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2008. 3. 13. 18:40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 어느 날 아침, 먼 산비탈을 그리즐리(북미산 큰 회색곰)가 걸어가고 있었다.

들판에서 곰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체험일까.

저기 한 마리 곰이 있을 뿐인데도 광대한 풍경은 묘한 긴장감을 띠게 된다.

며칠 뒤 툰드라 저쪽에서 검은 이리가 나타났다.

백야의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이리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먼 거리인데도 이리는 문득 나를 알아차리고

섬광처럼 달려서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그 까만 점이 내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내가 감동한 것은 분명 이리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펼쳐진 공간 때문이었다.

그 배후에 있는, 지금까지 이리가 살아온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그래서 풍경은 이리나 곰 한마리만으로도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시노 미치오 /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p 56)

 

 

 

 

 

 

 

 

자연을 찍는 사진가 중에도 

사진을 하나의 상품으로 자연 속에서 오려내서는

소비자인 독자 앞에 여봐란 듯이 득의에 찬 얼굴로 내미는 사람이 많다.

솜씨가 좋으면 그래도 사람들의 눈을 만족시키지만,

눈길은 가도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없어서 끝내는 잊혀지고 만다.

예술품과 상품의 경계선이 어디쯤에서 그어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시노 씨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의 동물 사진을 보면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에 뭔가 대화가 오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어 없이도 성립하는 대화가 거기에는 있다.

"치즈"하며 포즈를 잡은 사진도 아니고,

무턱대고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다가 요행으로 건진 사진도 아니다.

셔터 찬스를 계산한 것이 아닌데도

이것밖에 없겠다 싶은 순간의 동물 표정을

그는 필름에 담아낸다.

이는 무언의 대화를 통해서 피사체와 한 몸이 되는

사진가의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강물 속에서 연어를 몰고 있는 곰,

곰의 아가리에 물린 연어,

모두 표정이 있고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언어가 들려온다.

그의 책에 실린 작품 중에는

얼음바다를 걷는 북극곰 두 마리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고독을 호소하는 듯한 그 모습은

인간의 언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표피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사진이 아니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同  p 253~254)

 

 

  

 

 

 

 

 

이 책의<카리부의 여행을 찾아서>라는 글은

그의 사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말해준다.

5월에 세스나기를 전세 내어 카리부가 지나갈것으로 짐작되는 계곡에

혼자 내려서 텐트를 친다.

카리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그 동물들을 이제는 빼앗기고 있는 원주민을 생각하는 등

 이런저런 사색을 하면서 7월을 맞이하고, 마침내 기다리던 그날을 맞이한다.

그러나 툰드라 저쪽에서 나타난 카리부 떼는

 카메라 앵글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내던지고 그 무리 속에 드러누워서

그저 그 광경을 기억 속에 남기려 했다고 썼다.    

...... 

 

그렇게 '헛됫 시간'을 보냈지만,

그 '헛된 시간'들 사이에 접하는 우주와 거기에서 자라는 감성이

그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의 원천이다.

그는 『여행하는 나무』라는 저서의 <물망초>라는 글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텔레비전 스태프와 여행을 나섰다가

촬영이 잘 진행되지 않아 조바심을 태운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그 가운데 이런 글이 있다.   

 

결과가 처음 의도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거기서 보낸 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거기서 보낸 다시없이 소중한 그 시간이다.

뺨을 어루만지는 북극 바람의 감촉,

여름철 툰드라의 달콤한 냄새,

백야의 희뿌연 빛,

못보고 지나칠 뻔한 작은 물망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겨놓고 싶다.

아무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그런 것을을 언젠가 내 아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호시노 미치오 /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p 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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