋은 산광(散光)으로, 다시 말하여 화창한 날 바닷속에 들어간 것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유리장이는 화가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 중세의 다른 많은 발명과 마찬가지로 스케인드 글라스 창도 실은 동양에서 유래했다. 그것이 북유럽으로 들어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도 유리 공업의 중심지인 베네치아에서 처음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만든 듯한데 그때가 10세기쯤으로 짐작된다.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글라스 조각은 아우구스부르크의 성당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11세기 중엽 보다 더 거슬러올라가지는 않는다. 그보다 조금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은 프랑스의 샤르트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르망의 교회에 있다. 그후 몇 해가 지난 뒤에 영국에 전해졌다. 그래서 영국 캔터베리에는 아주 오래된 유리조각이 남아있다.」

 

   

 

 

 

 

 

  

「 이 새로운 발명품은 무척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당시 은만큼이나 값졌던 이 보물의 운반에 따르는 어려움과 위험을 고려할 때

그것이 온 유럽으로 퍼져나간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테인드 글라스는 물론 매우 실제적인 용도에 쓰였으며, 세계는 그것을 수백 년 동안이나 기다렸다. 유리는 아직 매우 귀하고 비쌌으므로 보통 성이나 개인 집에서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유리를 한 장 갖기도 어려웠다. 고딕 양식의 발전은 유리 공업을 엄청나게 촉진시켰다. 유리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떤 빛깔, 특히 매우 인기가 있었던 루비빛의 붉은 색은 엄청나게 비쌌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고딕 건축가가 마침내 양쪽 벽을 커다란 창문으로 꽉 채웠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건물 정면 벽 중앙부 전체를 커다란 꽃잎 모양의 둥근 유리창 자리로 만들어버리자 '유리장이'는 수요를 채우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해야 했으며 다시 없는 호경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교회 건축일을 하던 대리석 조각가나 목공예가나 그밖의 모든 예술가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때만큼 건축열에 들뜬 시대는 없었다.」

 

 

  

 

 

 

 

 

 

 

 

  

특히 이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주 유명한 거리야. 이것은 또 다른 기법이라고 했는데.... .

이 성당에 들어와서 이거 하나만 보고 휑하니 나가는 사람도 있다는겨.

나도 담에 오면 그래야지.

  

 

 

 

  

 

대통령 집무실이라는데, 먼저 헝가리도 그렇고, 폴란드도 그렇고, 대통령 집무실이 한데여.

경비도 없고 그랴.

 

 

 

 

 

 

 

 

황금소로

 

 

 

 

 

 

  

 

여기 이 골목은 따로 표를 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여.

 

   

 

 

 

  

 

 

  

그저 너절한 골목길인데, 길지도 않어. 100미터나 될까?

옛날엔 병사들 막사였는데 나중에 金房 골목이 된거리야. 그래서 이름이 황금소로(黃金小路)가 됐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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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2층집인데, 지금은 전부 기념품 가게더만.

어딘가는 2층에 갑옷을 전시해놨는데, 어두컴컴해서 자세히 볼 수도 없더라고.

그리고 밖에 나가니까, 옛날에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던 기구들을 전시한 데가 있고,

장난감 판매점이 큰 게 하나 있었는데, 사지 않아도 돈내야 구경한디야.

체코는 장난감이 유명한게벼. 시내 구경할때도 보니까 장난감 가게가 많더라구.

- 근데 비싸.

 

 

  

 

 

 

 

 

 

  

 

카프카가 여기서 『城』을 집필했디야. 이 프라하 城을 소재로 해서.

no.22 는 <번지> 표시여.

이 앞에가 젤 북적거리는데, 물론 카프카 명성 때문이겠지.

카프카 잘 알지도 못하믄서 기념사진 찍을라니까 좀 낯간지럽더라.

 

 

 

 

 

 

 

이 사람은 직업란에 대장장이로 쓰는지, 조각가라고 쓰는지, 관광업이라고 쓰는지,,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서문 중에서 -

 

「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을 거의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단시 카탈로그를 체크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 

미술가에 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볼 때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렘브란트가 키아로스쿠로(명암법)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유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 훌륭한 키아로스쿠로로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음 그림으로 옮겨간다.  

그들의 지식을 너무나 자만하기 때문에

아름답지도 정확하게 그려지지도 않은 그런 그림들만을 좋아하는 체하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너무도 분명히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주는 듯한 그런 작품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경우

무식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어쩐지 불쾌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대단히 흥미 있는' 작품이라고 부르는 속물이 되고 만다. 

나는 이러한 설익은 지식과 속물 근성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기 쉽고,

또 이와 같은 책이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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