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16. 11:09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 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같이 다 곯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참혹한 일이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 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수평선 너머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또 무엇이 있나?
물결,
앞에도 앞에도 푸른 푸른
옆에도 옆에도 하얀 하얀
물결 또 물결
저 물결 뒤에는 또 무엇이 있나?
소리,
하늘 울어 천둥
땅 울어 지둥
흔들고 뒤흔드는
저 소리는 누가 흔드는 소리인가?
바다 아닌 바다
물결 아닌 물결
바람 아닌 바람
소리 아닌 소리
거기가 가고파서 그리워서.
울부르느냐?
흔드느냐?
들이치느냐?
떠서 도느냐?
이소리, 이 바람, 이 물결, 이 바다.
논다,
늠실 늠실,
우으로 우으로 늠씰 늠씰,
아래로 아래로 흠씰 흠씰,
그저 늠실거려 논다.
노했다.
밀려온다 밀려온다 온다 온다
철석 철서덕 쾅,
나간다 나간다 간다 간다
한숨 내�다, 부스스스 거품 거품.
싸운다 싸운다,
또 들어온다,
또 나간다,
들어오다 나가다 나가다 들어오다,
와아, 솨아, 출렁, 철렁.
밤낮으로 쉴새없이 우는 바다,
밤낮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드는 바다,
밤과 낮으로 눈코 뜰 겨를 없이 들이치는 물결,
밤낮을 아우성을 치는 물결,
너는 무엇이 분하니 무엇이 노여우니?
이쪽엔 일고 꺼지는 有의 물결
아득 아득한 수평선,
저쪽엔 죽은 듯 막막한 無의 모래밭,
뽀얀 뽀얀 地平線,
수평선 지평선을 내다보는 그 가운데 天平線.
그 서품에,
그 바다와 모래밭 만나는 사이,
그 有와 그 無 갈라지는 짬,
그 싸움의 오고 가는 틈,
그 늘 싸우건만 이김도 짐도 없는 선 위에.
늘 들이치건만
더 얻음도 없는 선
늘 흘러 나건만
빠져남도 없는 선
늘 늘 변하면서 변함 없는, 선 아닌 선,
얼마나 많은 물결 거기서 부서진,
얼마나 많은 거품 거기서 꺼진,
얼마나 많은 모래 거기서 묻힌
얼마나 많은 발자국 났다가 사라진,
얼마나 많은 배 거기서 떠난,
수없이 많은 그림 여기서 그려진,
수없이 많은 음악 여기서 울린,
수없이 많은 진주 여기서 닦여난,
수없이 많은 얼굴 잃었다 만난,
수없이 많은 배 여기 와 닿던,
그 선 위에,
그 서품에,
한 형상 섰네,
어부 아닌 어부
호올로 서 있네.
발 밑에 설레는 물결
삼키려 함 모르는 듯,
머리 위 휘도는 모래바람
덮치려 함 모르는 듯,
바위처럼 서는 그 사람,
바닷바람에 찢기고 익히운
그 살, 그 힘줄
소금 모래에 타고 깎이운
그 이마 그 뺨
싸움의 기록을 그린 그 얼굴,
익어 떨어지는 밤알인 듯
붉고 검건만
저녁 영광 속에 빛나
황금옷 입은 천사인 듯
화평과 엄숙의 빛 띠어 있고,
바람결에 나부끼는
굽실굽실한 머리카락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자유의 기상 떠도는 속에
한 줄기 슬픔 숨음 드러냈네.
숲 속에 미끼 얻어본
독수리 눈인 듯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그 눈,
또 갈라지는 애인들의 그것같이
애탐을 호소하는 그 눈.
아득한 바다 끝의 한 점
깜짝 않고 바라고 바라다가,
눈물 어릴 때마다
두툴한 그 주먹 들어
닦으며 바라보았네.
바라다 바라다 못해,
소식 없어,
두 손 말아 나발 만들어
거친 수염 헤치고 입에 댄 후
소리쳐 부른다.
발꿈치 까꾸러지게 괴어
발끝으로 서고,
목 빠지도록 내빼어
수평선 너머 건너다보며,
어어이, 어어이.
외치고 외치건만
하늘 땅 뒤흔드는 아우성 속에
그 소리가 무어냐?
구름 물 맞닿는 멀고 먼 데
그 소리가 무어냐?
외친 그 소리
한 걸음을 못 나가
발 앞의 사나운 물결
거품 문 입에
다 삼켜버린 듯컨만
안타까운 가슴 앞에
영원인들 그 무어냐?
무한인들, 그 무어냐?
굽힐 줄 모르는 맘
부르고 또 불렀다.
목에 핏대 팔뚝같이 돋고
배는 대장장이의 가죽 풍군 듯
뱃겨 쳐 불며 불며
열 두 고비 마지막 끝에서 울려대는 소리
어어이, 어어이.
천지는 무정하건만
그 강剛엔 못 견디었나?
천지 유정해, 그 성誠에 감동돼
한 때를 빌렸나?
요란하던 세계에 이는 또 무슨 일인가?
바람 쉬고,
물결 자고.
소리 죽고,
바다 잔잔해,
천지는 잠쪽 고요해졌네.
이 일순一瞬,
이 고요한 일순,
이 눅어진 일순,
하늘 땅 사라져간 곳을 모르고
有無는 녹아들어 한 빛뿐이더라.
찰나,
모든 힘이 치륜齒輪이 멎는 시간,
우주가 숨을 쉬는 시간,
들어간 숨이 아직 나오기 전,
나는 숨 채 들어가기 전
호呼도 아닌,
흡吸도 아닌,
생生도 아닌,
사死도 아닌,
순간에도 차지 못할 찰나.
이 일一 찰나,
모든 동정 다 사라져 없고,
모든 적의敵意도 다 물러가 없고,
주관 객관 싸움도 없고,
무한을 단번에 만지는 찰나.
오직 하나 때만,
오직 하나 숨만,
오직 하나 삶만,
오직 하나 뜻만,
오직 하나 하나만,
하나만인 그 찰나에
모든 것이 다 죽은 시간
부르다 부르다 끊어진
바드득 쥐어짜 부른 끊어진 소리만
거칠 것이 없이 뚫고 달았다.
물 위로,
바람 위로,
구름을 뚫고,
하늘을 뚫고,
저 건너로 저 밖으로.
들렸나 아니 들렸나?
어디로 갔나?
하늘 땅은 알 리도 없고,
부른 제 맘만이
안다면 오직 홀로 알 소식.
부르기를 마치고
그 바다같이 잠깐 잠잠한 후
나발했던 두 손 갈라
오그려 좌우 두 귀에 대고
실눈을 감으며 어부는 선다.
바람 또 아우성친다,
물결 또 들였다 친다,
소리 또 뒤흔든다,
바다 또 늠실거린다,
억만 년 전부터 하는 그 장단대로.
하건만, 바람소리 모르는 듯,
물결 뛰놈 아니 보는 듯,
모래밭의 회리바람 아니 무서운 듯,
수평선 넘어오는 소식 오직 들으려
어부는 숨을 죽이고 등걸처럼 선다.
소식 갔는지?
소식 왔는지?
알 길도 없고
어디로선지 모르게 날아온 백조 한 마리
안기듯이 발 앞에 풍덩 떨어져 앉는다.
끝없는 바다 끝없는 모래밭,
그칠 줄 모르는 떨리는 교향악
수평선 지평선 넘겨다보며,
그 서품에 천평선天平線 기대고 서서,
어부는 영원히 영원을 내다보더라.
살림살이
영원무한 산 얼에서 잘라내인 이 한 토막
인생이라 이름하니 다시없는 살림이라.
다시없는 이 살림을 없이 봐온 오천 년에
쭈그려 쪼든 생명 어이 다시 살려낼꼬
푸른 하늘 우러러서 잊음 없이 바랄 거니
한이 없이 높이높이 끝이 없이 널리널리
하늘로다 머리 두고 허리펴는 대장부라
몸 하나를 꼿꼿이 함 근본 인생 제 꼴이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두터운 땅 밟고 서면
만 오천 리 땅 속까지 그 울림이 내려갈 듯
배에 중심 얹고 나면 태산 갖다 심어논 듯
보기 싫게 눕기라곤 잠깐 사는 밤동안 뿐
닭 울기에 일어 앉아 하룻살림 준비할 제
백 스물 뼈마디를 고루고루 놀려보고
이삼백만 털구멍을 맑은 물로 닦아낸 후
꿇어앉아 명상으로 새는 날을 맞이하자.
만물 주인 이 몸이요 우주중심 이 맘이니
손 끝 발 끝 가는 곳을 허수하게 두지말고
내 몸거둠 내가 하여 남의 힘을 빌지마라
남의 짐질 겹쳐 짐이 종살이의 시작이라
먹고 입음 간단하게 낮음하게 절약하여
남는 거로 남을 돕고 널리 동무 사귈거요
술 담배에 빠져들어 더럽는 일 분히 알아
한 방울에 한 모금을 입술에도 대지 마라
일이거나 운동이나 하루 한번 힘껏 놀려
이마 위에 흘린 땀에 얼굴 빛을 낼 것이오
'이따 잘'을 믿지 말고 하루 한 줄 맛봐 읽어
끊지 않는 독서로써 마음 닦기 잊지 마라
높은 산에 올라보기 넓은 바다 나가보기
인간세상 돌아보기 때로때로 할 것이요
생명 불꽃 타고난 것 풀이거나 짐승이나
사랑하여 보호하고 쓸데없이 해치 말라
세상 갖은 모든 죄악 돈에 팔려 나는 거니
빚 지고서 구차하게 살잔 생각 꿈에 말고
천하 더럼 모아놓고 문화라고 취해 살다
멸망하는 도시 불집 어서 바삐 도망하라
열두가지 조목조목 어렵다야 하랴마는
꾸준하게 이어감이 산 생명의 줄이더라
산 생명의 그 줄 잡아 날로날로 �아내면
굽이치는 큰 물결이 온 누리에 넘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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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至聖所)의 언어와 세계성의 탐험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너머"는 1953년 3월 피난지 부산에서 처음 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는데 한국사회가 4.19와 5ㆍ16으로 요동치던 1961년에 개정판이 나온다. 그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8.15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였다고 한다. 쉰 날(50일) 동안 신의주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썼던 옥중시 300여 편을 모아 ‘쉰 날’이라는 제목의 육필시집을 꾸몄는데, 월남을 하는 도정에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실되고 말았다 한다. 6.25전쟁의 피난 생활 와중에도 그는 줄기차게 시를 쓰면서 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나섰는데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가 쓴 시들을 등사하여 열독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집 「머리말」은 그의 시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솔직담백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그 자체로 특성 있는 문학론이자 시론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전업작가로서의 시인을 자신의 시 창작에서 거부하고 있다. 이는 3.1운동 직후의 신채호의 문학주의 문학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킨다. 의사ㆍ미술ㆍ교육ㆍ농부ㆍ역사ㆍ"성경" 연구 등에 두루 몰입되어왔음을 밝히면서 얼핏 자기 비하발언을 하고 있는 듯싶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절대가치를 찾기 위한 기나긴 고난의 도정, 종교인으로서 ‘천로역정’과도 같은 줄기찬 영혼의 편력 끝에 마침내 다다른 궁극적인 경지를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그냥 지고지순의 높은 차원이 아니라 ‘성령의 언어’로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지성소’의 신비스러운 체험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시는 결코 세속적인 언어의 주택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라는 결론 부분의 문장에서 그가 시 창작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작가-작품-독자의 만남을 통상적으로 문학이라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독자를 설정하지 않는다. 내 맘에 칼질을 한 것이 그의 시문학의 출발지가 되고 님 앞에 다 바칠 뿐인 것이 그 시문학의 도착지가 된다면 이는 절대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절대문학의 완성이 된다. 오도송(悟道頌)의 차원이 아니며 그보다도 윗길로 올라간, 비유컨대 불립문자 유형으로 이루어지는 ‘진실문자’의 난해한 표현이 되고, 표층구조로 드러낼 수 없는 심충구조를 비상수단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미학표현의 시어가 된다.
1950년대의 무질서와 혼란, 지식인사회의 천박한 학문수준과 곡학아세의 구조 속에서 시인 함석헌의 시문학은 돌연하기도 하고 당돌하기도 하다. 절망의 상황을 비밀 코드의 희망 언어로 돌파하려는 그 자신의 인간혁명 결단과 각오를 읽을 수 있다. 그 출발은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천상천하 문학이고, 득의환희의 비밀암호 문학이다.
시인 고은이 “모든 문인은 그 개개인으로서 이미 독립정부인 것”이라고 했지만, 함석헌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시인 함석헌이야말로 세속적인 문학행위의 시문학 아니라 하나님의 성스러운 역사(役事)로서의 시문학이었다. 이 역사를 어찌 전달할까 고심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시 언어는 문학주의 문학과는 달리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따름이다. 그는 언어를 믿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절대체험을 실어낼 수 있는 다른 표현 방도가 없기 때문에 시의 언어를 채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논리적인 문장이나 학술적인 설명방식 따위보다는 시의 언어가 더 진솔하고 진실하다고 시의 표현법을 승인해주려 하는 것이다.(박태순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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