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딸

2008. 6. 19. 07:54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오척 단신에 금테가 둘러진 모자를 쓰고
거의 땅에 닿을듯한 장검을 옆에 차고
외가의 안방벽에 걸려 있던 빛바랜 사진속 모습은,
너무나 무섭고 낯설어 어린 내겐 생게망게한 일이었지만
내 외조부님의 모습이었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엉성한 다리 위에서
무서워 걸음을 떼지 못하던 나를 업어주셨던 그날,
다리 밑으로 흐르던 시내와
조부님의 따스한 품으로 안심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내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문병간 딸네 식구를 배웅하셨던 날이었고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운명을 달리하셨으니
세살이던 외손주인 나와는 처음이자 마지막 상면이 되었던 셈이고
외조부님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다.


선녀같은 고운 자태를 지니셨던 외조모님과는
딸 일곱과 마지막으로 아들하나 얻어 팔 남매를 두셨고
일곱딸의 이발을 손수 해주실만큼 자상하셨다는 외할아버지는
일제때 고향에서 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봉직하셨다 한다.

 

그때의 여러 일화들은 요즘도 고향의 어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일제 강점기가 절정에 달할 무렵 고향에서도 독립군이 일어났는데
수사가 진행될 때 마다 비밀선을 통하여 그 계획을 미리 알려
희생을 예방했고
급작스런 색출작전 있을때는 옆에 찬 큰 칼이 걸음에 따라
철거덕거리며 내는 소리에
야심한 시간 일종의 신호음 구실을 하여
모였던 자리가 노름판으로 재빨리 둔갑할 수 있어서
많은 인명을 구했다는 일화다.
광복이 되었을때 고향의 여러집들이
곡괭이로 구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고
따돌림 당하여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등지곤 했으나
내 외가는 누구 하나 흘기는 사람 없었고 오히려 걱정해주었다 한다.

 

 

 

 

 

 

 

 

 


 

 

 


 

얼마후 삼척의 경찰서장으로 이동이 되셨는데
시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까닭으로 외할머니는 고향에 남으셨고
그 곳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셨던 탓인지
몇 대째 독자로 내려오는 외로움을 덜어볼 생각 이셨던지
작은댁을 들이신 할아버지는
이미 아들 하나를 얻으신 후에 네째딸(내어머니)을 불러 삼척 여자 중학교에 입학을 시킨다.
그때, 입학시험 치른 일을 두고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 교장실에서 시험문제를 풀고있는데
답안지의 반도 채워지기 전에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라, 하면서
걷어가 버리더라,

그리고선 자기네끼리 서장님 초대에 늦겠다며 서둘러 나가더라..."

 

지금 생각하면 부정입학인 셈이었는데
그 곳에서의 학창시절을 내 어머니는 행복한 추억으로 오래도록 간직 하셨다.

 

 

 

 

 

 


 

 

 

 

 

 

광복이 되자 어느날 본가로 오시어
어린딸 들을 모두 앉히시고는
반닫이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펼쳐 보이셨단다.
빛바래 색은 선명치 않았으나
태극기라는 것을 어머니는 그때서야 처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인지 전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만주로 홀로 떠나 무슨 일을 하셨는지 크게 성공도 하여
영구 귀국 하실때엔 현금이 가득한 자루를 둘러메고 돌아오셨단다.
그러나 친척분의 농간으로 모두 없애는 비운을 겪으시고
옹색한 초가 딸린 천여평의 과수원을 겨우 마련하고 돌아가신다.

 

광복후 그만두신 경찰에 복직을 하셨고, 동란을 겪으신후
51세 아까운 나이에 작은외할머니 소생의 핏덩이 사남매를 남기고
수술후 합병증으로 결국 돌아가시게 되는데...
장례를 치르신후 당신의 친정 가까운 정선에서
터를 잡은 작은 외가는 본가와 단절하고만다.

 

 

 

 

 

 

 





그 후 내어머니의 이복인 외삼촌들은 신검 문제로 고향을 찾으셨고
흥근히 젖은 얼굴의 어머니를 보며
나는 두 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다만 서울의 대학생이었던 친척의 방문을 친구들에게
철없이 자랑했었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결혼문제로 크게들 상처를 받으신후
극복 못하시고 작은 외가의 두분 외삼촌 모두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셨는데
서자라는 굴레를 자식에겐 물려줄 필요 없는,
적서의 개념이 없는 땅으로 탈출을 하신 것도 같다.

 

 

 

 

 

 

 

 

 

 

 

 

 

 

네째딸을 앞세우는 참척을 겪으신 외할머니는,
장수하셔서 구십을 넘기시더니 결국 같은 해에 돌아가시고야 만다.
이모님들과 외삼촌이 지닌 기억의 편린들을 모자이크한 내용들이라 순서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단신의 체구로 일정과 동란이라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돌파하시고
두 집안의 가장으로서 종횡무진 짧고도 굵은 획을 그으며
일생을 풍미하셨던 나의 외조부님은
슬하에 십일남매를 두셨고 지금은 백이넘는 자손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당신 삶의 범위를 넓게 확장하는 기백과 포부를 지니셨던
멋진 남성이 아니었나 상상이 된다.


비록 조부님을 추억 할수있는 분량은 적으나
언제나 자랑스럽고 그리워
오래 생존해 계셨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당시 비위생적이었던 우리네 생활문화와
몰염치와 무책임, 무경우와 무원칙,
그리고 불친절과 무례에 관해서
저들과 비교하며 '배울것도 많다... ' 하셨던 어머니는
우리의 핀잔을 사기도 했는데
우리에겐 생소했던 귤이나 햄같은 식품들을 설명 하실때 아련해지던 눈빛을 보고
우리는 <친일파의 딸>의 향수라 성토했으나


그것은 일제에 대한 향수라기 보다
그러한 기억들과 함께 연상되는 당신 아버지에 대한
목메이게 절절한 그리움의 눈빛이 아니었나,
뒤늦게 철든 짐작을 해본다...

 

 

 


 

 

 

 

 

 

< 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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