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 '씨알의 소리'

2008. 7. 16. 11:27책 · 펌글 · 자료/ 인물

 

 

 

 

 

군사정권에서 제일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2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삼선개헌파동으로 나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길로만 줄달음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겁쟁이라고나 했겠지만 이제는 겁쟁이 정도가 아니라 얼빠진 놈입니다.

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온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지 않을까?

시저 죽는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른건 그르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기관총 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 체하고 친구가 바른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도

못 본 척하고 있었습니다.

귤이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면 기실이 돼 버리고 만다고, 서양자유의 학문도 종교도 이 나라에

들어오면 변질하는 것입니까?

그 풍토가 나뿜니다. 그렇습니다. 그 풍토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끼리 서로 씨알 속에 깊이 파고들어야만 합니다.

내가 몇해전에 사상의 게릴라전을 해야 된다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규군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유격대는 못 당합니다….

사상의 유격전은 더욱 필요합니다.

…마비된 양심에 위로와 희망을 주어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한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말 중에 가장 강한 말은 피로 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거기 따라오는 것인데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유기적인 하나의 공동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양심의 명령에 의해 성립되는 공동체는 되기만 하면 놀랍게 활동합니다….

씨알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씨알의 소리≫ 창간사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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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씨알 여러분, 역사의 엘리뜨 여러분, 이 한많은 1974년이 갑니다.

이 가는 해를 잘 보내자고 하려고 나는 이 붓을 들었습니다.

가는 해를 잘 보내주어야 오는 해가 잘 옵니다.

역사를 박차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에 빠져 죽듯 역사를 박찰 줄 모르는 국민은 역사에 치어 죽습니다.

가는 해를 잘 가게 하려면 진 빚을 깨끗이 물어주저야 합니다.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은 그 가슴에 안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 박차는 일입니다.

미워서 박차는 것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역사의 성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가슴에 선물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는 이 해에 안겨줄 선물이 무엇입니까.

이 해의 역사의 기록입니다.

떠나기가 섭섭해 머뭇거리던 친구도 그같이 있을 때에 한 일의 의미를 회상시켜 치하하고 감사해주면

마음 흐뭇해 선선히 떠나가듯이 가는 해도 잊기 어렵다가도 그 역사의 의미를 분명히 가슴에 안겨주면

잘 갑니다.

이제 1974년의 가슴에 그 역사를 새겨줄 시간이 왔습니다.

가는 해의 가슴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의 짐에 눌려 헐떡이는 씨알의 가슴 내놓고 다른 데가 없습니다.

자연에 묶은 해, 새해 없습니다.

끝없는 변천의 과정의 있을 뿐입니다.

낡으니 새로우니 하는 것은 생각함으로써 의미에 사는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꺼질 수 없는 역사의 영원히 산 기록을 새길 만세 반석은 펀펀한 씨알의 가슴밖에 될 곳이 없습니다.

다른 말이 아니라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온 이 한 해이지만 그 지낸 일들을 고요히 반성하여 엄정한

역사적 판단을 내려 심장의 육비(肉碑)에 기록을 하여 우리는 이 해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가

있고 그러면 새해에 역사의 주인으로 살 수가 있단 말입니다.

성공 실패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종의 멍에를 벗은 지 30년인데 아직도 한국적 민주주의니 서구적 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

이름은 한국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그 명사 속에 담은 내용은 옛날 '대감' '영감' 하던 때의 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덴 노헤이가' 대일본제국 하던 때의 민중의 꼴입니다.

그리고 경제생활이 넉넉해져야 민주주의는 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참아라 하는 말은 세계 역사를

온통 잊어버린 말 아닙니까?

민중이 제 권리 주장하는 데서 경제발전이 왔지, 어디서 경제가 넉넉해져서 민권을 올렸습니까?

이것은 영원히 지배해먹자는 욕심을 정당화하려는 궤변밖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있어야 자유가 있다는 그런 식의 소리는 공산주의자 입에서만 나오는 소리입니다.

 

잊었습니다. 양반시대 일제시대 경험을 온통 잊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10년이 못 되는 4 · 19도 잊어버렸습니다.

4 · 19 대열에 나섰던 그 자신들조차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연히 잊게 내버려 놓아두면 좋게 일부러 잊어버리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난 일 년이 무엇입니까?

4 · 19를 깍아 버리노라고 악을 쓴 것 아닙니까.

생손가락을 잘려도 기가 아찔해지는데 이것은 심장의 육비에 새겨진 것을 긁히우노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데모를 뿌리째 뽑겠다는 것은 다른 말 아닙니다.

민중의 가슴에서 3 · 1, 4 · 19의 기억을 영 없애버리겠다는 악독한 소리입니다.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지난 한 해의 치떨리고 이 갈리는 일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잊으면 사람 아닙니다.

잊고 이 해를 넘기면 짐승입니다.

내일부터 역사는 없습니다.

절대로 원한을 품으란 말 아닙니다.

원한으로 역사창조는 아니 됩니다….

심장의 육비에 새기라는 것은 그 죄악의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십자가 위에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만 역사는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못한다(Forgive but not forgot)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용서 못하는 것은 악한 사람이지만 잊어버리는 것은 역사를 지어갈 수 없는 멍청입니다.

1974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 년입니다….

 

어떻게 학대를 당하고 어떻게 억울한 재판 아닌 재판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터무니없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잊을 수 없어 이를 갈고 하늘  땅을 부르짖기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이것을 입속말로 외어 봅시다.

  

이제 우리는 오려는 새해를 내다보며 신부를 건너다보는 신랑 같은 확신을 가집니다. 

악의 세력은 틀림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들의 그 일마다에 있어서하는 억지의 궤변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무죄한 사람을 방자히 심판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판자에 대해서 하는 말에 나타나는 그 도량이 좁고 작음이 그 궁지에 빠진 단말마인

것을 증거합니다.

말마다 '일부 소수'라는 것은 스스로 일부 소수임을 자인하는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1974년을 잘 가라 하십시오.

그 얼굴이 왼통 피요 그 옷이 함빡 진창에 더러웠지만 그 속에는 성숙해가는 신부의 살갗이 있습니다.

그는 그 상처와 더러움을 역사의 깊은 소에서 진주를 얻어오느라고 입었습니다 (전집 8: 173-180).

  

≪씨알의 소리≫ 1974년 송년호에 실린 함 선생님의 「잊을 것 못 잊을 것」이라는 제목의 송년가

(送年歌)를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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