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 종교

2008. 7. 16. 11:14책 · 펌글 · 자료/ 인물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함석헌 평생을 통하여 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이는 류영모요 그 다음이 우치무라임을 부인할수 없다.

그리고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함석헌을 참 크리스천으로 이끈 것은 우치무라임에 틀림없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든 종교가 다 이날껏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절대미를 주장하려고 애걸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종교란 종교는 다 낡아 버렸다.

참 종교는 완전한 부정 속에서만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

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

썩어서 새싹으로 나와 자라서 열매 맺어 퍼져 나가야 할 것이다.

눈을 뜨는 사람은 푸른 연한 잎새를 볼 터이요 이 시대가 달라져 가는 징조를 보면

새 종교가 오리라는 예감을 아니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계시요 또 하는 추측이다.

계시는 이지(理智)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므로 그 오는 순간까지 사람은 전연 알 수 없다.

계시는 기다릴 것이요 올 때 받을 것이다.

계시가 왔을 때에 그것을 놓침 없이 바로 받으려면 거기 적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신앙이란 계시를 받는 준비의 태도라 할 것이다.

 

유교는 이와 달라 교양을 많이 말하는 것이므로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이것은 간단한 말로 표시하면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할 것이다.

천명은 곧 계시다. 명은 하나님의 명령 말씀인데 그 명(命) 안에 미래가 포함되어 있다.

말씀이 그 뜻대로 풀려 나오면 그것이 역사다.

하나님 편으로 하면 주실 때에 자유로 주시는 것이지만 인간 편으로 하면 올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온다.

절대에는 시간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 미완성도 없고 온다 기다린다도 없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시간 내에서 되는 것이므로 그 임하는 때가 있고 그 받아지는 시기가 있다.

여기 신앙과 역사적 노력의 관련되는 점이 있다.

 

그러면 진인사하는 것이 곧 대천명이요 대천명하는 것이 곧 진인사하는 것인데

그 진인사 중의 중요한 하나가 역사 이해에 의한 미래의 추측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 곧 이성의 일이다.

이성은 다만 자기아는 것을 말할 뿐이요 이로써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예수는 인류에게 문제를 남기고 가신 이다.

그는 문제를 풀었지만 풂으로써 문제를 새로 주었고 새로 문제를 주는 것이 또 푸는 것이었다.

"때가 오려니와 지금도 그때라" 하는 것이 그의 문제 푸는 식이요 또 문제 제출하는 식이다.

우리는 그 남기고 간 문제를 받아 가지고 밝기를 기다리며 밤새도록 가지가지의 그림을 그리는 자다.

새시대의 종교란 그 그림 중의 하나다.

새 종교를 꿈꾸는 것이 곧 새 종교지 그럼 새 시대의 종교의 꿈을 그려보자! 거기 무한이 있다..

 

  -1955.3. 중앙신학교 강좌 중에서 발췌-

 

 

 

  

 

 

敎에도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두 면이 있는데

좁은 의미로 하면 기독교다 불교다 하지만 참 종교는 정신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라고 이름지을 수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름지을 수 있고 형용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고 그것은 종교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老子의 '道可道 非常道'(道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참된 道가 아니다.)의 경지요

유교의 中庸之道라 표현되는 未發의 中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有名이요 有限일 수 밖에 없는 세상은 종교의 和를 추구할 수밖에 없고

變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變을 가리켜 우리는 개혁이라 하고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는 바로 혁명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敎會의 정신 혹은 믿음을 간단히 두가지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는 하나님에게 직접 나감이요

또 하나는 모든 사람을 꼭 같이 대접함이다. 사회생활에서 쓰는 말로 하면 자유와 평등이다.

무교회 신앙은 곧 이 정신을 살리자는 것이다. 요컨대 종교생활은 참과 사랑이라는 말이다. 종교를

좀 넓게 말하면 우주적 통일이다.

 

 

 

 

 

 

 

퀘이커교 (그리스도교) [Quakers] 

Society of Friends, Friends church라고도 함.
17세기 중반 영국과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집단.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느님을 직접 내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는 순서를 가지며,
특히 사회 개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 청교도운동의 극좌파에 해당한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청년시절 그리스도교도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여러 해 동안 영적인 도움을 찾아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옮겨다녔다.
폭스의 〈일기 Journal〉에는 "네 상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음성을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이던 당시 그가 이 메시지를 전파하자 〈신약성서〉 형태로 교회를 세우기를 바라던 독립교회주의자들과 구도파 등의
분파들로부터 추종자들이 생겼다.
 
폭스가 메시지를 전할 때 주로 강조한 것은,
첫째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
둘째 특별한 건물이나 안수받은 성직자가 필요없다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퀘이커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사전 준비 없이, 또한 설교자를 정해놓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느님이 예배자들 가운데 하나를 설교자로 삼을 것이라고 믿었다.
퀘이커교가 영국 북부에 급속히 퍼진 뒤, 열정적이고 광범위한 운동이 런던, 잉글랜드 나머지 지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에 잇달아 일어났다.
신세계에서 퀘이커교 선교활동의 중심지는 뉴잉글랜드·뉴암스테르담·롱아일랜드·메릴랜드·버지니아·서인도제도였다.
 
크롬웰의 말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폭스는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퀘이커교도들과 함께 영국 전역을 다니며 교회 모임들을 세우고 전도 사역의 일환으로 '진리를 선포'했다.
 
 17세기말에는 식민주들 가운데 연례 모임이 생겼다.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영국의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에게 웨스트뉴저지를 주고,
그의 의도대로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이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를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 자유를 위한 안식처로 삼게 했다
(→ 종교적 관용). 관용법(1689)으로 인해 영국에서 자행되던 극심한 박해는 그쳤으나, 법의 제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국교도들에게는 공무원이 되거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기 때문에 퀘이커교도들은 주로 상업과 공업에 종사했다.
퀘이커교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파산시에는 엄격한 관리를 하여 조그만 자영업을 큰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결과 성실하다는 평판을 받게 되어 이웃들이 안심하고 돈을 맡기게 되었으며, 많은 지방 은행들을 세우게 되었다.
퀘이커교는 18세기에 2가지 상충되는 경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정적주의는 신의 인도에 복종하는 소극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태도를 장려했던 반면,
웨슬리주의의 열정 및 신학과 복음주의 운동은 새로운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긴장이 18, 19세기 퀘이커교에 여러 분열을 일으켰다.
분열이 가장 심했던 미국에서는 엘리어스 힉스가 신(新)신학을 불신하고 많은 지역 연례 모임을 만들었다(→ 힉스).
 
19세기초부터 퀘이커교도들은 당시 점점 늘어나던 미국의 서부 이주 대열에 참여했다.
이들은 부흥운동 방법을 받아들여 예배 때 찬송과 고정된 설교 순서를 두고, 급료를 받는 목사를 세움으로써
그에 반발하는 전통적인 퀘이커교도들의 이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20세기초에는 다음의 세 파가 존재했다.
 
 ① '정통파' 또는 '복음주의파'는 서로간에 또는 런던 및 아일랜드 교도들과 연례 모임을 가졌다.
② '보수파'는 원래 퀘이커교도들의 예배·연설·복장 형식을 따르면서 연례 모임을 가졌다.
 ③ '힉스파'는 70년간 다른 퀘이커교도들과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점점 더 '현대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파들로부터 유니테리언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이후에 여러 퀘이커 단체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의심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협력과 재연합이 잇달았다.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 퀘이커교의 영향으로 세워졌던 모임들이 점차 시들어갔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에서는 퀘이커교도들이 벌인 전후 구제사업이 그 운동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말에는 선교 사업과 함께 이민이 시작되어 세계 모든 지역에서 연례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퀘이커교의 교회 정치체제는 근본적으로는 조지 폭스 시대 이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가장 중요한 단위는 월례 모임으로서, 이 모임은 1개월에 1번 정기적으로 만나 교도들의 모든 문제들, 재정과 재산,
교도들이 개별적으로 제기하거나 상위모임에 의뢰한 관심사에 대해 논의한다(→ 퀘이커 연합회, 퀘이커 총회).
 
초기 퀘이커교 예배의식의 극히 엄격한 성격은 많은 지역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 순서를 마련하고,
설교를 미리 준비하는 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정되어왔다.
그리스도교 교파들 가운데 성례전을 외적 형식으로 준수하지 않는 교파는 거의 퀘이커교뿐이다.
그들은 영적인 세례와 성찬을 믿는다.
 
 퀘이커교는 형제단메노파와 함께 '역사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회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퀘이커교는 전쟁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평화주의).
퀘이커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노예제 철폐, 여성들의 권리 신장, 금주령, 사형제도 폐지, 형법 개혁, 정신병자들에 대한 보호 등을 주장해왔다.

 

 

 

 

 

 

'책 · 펌글 · 자료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석헌 ... '씨알의 소리'  (0) 2008.07.16
함석헌 선생님 말씀들  (0) 2008.07.16
함석헌 ... 역사  (0) 2008.07.16
함석헌 ... 詩  (0) 2008.07.16
촛불시위에 대하여  (0) 200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