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7. 20:18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십수년전 나는 배가 남산만큼 불렀을때
언감생심 자연분만을 해볼 요량으로
운동을 많이 하면 쉽게 낳을 수 있다는 친구들의 말에 힘입어
배를 앞으로 있는대로 내밀며 신나게 으시대고 다녔는데,
......
그 배를 해가지고도 내 딴에는 태교를 한답시고
미술 전시회니 음악회니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혼자 가려니 불편도 하거니와 모양새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신랑에게 부탁하면 태교에 아주 비협조적으로
마지못해 응해주는 아빠로서의 함량미달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어느 음악회에 갔을때의 일이다.
베토벤 심포니 <전원> 2악장에서
천둥동반한 폭우 그치고 난후의 숲속 뻐꾸기 지저귐을
클라리넷과 플룻이 주거니 받거니 눈물나게 아름답게 펼치고있는데
옆에서 느닷없이 코를 곤다.
급기야 3악장 끝나고는 박수를 쳐 망신을 떨었고,
끝나고 나가면서는 전국노래자랑이 재밌지, 이런델 모하러 오냐는둥
여지없이 무식을 드러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따라다니기 싫어 포기하게 만들려는 저의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영국의 로열발레단이 온다는 소식에 티켓을 예매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백조의 호수>를 보러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는데,
발레만큼은 TV로 보는게 나은 것 같다.
독무의 현란한 개인기와, 백조의호수 3막의 백조군무,
<지젤> 2막의 신비롭고 차가운 윌리의 춤은
단연 발레의 백미로 꼽히는데
TV로 볼때는 대단히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또한 차이콥스키의 슬픈 전설의 선율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직접 무대를 접하고 보니
현란한 춤동작은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무중력의 예술이라는 발레의 환상은 깨어지고
화려한 개인기에 화답하는 박수에
스토리와 음악은 자꾸 끊어져서 감동이 반감된 탓에
나는 무척이나 불만 스러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차라리 써커스가 훨씬 재밌지, 모가 재밌다고 이런걸 보냐."
예의 그 무식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
어쨋든 극성맞은 태교 덕인지는 모르나
왠만한 오페라 아리아의 멜로디는 따라부르고
음악의 내용에 관해 나름대로의 느낌을 피력할 줄 아는
풍부한 감성 지닌 아이를 보면서
얽힌 여러 일들이 생각나 빙그레 웃음이 날 때가 있다.
태교를 빙자하여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싸돌아 다닌 덕에
반추할 여러가지 기억들이 있어 좋으니
뱃속에서 부터 효도한 아이가 기특하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
그 후 노산에다 초산이란 사실을 잊고
자연분만 해보려다 죽을뻔 하고 제왕을 했었는데
배 내밀고 으시대며 운동삼아 다녔던 일들이
모두 허사가 된 셈이었다.
< 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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