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追協 과 ys-dj 證言 (천학범 기자)

2008. 9. 19. 00:31책 · 펌글 · 자료/ 인물

 

 

천학범 전 NHK 기자의 현대사 증언(9)

 

 


좀 늦었지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언급해야겠다.

김영삼은 국회에서 추방당하고, 김대중은 미국으로 추방됐다.

정권의 정치활동 규제로 인해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던 인사들이 민추협을 1983년 구성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공동의장으로 추대됐다.

김대중은 미국에 있어 김상현이 공동의장 대리를 맡았다.

김영삼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김대중에게 총재직과 공천권 주겠다"

그런데 전두환의 압력이 심해서 사무실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빌딩 주인에게 얘기하면 임대해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옛날 대한일보 자리 옆에 서울시교육위원회 회관이 있었는데 거기에 민추협 사무실을 얻었다.

김대중도 귀국해서 국내에 있었는데 김대중과 김영삼이 민추협 사무실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경찰이 저지했다.

당시 무슨 사건 때문에 농성하고 있었다.

김영삼이 나한테 연락해서 현장을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내가 노상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을 인터뷰했다.

"왜 못 올라가고 있나?"

"지금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데 우리는 의장이니까 당연히 갈 수 있는데 경찰이 불법으로 막고 있다."

외신이 취재를 하니까 경찰이 봉쇄를 풀었고, 두 사람은 민추협 사무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김영삼파가 김대중파보다 많았다.

하지만 87년 대선을 앞두고 분열해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시 박찬종이 머리를 깎고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는 운동을 폈다.

무교동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김영삼을 만났다. 김동영도 같이 있었다.

김영삼이 나한테 "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동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 그 얘기를 김대중에게 직접 얘기할 수 있겠나. 그래서 내가 김영삼에게 물었다.

"후보단일화에 동의해주면 그 반대급부로 김대중에게 무얼 줄 수 있나?"

"내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 김대중이 총재직하고 공천권을 다 주겠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동영이 정색을 하며 "공천권은 절대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김영삼이 이렇게 면박을 줬다.

"야 임마 미친 소리 하지 마.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게 문제냐?"

김동영은 나중에 암으로 죽었다.

김영삼은 내가 김대중하고 친하니까 내가 그 얘기를 해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김영삼은 나한테 50만원을 주었다.

후보단일화 얘기를 해주겠다고 돈을 받아서 결국 김대중한테 갔다.

자택에서 단둘이 만났는데 내가 김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번에 출마해도 안될 것 같으니까 김영삼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해라. 그리고 차기 후보 약속을 받아내라."

그러자 김대중은 답변도 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

이후 후보단일화 얘기는 절대 안꺼냈다.

김대중은 결국 출마했는데, 선거결과는 노태우의 집권으로 나타났다.

김영삼, 노태우와 2시간 담판 벌여 '대통령 후보' 따내

김영삼은 자기 혼자로는 집권하기 어려우니까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자당을 창당했다.

당시 3당 합당 공작은 김영삼측에서는 김덕룡, 노태우측에서는 박철언이 진행했다.

거기서 내각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3당 합당 각서를 썼다.

노태우가 총재를, 김영삼과 김종필, 박태준이 대표위원을 맡았다.

박철언이 나중에 3당합당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했다고 나한테 전해주었다.

내각제 각서는 노태우와 전두환 세력이 계속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영삼은 내각제 각서에 서명했지만 내각제를 반대했기 때문에 나중에 마산에 내려가서 직선제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자기가 대통령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합당을 위해 내각제에 합의해주었지만 김영삼은 직선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각제 약속을 지킬 수 없으니까 박철언과 김영삼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박철언이 김영삼에 지고 말았다. 직선제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노태우의 부인인 김옥숙이 '김영삼 대통령'을 적극 반대했다.

박철언을 차기 실력자로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다.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나를 지명해 달라"고 노태우와 담판을 벌였다.

나중에 김덕룡한테 들었는데, 두 시간 동안 담판을 벌인 끝에 노태우가 김영삼에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전당대회를 열어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전당대회 전에 박철언, 이종찬 등이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노태우가 '김영삼 지지'로 돌아서니까 해산하고 말았다.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맞붙었다. 김대중은 세 번째 출마였다.

물론 나중에 네 번째 출마해서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세 번째 출마에서는 김영삼에 졌다.

당시 정주영이 김광일, 양순직 등 재야세력을 규합해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했다.

내가 외신구락부 기자회견 때 김대중에게 "이번에 당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도 출마하느냐?"고 했더니

"내가 빨리 대통령이 되기를 천형이 바라고 있는 걸 잘 안다"고 응수했다.

아마 상당히 기분이 언잖았을 것이다.

정주영도 외신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이북의 김일성까지 정주영의 대선 출마를 반대한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

그래서 기자회견 때 "김일성도 반대하고 이기지도 못할 건데 출마했냐?"는 질문에 정주영은 직설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김일성은 자기 앞도 못가리는 놈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

김영삼, 영남의 절대 지지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다

나는 <아시히신문> 자문역으로 있으면서 대구에 내려가 김영삼 유세를 취재했다.

당시 나는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에 대선과 관련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내려 가서 민심을 들어보니 70%가 정주영을 지지했다.

깜짝 놀랐다. 잘못하면 김영삼이 지겠다 싶었다.

대구 수성천에서인가 야외유세를 하는데 이만섭이 지원유세를 했다.

"경상도에서 지금까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사람의 대통령이 나왔다.

이번에 김영삼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줘야 네 사람의 (영남출신) 대통령을 탄생시킬 수 있다."

유세를 보러온 대구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김영삼"을 연호했다.

나는 그걸 보고 "김영삼이 영남표를 다 가져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날 김영삼이 이런 연설을 했다.

"이번 선거에는 사상이 불그스레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있다. 그런 사람이 당선되면 절대 안된다."

김영삼이 김대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구 사람들이 또 김영삼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결국 영남표는 김영삼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전날 내 여론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보니까 전부 김영삼 지지로 돌아서 있었다.

"영남사람이 대통령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는 내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김영삼이 영남의 절대 지지를 얻어서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요지로 보도했다.

김영삼이 결국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과 정주영은 낙선했고, 특히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한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냈다.

NHK 호타 긴고 피디의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프로젝트'

NHK에 호타 긴고 피디가 있었다.

문화부의 제작 피디였는데 그가 나한테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지금 김대중이 영국에 가 있는데 어떻게 그걸 할 수 있느냐?"

"김대중을 인터뷰 할 수 있도록 당신이 김대중과 연결해 달라."

그래서 내가 김대중과 친한 조순형에게 부탁했다. 조순형은 나하고도 친하게 지냈다.

"NHK에서는 김대중과 관련된 40분짜리 프로그램을 두 개 만들기로 했다.

교수가 김대중과 인터뷰 해야 하는데 협조해 달라."

김대중이 영국에 있을 때 박금옥이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다.
박금옥은 나중에 김대중 정부에서 총무비서관을 지냈다.

박금옥을 통해 김대중한테 얘기해서 인터뷰 동의를 얻어냈다.

영국에서 인터뷰를 했고, 국내에 귀국한 후에도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 내용하고 민주화운동, 납치사건, 광주사태 등을 넣어서 2부작 특집프로그램을 만들었다.

NHK 교육TV에서 방영됐는데 시청율이 무려 16%나 나왔다.

그런데 왜 NHK가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나?

노벨평화상 심사위원에 일본 사람이 많이 있었다.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그 방송을 보면 김대중을 지지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일본출신 심사위원들에게 얘기하면 김대중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호타 긴고 피디는 생각했다.

특히 김대중이 대선 패배 이후 "앞으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에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NHK 출판국에서는 방송했던 내용을 토대로 <일본인에 대한 김대중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6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부록으로 '한일관계 연대표'도 넣는 등 편집을 아주 잘했다.

초판 2만부를 찍었는데 바로 1만부가 팔려나갔다.

하지만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해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이 됐다.

결국 내용을 수정해 다시 그 책을 출판했는데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나는 김대중 인터뷰를 성사시켜 준 조순형에게 조그만한 선물을 했다.

NHK는 김대중에게 원고 집필료로 60만엔을 지불했다.

권노갑이 호타 긴고 피디하고 NHK 출판국 사람을 초대해 청와대 옆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권노갑은 판권을 얻어서 한국에서 방송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NHK에서 이를 거절했다.

다만 김옥두가 2부작 프로그램을 하나로 편집해서 선거용으로 배포하는 것만은 묵인해주었다.

김대중은 2000년 김정일을 만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호타 긴고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보지 못하고 죽었다.

호타 긴고가 죽었을 때 김대중쪽에서 정중한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몇가지 에피소드들 : "총재님 개혁바람에 국민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83년 KAL 비행기가 한국으로 오는 도중 소련 영공을 침입해 격추를 당했다.

본사로부터 그 소식을 새벽 5시에 전해듣고 방배동에서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당시 조중건 사장과 간부들이 탑승자 명단을 가지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저는 NHK 기자인데 일본 사람들이 많이 탔다고 들었다. 보도를 해야 하니까 명단을 좀 복사해 달라."

그렇게 탑승자 명단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걸 복사해서 사무실에 와서 검토했다.

그런데 일본 사람 이름이 모두 영어로 돼 있어서 일본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명단을 모두 완성한 뒤 보도했다.

88년 총선을 거치면서 김영삼파와 김대중파가 민정당보다 숫자가 많았다.

'여소야대' 국회가 된 것이다.

노태우는 중간평가를 선거공약에 넣었다.

중간평가를 받아 부결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 제1야당이 김대중당이었다.

서정화와 김대중이 협상을 했다.

서정화 밑에서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는 사람이 5-6명 있었다.

이우각, 김학준, 최병렬 등이 거기에 있었다.

서정화가 날 만나서 자문을 구했다.

"김대중이 중간평가를 안해도 된다고 밝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김대중은 그런 점에서 타협이 빠른 사람이기 때문에 협상을 하면 되지 않겠나?"

액수는 모르지만 김대중한테 정치자금이 건네졌고,

김대중은 중간평가를 안해도 좋겠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정화 밑에서 정보수집과 분석을 맡았던 이우각은 3당 합당 이후 국제국장으로 일했다.

김영삼이 대선에 출마할 때 각계 각층 사람들의 글을 모아 '내가 본 김영삼'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나는 이우각이 권해서 자택에서 김영삼과 차 마시던 얘기며 함께 등산을 다녔던 얘기 등을 모아서 3쪽짜리 글을 써주었다.

거기에 글을 쓴 언론인은 나를 포함 두명이었는데 국내기자로는 남재희도 참여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하기 1년 전인 1996년 신년세배를 하러 동교동 자택에 갔다.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희호 여사가 나를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세뱃돈 20만원을 주었다.

그 이후 김대중은 신년세배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김대중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김대중을 만난 것은 1996년 신년세배 때가 마지막이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KBS 주최로 '방송의 날' 행사가 63빌딩에서 열렸다.

당시 홍두표가 KBS 사장으로 있었는데 나도 초청을 받아서 갔다.

그런데 자유파티가 아니라 김영삼이 사람들을 두 줄로 세워놓고 악수만 했다.

헤드테이블에 김영삼, 홍두표, 박찬종 등이 있었다.

내가 김영삼에게 다가가면서 "총재님 오랜만입니다"라고 했더니 김영삼이 나한테 악수를 청했다.

그때 내가 김영삼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정치를 어떻게 하시길래 개혁 바람에 국민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박찬종이 그걸 들었다.

그래서 내 고희 잔치 때 축사를 하면서 그 일화를 언급하면서

"천 선생은 대통령에게 그런 얘기를 할 정더로 대단한 분"이라고 말했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껴보지 않았다.

내 생각을 소신껏 얘기했다. 그런 성격이었다.

 

 

 

 

 

'책 · 펌글 · 자료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금동향로  (0) 2008.10.08
친일파 문제 (1)  (0) 2008.09.22
명박이한테 보낸 편지  (0) 2008.07.16
함석헌 ... '씨알의 소리'  (0) 2008.07.16
함석헌 선생님 말씀들  (0) 2008.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